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추주順水推舟
진시황이 죽고 곳곳에 봉기가 일었다. 진나라는 사십만 군대를 파견해 봉기를 진압하고, 조나라의 군대를 거록에 몰아넣었다.
그에 초회왕이 송의와 항우에게 이십만 군대를 줘서 조나라를 지원케 했다.
송의는 안양에 이른 후 오십 일 가까이 강을 건너지 않고 진나라가 조나라와 먼저 싸워 지치길 기다렸다.
이에 항우가 검을 뽑아 송의의 목을 베고, 군사를 이끌어 황하를 건넜다.
황하를 건넌 항우는 배에 구멍을 내 가라앉히고 가마솥을 모두 부순 다음, 바로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퇴로가 막히고 밥 지을 솥마저 없어진 초나라 군대는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대승을 거뒀다.
"지금은 파부침주破釜浸舟할 때입니다."
단아가 말했다.
"이대로 기다리면 고통스러운 죽음밖에 없습니다. 우모침에 당한 자는 길어야 두 달을 버텼다고 합니다."
구후영이 말한 치료법이 언뜻 기상천외하고 불가사의하게 들렸지만, 단아는 그게 오히려 낫다고 판단했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구후영이 말했다.
"심장을 멈추는 건 제가 배운 침술로 됩니다. 그런데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면 약효가 정말 강한 약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약입니까."
"제게 의술을 가르친 신 명의가 이런 치료를 세 번 한 적 있는데, 세 번 모두 안궁환을 썼습니다."
구후영은 치료 방법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다.
"먼저 안궁환을 먹은 다음, 침술로 심장을 멈춥니다. 심장이 멈추면 몸은 저항하지 않고 치료를 고분고분 받아들입니다. 다들 손사래를 치는 불치병도 치료할 수 있죠. 안궁환은 치료 과정에 몸이 최대한 버티도록 돕고, 치료가 끝난 다음엔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역할입니다."
"안궁환에 그런 효능도 있습니까?"
단아가 질문했다.
"약 자체에는 없죠. 침술로 약 기운을 심맥으로 끌어와 이용하는 겁니다."
구후영이 잠깐 망설이다가 사족을 보탰다.
"우모침을 제거하는 건 자신 있습니다. 황제를 치료할 때 비슷한 걸 해본 적이 있으니깐요. 제가 걱정하는 건 처음에 심장을 멈추는 것과 마지막에 다시 심장을 뛰게 하는 일입니다. 들어만 봤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안궁환이나 그에 버금가는 약이 없으면 치료가 불가하단 말입니까?"
좌호법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질문했다.
"이론상 내공으로 대체할 순 있으나, 약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공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습니까."
단아가 물었다.
"심장을 멈추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고, 우모침을 얼마나 빨리 제거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약이 있으면 깨우는 건 어느 정도 자신 있고, 내공으론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우모침에 당한 게 언젠지 알면 좋겠군요."
"깨워서 물어봐야겠습니다."
구후영이 침으로 우호법을 찔렀다.
"컥!"
우호법이 숨 막히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우호법, 정신 차리고 내 말에 대답해. 우모침에 당한 게 언제야?"
우호법은 몇 번이나 눈을 껌뻑이고 나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단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놈에게 잡힌 건 유월 초입니다. 우모침은 모릅니다."
"어떻게 잡혔는데?"
"내공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발견하고 산공독이나 비슷한 독에 당한 거로 생각해 도망쳤습니다. 그때 그 어린놈이 나타났는데, 손가락을 접으니 혼절했습니다."
우호법이 두서없이 말했지만, 다들 용케 알아들었다.
"기록으로 봤는데, 우모침이 혈관을 파고들면 본인도 못 느끼는 통증으로 혼절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확실친 않지만, 최악의 경우 두 달 넘게 지났는지도 모른다.
"현재 상황은 이렇다."
단아가 구후영의 치료법을 설명하고, 약을 구할 때까지 기다릴지 바로 치료할지를 우호법에게 물었다.
"교주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어냐?"
"저와 좌호법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오 년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침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주, 저놈이 죽는다니까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좌호법이 이를 갈았다.
"곧 죽을 놈 소원이라 생각하고 교주께서 도와주십시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걸 보면 굉장히 중요한 일인가 보다.'
대화를 듣던 자룡이 생각했다.
"내게 뭘 도우란 말이냐?"
"법도에 따르면, 교주가 성혼하기 전에 저와 좌호법은 동침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동침이 뭐길래 누나가 결혼해야 우호법이 그걸 할 수 있는 거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지만, 분위기가 하도 무거워서 자룡은 입을 열어 질문할 수 없었다.
"법도는 무시해도 좋다."
'잘됐구나.'
자룡은 우호법이 동침을 허락받은 게 자기 일처럼 기뻤다.
"안 됩니다."
좌호법이 반대했다.
"그깟 동침이 뭐라고 교의 법도까지 어깁니까."
'그깟 동침? 우호법에겐 매우 중요하나 좌호법에겐 그깟 일밖에 안 되는 모양이구나.'
대화가 진행될수록 자룡의 궁금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치료 방법을 상의하는 게 더 시급한 거 같습니다."
내내 대화에 끼지 못하던 구후영이 말했다.
"서안부까지 가서 안궁환을 얻어 오는 사이 난 죽을지도 모르오. 순천부의 누가 안궁환이 있는지 알아내고, 그걸 사든지 뺏든지 하는 것도 돈과 시간이 적잖이 들 거요. 어쩔 수 없이 내공으로 치료해야 하는데, 죽을지도 모르니 우선 소원부터 이루고 싶소."
구구절절 옳은 말에 겨우 열렸던 구후영의 입이 꾹 닫혔다.
'저리도 하고 싶다는데, 그냥 하게 해주지.'
자룡은 현재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네놈이 죽을 때가 되니 망발을 일으키는구나."
보다 못한 좌호법이 꾸짖자 우호법도 언성을 높였다.
"교주께 정인과 성혼을 서두르라 하는 게 왜 망발이냐!"
우호법의 말에 좌호법이 몸을 흠칫 떨었다.
"정인?"
"누가 교주께 정정비定情匕를 줬고, 교주는 그걸 늘 갖고 다니신다."
우호법의 말에 좌호법이 벌떡 일어섰다.
"교주, 저 멍청한 놈의 말이 사실입니까?"
단아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교주. 저도 사실 동침을 하고 싶으나 교의 법도 때문에 참고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것을 위해서라도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좌호법도 하고 싶었구나. 참 다행이야.'
좌호법이 사실은 우호법과 같은 마음이었음을 확인한 자룡은 더없이 기뻤다.
반면, 같은 대화를 들은 구후영은 왠지 머리가 어지럽고.
'단 소저에게 정인이?'
속도 메스꺼웠다.
"교주. 이미 정정비까지 주고받은 마당에, 속하의 소원을 풀어주십시오."
우호법이 침상에서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건 정정비가 아니다. 구후 공자가 그간의 노고에 고맙다며 준 감사의 선물이다."
단아가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며 말했다.
'저건 내가 선물한 건데?'
"교의 전통에 따르면 사내는 여인에게 단단한 비수를 선물로 주어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표시하고, 여인은 비수를 받아 그걸로 자신의 정절을 지켜 평생 한 지아비만 모실 것을 약속합니다. 구후 공자가 모르고 줬다고 쳐도 교주는 받으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우호법의 말에 구후영은 망치에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비수를 받기 전에 자신한테 선물하는 거냐고 굳이 한 번 더 질문한 거였구나.'
메스껍던 속은 나아졌으나, 머리는 더 어지러웠다.
"그냥 형이랑 누나가 혼인하면 되는 거 아니야?"
자룡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서로 좋아하잖아. 할머니도 누나가 마음에 든다고 했고. 나도 마찬가지야."
구후영은 자룡의 말에 반박할 성현의 말씀이 백 개 넘게 머리에 떠올랐지만,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다잖아. 동침인지 뭔지 저리도 하고 싶다는데. 그러면 하게 해주는 게 도리 아니야?"
자룡의 엄정한 질타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안 된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구후영이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입을 열었다.
"단 소저.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오. 내가 의미를 모르고 비수를 선물한 건 맞지만, 알았다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거요. 지금 이 말도 우호법 때문에 하는 게 아니고, 언젠간 꼭 하고 싶었던 말이오."
다들 숨죽이고 구후영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청청자금靑靑子衿 유유아심悠悠我心."
그대의 푸르른 옷깃이 내 마음에 자꾸 아른거리오.
"청청자패靑靑子佩 유유아사悠悠我思."
그대의 푸르른 패대佩帶(패물을 묶는 끈)가 내 머리에 자꾸 아른거리오.
"예법에 어긋나나,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호구君子好逑라고 했소. 이 구후영이 부족함이 많으나 감히 단 소저에게 청혼하오."
할머니도 있고, 연무쌍도 있고, 임초현도 있다. 이런 상황에 구후영이 직접 단아한테 청혼하는 건 예법에 어긋난다.
그러나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므로 구후영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다.
"천작비익조天作比翼鳥 지위연리지地爲連理枝."
하늘에선 나란히 나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서로 이어진 연리지가 되리.
단아가 백거이의 시를 인용하여 구후영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당찬 편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확실한 말로 대답하기엔 부끄러움이 컸다.
'우호법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단아의 대답에 구후영은 하늘을 날 듯이 기쁜 동시에, 우호법에 대한 고마움이 무럭무럭 자랐다.
'뭐라는 거야?'
천자문도 제대로 못 뗀 자룡이 속으로 투덜거렸고, 글을 아예 모르는 우호법이 똑같은 얼굴로 자룡이 외롭지 않게 지켜줬다.
다행히 좌호법이 눈치로 일의 진행이 순조로움을 알았다.
"멍청한 놈. 빨리 부마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뭐 해."
좌호법의 말을 들은 우호법이 기쁜 얼굴로 넙죽 절했다.
"야효가 부마께 인사드립니다."
좌호법도 다시 무릎을 꿇었다.
"주요가 부마께 인사드립니다."
"야효? 주요?"
그제야 구후영은 우호법을 어디서 봤던지 깨달았다.
'수염 때문에 이제야 알아보다니.'
황궁에 있을 땐 얼굴이 하도 부어서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부기가 거의 내려 예전에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수염이 무성해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날 화산 제자로 오해한 것도 그 때문이구나.'
당시 청월이 구후영을 화산 일맥의 제자라고 했다. 관도에서 배월교 여자를 구할 때 주요가 구후영을 화산 소협이라고 호칭한 것도 그때 생긴 오해 때문인 게 분명하다.
"그럼 단 소저가 오공주요?"
용케 그때 일을 떠올린 구후영이 질문했다.
"현월궁 오공주 녹월이었죠. 지금은 그저 배월교의 단아입니다."
그때. 자룡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미 형과 누나가 성혼했으니, 이제 우호법이 동침할 차례요."
'동침한다고 하면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자룡은 동침에 대한 궁금을 드디어 풀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공주, 부마. 난 더 살고 싶습니다. 어서 치료해 주십시오."
동침을 꼭 하고 싶다고 떼쓰던 야효가 순식간에 얼굴을 바꿨다.
"약을 안 구하고 내공으로 치료할 생각이오?"
"잠시만요."
벌떡 일어선 야효가 봇짐을 뒤졌다.
"여기 있군요."
봇짐에서 환약 하나를 꺼낸 야효가 손아귀 힘으로 겉의 밀랍을 부순 다음 안에 든 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어서 치료하고 유근 죽이러 갑시다."
약을 다 삼킨 야효가 밀랍을 바닥에 버린 후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깨진 밀랍의 표면엔 안물안궁 네 글자가 양각으로 똑똑히 새겨 있었다.
- 작가의말
단아가 원한 것.
파부침주(가마를 부수고 배를 가라앉혀 퇴로를 없앰.)의 마음으로 우호법을 치료.
우호법이 원한 것.
순수추주(물길 따라 배를 밀다. 어차피 이뤄질 일에 힘을 보탬을 의미.)로 단아와 구후영의 혼인을 성사.
자룡이 원한 것.
동침(남자와 여자가 아기를 만들기 위해 고생하는 일.)을 구경.
결과.
청혼하고 받아주면서 목이성주木已成舟(나무의 속을 파서 배를 만든 바람에 더는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지 못함. 일이 이미 끝났다는 뜻.)의 상황.
미래.
두 사람은 풍우동주風雨同舟(비바람이 몰아쳐도 같은 배를 타고 쭉 갈 수밖에 없음.)가 예상됨.
위의 사자성어에 관해 여러분은 안물안궁이겠지만, 글쟁이는 TMI를 못 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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