외래화상外來和尙
당나라 때 선종禪宗의 주요 종파인 홍주종洪州宗을 만든 마조馬祖는 성도 출신인데, 명성을 얻은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에 득도한 고승이 온다는 소문으로 성도 전체가 들끓었으나, 정작 마조가 모습을 드러내자 구경꾼들이 '마삼태기 아들이잖아.' 이러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기대했던 고승이 잘 아는 삼태기 장수의 아들임을 알고 대단하게 여겼던 생각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낯선 자가 오히려 잘 먹힌다는 뜻으로 외래화상호념경外來和尙好念經이라는 말이 생겼다.
"저기 모여서 뭘 하는 거지?"
아침 일찍 태극혜검의 구결을 해독하러 옥청전으로 가던 장로가 걸음을 멈추고 수행한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철혈방 방주가 태극권을 수련한다고 하여 제자들이 몰려 구경하는 겁니다."
"철혈방 방주가 태극권을?"
궁금증이 도진 장로는 수십 명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약관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주변도 잊고 열심히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괜찮군.'
장로는 양의검법에 심취해 태극권을 익히지 않았지만, 안목은 높은 편이어서 딱히 특별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구후영의 태극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부. 저자의 태극권이 정말 그리도 대단합니까?"
수행하던 제자 중 하나가 질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작고한 대장로께서 태극권을 수련할 때도 저리 많은 제자가 몰리지 않았잖습니까."
그 말에 장로가 껄껄 웃었다.
"무당 제자도 아닌 자가 태극권을 수련하니 신기해서 그러는 거겠지. 딱히 흠잡을 곳은 없으나, 특별히 눈여겨볼 데도 없는 평이한 수준이다."
구후영의 태극권은 경지가 꽤 높아 보였으나, 그뿐이었다. 경력을 싣는다고 강한 초식이 될 것 같지 않고, 실전에서 써먹기도 부족해 보였다.
"그런 거죠? 괜한 소문 때문에 마음이 찝찝했습니다."
"소문? 무슨 소문 말이냐?"
"철혈방 방주가 작고한 대장로와 대결해 동수를 이뤘다는 소문 말입니다."
제자의 말에 장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떤 무엄한 자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퍼뜨린단 말인가.'
장로는 장문 자리도 불사하고 수련에 전념한 현현자를 평소 존경했고,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하나 곳곳에 현기가 서린 태극혜검을 읽으며 그 마음이 한결 커졌다.
그런데 비록 소문뿐이긴 하나 약관 정도로 보이는 철혈방 방주가 현현자와 동수를 이뤘다는 말에 분노가 치솟았다.
"옥청전에 가서 내가 늦는다고 전해라."
말을 마친 장로가 성큼성큼 걸어서 구후영에게 다가갔다. 그에 한숨을 푹 쉰 큰 제자가 막내 사제에게 분부했다.
"사부께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조금 늦는다고 말해라."
지시받은 막내 사제가 바로 경공을 펼쳐 출발했다.
그러는 사이, 장로는 어느새 구경하는 제자들을 헤치고 구후영에게 접근했다.
"훌륭한 태극권이오."
내공을 실은 장로의 외침에 구후영이 수련을 멈췄다.
"견인堅靭하나 부드러운 무당의 기상을 한 번 담아봤소."
그날, 구후영은 뒤늦게 해검지에 들이닥친 무당 제자들에게 계약을 체결한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그저 무도한 무리가 해검지를 습격해 자신의 보검을 훔쳤다고만 말했다.
해검지를 지키던 제자들이 돌아와 구후영의 말에 힘을 실어준 덕분에 무당도 구후영을 난처하게 굴지 않았고, 수십 명의 제자를 급히 파견해 어떻게든 구후영의 검을 찾아오려 했다.
더불어 귀빈을 접대하는 방을 내서 구후영과 양달을 머물게 했는데, 양달은 보혈補血이 느려 회복이 생각보다 더딘 탓에 아직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구후영은 그런 양달이 안타까웠지만, 딱히 달리 해줄 치료도 없고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밖에 나와 태극권을 수련하며 소일했다.
"허허. 마냥 좋게 들리진 않소."
장로는 외인에 불과한 구후영이 무당의 무공에 무당의 기상을 담았다고 하니 괜히 거슬렸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니 좋게 들으시면 되오."
구후영이 까칠하게 받아쳤다.
"좋은 뜻이면 좋게 말해야지."
장로 역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한 사람이 한 말을 열 사람이 열 가지로 듣소."
"열 사람 다 똑같이 들으면 말한 사람 탓이 아니겠소?"
"원하는 게 뭐요?"
누가 봐도 장로가 시비를 걸려는 모습이었다.
"사과하시오."
"뭘 사과하란 말이오?"
"헛소문을 퍼뜨린 일을 사과하시오."
"설마 현현자 장로와 대결한 소문을 말하는 것이오?"
"잘 아는군."
"그날 대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무당 제자가 열 명이 넘는데, 내가 사과하면 없던 일이 되오?"
"뭐라고?"
성격이 급한 장로가 눈알을 부라렸다.
안 그래도 울고 싶었던 구후영은 뺨을 때려준 장로 덕분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날 백옥봉에 있었던 무당 사람들한테 확인해 보시오. 그리고 소문도 내가 낸 게 아니오."
소문은 해검지를 지키던 제자들이 낸 거였다.
물론, 그들도 일부러 소문내려고 했던 건 아니다. 들려줄 때 너만 알고 있으라고 했는데, 들은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했을 뿐이다.
"현현자 대사형과 동수를 이룰 정도면, 나 따위는 별 힘을 안 들이고도 쉽게 이기겠군."
"과찬의 말씀이오."
"무당 장로 현정자요. 방주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소."
구후영의 오만한 태도에 분을 못 참은 현정자가 검지와 중지를 붙여 수검手劍을 만든 다음 양의검법의 초식으로 공격했다.
"가르치는 재주는 별론데."
구후영이 뒷짐을 진 채 상체를 비틀어 현정자의 찌르기를 피했다. 양의검법 중에서도 꽤 강한 초식인 어관이출魚貫而出을 구후영이 손쉽게 피하자 구경하던 제자들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에 현정자의 분노가 한결 커졌다.
'살초는 자제하려 했건만.'
현정자는 다시 쌍어파미雙魚擺尾의 초식으로 구후영을 공격했다. 한 자루 검이 두 자루처럼 보이는 특이한 초식으로, 공격 범위가 넓어 회피가 몹시 어렵다.
하지만.
구후영은 여전히 뒷짐을 쥔 채 현정자가 진심을 다한 공격을 수월하게 피했다.
'어떻게!'
쌍어파미는 한 자루 검이 두 자루처럼 보이는 거지, 진짜 두 자루가 되는 건 아니다.
구후영은 가만히 있다가 쌍어파미의 변화가 거의 사라질 무렵에야 상체를 흔들어 공격을 피했다. 상대가 회피하면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쌍어파미의 약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현정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이 초식은 아는 사람이 몇 명 없는데.'
상대가 현현자 수준의 무인이 아니라면 쌍어파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데, 쌍어파미는 무당에서도 아는 사람이 다섯 명밖에 없는 어려운 초식이다.
'진짜 대사형과 동수를 이뤘을까?'
상대가 쌍어파미의 초식을 처음 보고도 완벽히 대처한 거라면 현현자와 동수를 이뤘다는 게 그저 헛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연히 막은 거야.'
애써 부정한 현정자는 수검으로 구후영의 가슴을 정직하게 찔렀다.
'이것까지 막으면 인정하지.'
구후영이 똑같이 상체를 젖히자, 수검이 부르르 떨리면서 갑자기 목과 단전까지 공격 범위에 넣었다.
그에 구후영이 상체를 옆으로 젖히던 걸 멈추고 되레 앞으로 기울여 목을 드러내고 단전을 감췄다.
'어!'
구후영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처에 현정자는 목 혹은 가슴밖에 노릴 수 없게 되었다.
'젠장.'
당황한 현정자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방금 펼친 건 아직 덜 다듬어져서 이름도 안 지은 미완성 초식으로, 구후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응을 보이자 오히려 현정자의 사고가 엉켜버렸다.
'헛소문이 아닌 건가?'
아직 완성하지 못해 누구한테도 알려주지 않은 초식이기에 상대가 귀신이 아닌 이상 알 방법이 없다. 게다가 완성도가 부족할 뿐, 초식 자체의 위력은 양의검법의 기존 초식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여전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현정자의 머리는 이미 인정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양의검법이오?"
심각한 갈등에 허덕이던 현정자는 구후영이 질문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삼풍 진인께서 구십에 양의검법을 만들고 백 세에 태극권을 창안했다고 들었소."
구후영이 뒷짐을 쥔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양의검법이 태극권으로 가는 길에 얻은 깨달음이란 뜻인데, 왜 무당은 태극권을 버리고 양의검법에 집착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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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믿기 힘든 소문을 들었다."
현영자가 얼굴을 단단히 굳히고 말했다.
"무당 제자들이 철혈방 방주한테 가서 태극권을 배우고, 몇몇 장로도 거기에 동조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인가?"
장로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실입니다."
결국, 옥무영과 같은 배분의 장로 중 가장 어린 자가 주변 눈치를 못 이겨 현영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해검지에서 분실한 검을 찾는 일은 어떻게 됐지?"
현영자는 어서 검을 돌려주고 구후영을 무당에서 쫓아내고 싶었다.
"사형. 쫓아낸다고 될 일이 아니오."
현영자와 같은 배분의 장로가 나섰다.
"백옥봉에서 있었던 일이 이미 호북 전역에 퍼졌소."
"태극혜검만 해석하면 그깟 소문은 별 상관이 없다."
"문제는 진전이 전혀 없다는 게 아니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앞의 열여섯 글자만이라도 알 만한 사람한테 자문하는 건 어떻소?"
"설마."
사제의 말에 현영자가 눈알을 크게 부라렸다.
"철혈방 방주에게 태극혜검을 보여주자는 뜻인가?"
현현자의 깨달음은 구후영과 내공 대결을 벌인 후에 얻은 것이다. 현재 세상천지에서 태극혜검을 알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가능성은 구후영이 제일 크다.
"그자에겐 두 개의 문파에 가문도 있소. 그 많은 걸 걸고 모험할 것 같진 않소. 게다가 다 보여주자는 것도 아니잖소."
제안한 장로는 구후영이 태극혜검의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한다고 자신했다.
"누군가가 천자문을 보여주면서 무공으로 해석하라면 넌 어찌 생각할 것 같은데?"
현영자가 반대했다.
"그 천자문이 서당을 다니는 아이가 썼는지 당대의 석학이 썼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겠소?"
사제의 고집에 현영자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자가 방향 정도는 제시할지도 모른다.'
잠깐 고민한 현영자가 장로들에게 질문했다.
"여기서 철혈방 방주와 제일 친한 사람이 누구지?"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중에, 장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다름이 아닌, 구후영과 대결했던 현정자였다.
"술 들고 찾아가서 대화하다가 태극혜검의 인자가 천자문을 시작하는 열여섯 글자라고 부주의한 척 흘려라. 그리고 그자가 한 말을 토씨 하나 빼지 말고 외워서 전해라."
현정자는 내키지 않았으나 현영자의 위세가 두려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때. 누군가가 옥청전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누구야!"
문에 가까이 있던 장로가 목청을 키워 외쳤다.
"철혈방 방주가 방에 서신 한 장 남기고 떠났습니다. 꼭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 급히 보고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든 현영자는 직접 문을 열고 구후영이 남긴 서신을 받아 확인했다. 서신은 특별히 준비한 건 아니고 겨울에 문틈을 봉하는 데 쓰는 거칠고 두꺼운 종이였다.
거기엔 붓으로 그린,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태극 문양만 떡하니 있었다.
- 작가의말
신구후영 : 니들이 태극을 알아? 정 궁금하면 4주 뒤에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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