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사사영含沙射影
옛날, 물에 역魊(물여우)이라는 벌레가 살아 입에 모래를 머금고 있다가 물에 비친 그림자만 보면 쐈는데, 모래에 그림자가 쏘인 사람들이 시름시름 앓았다고 한다.
"이건 함사사영이오."
그래서 암중에서 남을 암해하는 비열한 짓거리를 이르러 함사사영이라 했다.
"증거나 증인은 있소? 누가 봐도 믿을 만한 증거와 증인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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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무리가 홍엽산장의 연무장에서 조정과 화해의 명의로 대치한 이유를 따지자면 삼 년 전부터 얘기해야 한다.
복장표국은 고수가 적지만, 표국주 온휴가 수완이 좋고 발이 넓어 기세가 떠오르는 중천의 해와 같았다. 가을마다 관의 의뢰를 받아 쌀과 소금을 운반하면서 실익은 물론이고 온휴 뒤에 조정의 거물이 버티고 있다는 소문까지 생겼다.
덕분에 관리들이 빡빡하게 굴지 않은 건 물론이고, 도적들도 관이나 군이 움직이는 걸 경계해 복장표국의 표물은 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실력이 만만치 않은 산적과 수적들이 나타나 통행료도 거부하고 쌀과 소금을 앗아갔다.
온휴가 인맥을 총동원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표물을 약탈한 자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쌀과 소금의 행방조차 찾지 못했다. 관의 의뢰를 받아 운반하는 것이기에 양이 적지 않음에도, 그저 증발한 것처럼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복장표국은 뺏긴 소금과 식량을 사비를 털어 장만해서 다시 운반했다. 쌀과 소금을 급히 사느라 손해 본 것도 있고, 일을 무마하려고 뇌물을 뿌리느라 자금 면에서 타격이 컸다.
해가 바뀌어 다시 가을이 오려 하자 온휴는 고심 끝에 용호표국의 담 표국주에게 혼서를 보냈다. 표사 일이라는 게 그저 무공이 강하면 되는 게 아니고, 언제 칼을 뽑고 언제 돈을 뿌릴지 판단하는 눈치와 머리도 있어야 한다.
온휴는 무력이 강한 문파보다 같은 일을 하는 용호표국이 손발을 맞추기 쉽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진원표국의 방해로 처음엔 아주 적극적이던 담 표국주의 마음이 흔들렸고, 결국엔 아이들 마음에 맡기겠다는 온휴로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방법을 제안했다.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더 아쉬운 쪽인 온휴는 담 표국주의 제안에 동의하여 용호표국의 표행에 셋째 아들과 표국의 고수들을 파견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막내라고 곱게 큰 셋째 아들은 철이 덜 들어서 표국주 손녀의 환심을 사라는 온휴의 당부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셋째는 늘 떠받들리고 사랑받고 자란 탓에 누군가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게 익숙지 않았다.
아들의 실패로 온휴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관의 의뢰는 돈이 될 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크다. 관의 의뢰를 받는 표국은 관에선 물론이고 강호에서도 잘 건드리지 않는다.
필경, 국가 권력과 상대하는 건 소림이나 무당도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일이고, 그 강하다는 마교도 쫓기고 쫓겨서 천산까지 밀려났다.
그렇기에 거절하고 다른 표국에 넘기기엔 너무 아까웠다. 넘기는 순간 그간 복장표국에 씌워졌던 후광이 티끌도 안 남고 모두 사라져버린다.
허나 덥석 받자니 일 년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금전적인 손해가 너무 크다.
그때 온휴에게 접근한 게 배월교였다.
배월교는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이 속했던 종교로, 섬서의 일정 지역에서만 존재했다.
온휴도 달을 신으로 모시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있지만, 그저 지역 풍습 정도로 생각하여 가볍게 지나쳤는데, 직접 대면해보니 교주와 좌우호법은 제치고 친위대만 해도 전부 일류 이상의 고수였다.
온휴는 당시 배월교의 저의를 의심했으나, 십일월이 코앞이라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고 상대의 조건도 너무 좋았다.
배월교는 표물의 가치만큼의 전표를 복장표국에 미리 맡겨둔다. 실패하면 계약 내용에 따라 전표는 전부 복장표국의 것이 된다. 대신 표행이 성공한 후 전표를 돌려받는 건 물론이고, 의뢰금의 절반을 배월교가 갖는다.
여러모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온휴는 섬서에서 표국을 열기엔 진원표국의 방해가 심하고, 여제자가 많아서 표국을 열어도 손님들이 찾지 않을 거기에 복장표국과 협력하려 했다는 상대의 말에 수긍하여 연합을 결정했다.
덕분에 그해 가을의 표행은 물론이고, 작년 가을의 표행도 배월교 고수들 덕분에 도적 떼를 수월히 물리쳤다.
온휴로선 더는 바랄 게 없어 이대로만 쭉 가기를 원했지만, 왠지 하늘이 온휴한테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불과 한 달여 전에 미지의 세력이 배월교를 공격했다.
결과 우호법이 크게 다쳤고 거동이 불편한 제자도 스무 명 넘게 생겼다.
이대로는 관의 의뢰에 또 차질이 빚어질 게 분명해 온휴가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을 때, 배월교 교주가 중요한 정보를 들고 찾아왔다.
표물 습격의 배후가 철혈방이다.
그제야 온휴는 예전에 철혈방의 협력 요청을 거절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쌀과 소금 운반은 두 개 큰 흐름이 있다. 하나는 순천부를 비롯해 큰 도시로 가는 흐름이고 하나는 산간지역으로 가는 흐름이다.
도시로 가는 건 당연히 군에서 책임지고, 온휴가 의뢰를 받은 건 사천이나 귀주나 광서 등 궁벽한 지역으로 가는 표행이다. 하나같이 군을 움직이기엔 너무 멀고, 명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 군대를 보면 자칫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곳들이다.
당시 철혈방은 복장표국이 표물을 양양까지만 보내고, 그다음은 철혈방에서 전적으로 책임지는 거로 의뢰금의 절반을 달라고 했다.
사실 복장표국 입장에선 양양까지만 보내고 절반을 먹는 게 엄청난 이득이긴 했지만, 철혈방이 표물 분실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자고 해서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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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와 증인을 대령하라."
온휴가 내공을 잔뜩 실어 외쳤다.
복장표국의 표두들이 배월교 무리에 있던 세 명의 사내를 무릎 꿇리고 얼굴을 가린 면사를 치웠다.
"저자들이 철혈방 소속이오?"
장선의 말이 연무장에 울렸다. 온휴나 처음 등장할 때 외쳤던 배월교의 여인과는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로 소리가 흐트러짐 없었다.
정작 싸우면 어떨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내공 경지만큼은 장선이 훨씬 높았다.
"호북 녹림 연맹 소속입니다."
온휴가 전음술에서 밀리자 배월교주가 나섰다. 단단하게 울리는 장선의 목소리와 달리 배월교주의 목소리는 귓가에서 속삭이듯 스며들었다.
"호북 녹림 연맹이 철혈방 소속이오?"
장선의 질문에 배월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 소속은 아니지만, 철혈방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 거니 철혈방 소속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장선은 잠깐 고민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자들의 말을 들어보고 싶소."
배월교주가 찻잔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꺼낸 후 부드럽게 튕겼다. 거리가 먼 사람 눈엔 안 보일 정도로 작은 물방울 세 개가 무릎 꿇은 사내들을 향해 날아갔다.
세 물방울은 각각 견정혈과 풍문혈과 신유혈에 적중했고, 물방울이 닿자마자 세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탄주해혈彈珠解穴!"
그 모습에 어느 정도 견식이 있는 자들이 입 모아 감탄했다.
손가락으로 튕긴 찻물에 내공을 실어 하나도 아니고 무려 세 명의 혈도를 푸는 건 철추당 당주인 장선도 닿지 못한 경지다.
당연히 서쪽 진영에 속한 자들의 사기가 부쩍 올랐고, 동쪽 진영의 자들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배월교라. 한번 알아봐야겠다.'
장선이 예상치 못한 강적의 출현을 우려하는 사이, 혈도가 풀린 세 사내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소인은 흑호채의 채주 단청이요. 삼 년 전부터 철혈방의 지시로 복장표국의 표물을 습격했고, 한 달 전에 열일곱 산채山寨와 함께 배월교를 습격했소."
"소인은 쌍웅채의 이채주 호능입니다. 표물 습격은 모르는 일이고, 한 달쯤 전에 철혈방의 의뢰를 받고 배월교를 습격했습니다."
"혈교룡血蛟龍이다. 철혈방의 돈을 받고 배월교와 싸웠다."
단청이나 호능은 강호에 유명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혈교룡이라는 말에 양측 모두 꽤 놀란 표정이었다.
구후영이나 청빈으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자는 아닌 듯했다.
"혈교룡의 말이면 믿을 만하겠군."
장선이 말했다.
"자. 그럼 당신에게 돈을 준 자가 철혈방의 누구요?"
"직접 받은 건 아니다. 죽은 쌍웅채의 대채주가 말을 전했다."
혈교룡의 대답에 장선이 코웃음 쳤다.
"나도 복장표국 사람한테서 복장표국의 표물을 털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 있소.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명백한 조소에 온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았다. 무공이야 온휴가 열이어도 장선을 못 당하지만, 소주 근처에선 온휴라는 이름이 꽤 큰 힘이 있다.
아무리 양양에선 객이라고 해도 저리 비웃는 건 너무한 처사다.
"남은 둘에겐 안 묻습니까?"
배월교주의 말에 장선이 고개를 저었다.
"혈교룡의 말이면 몰라도 저 두 소인배의 말을 어떻게 믿겠소."
"그래도 들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꾸며낸 거라면 그게 거짓임을 까밝히는 것만으로도 철혈방에 유리하게 진행될 텐데요."
배월교주의 자신만만함에 장선은 우려가 생겼다.
'내가 모르게 누군가가 일을 벌인 건가? 금검당이나 은도당이 관여한 걸까? 협상 장소가 하필 제자의 장원이어서 내가 나서긴 했는데, 괜한 짓을 한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요. 일단 들어보겠소."
온휴가 눈짓하자 표두가 호능이란 자를 잡아 일으켰다.
"대채주한테 들었는데, 철추당의 추 대주라는 분의 사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철추당의 거론에 장선은 내심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았다.
"죽은 대채주한테서?"
장선이 코웃음을 치자 호능이 한껏 쭈그러들었다.
"소인도 추 대주의 사주를 받았소."
복장표국의 표두가 윽박지르자 단청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직접 만나서?"
"삼 년 전에 복장표국의 표물을 탈취할 때 무 대주라는 사람과 함께 왔었소. 재작년엔 혼자 왔고, 작년엔 천 대주와 후 대주라는 사람과 함께 왔는데, 천 대주라는 자가 오른쪽 어깨에 암기를 맞았소."
"한 달 전엔?"
"없었소."
장선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추경이 가을마다 집안 핑계로 사라진 적 있고, 남은 아이들 행적도 일치한다. 이게 저들이 꾸민 음모라면 상관이 없는데, 아이들이 어떻게든 연관이 됐다면 큰일이다.'
홍건군이 사방에서 봉기할 때 철혈방은 송나라 황실 후손을 자처하는 소명왕을 지지했다. 철혈방의 뿌리가 송과 떼려야 뗄 수 없기에 마땅한 선택이었다. 당연히 소명왕을 죽인 혐의를 받은 주원장과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사이였다.
다행히 주원장이 황제가 되고도 철혈방 자체의 무력과 호북 지역에 끼치는 거대한 영향력 덕분에 무사했지만, 황실이 무당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바람에 위세가 옛날 같지 않다.
'일단 흐지부지 끝내자. 방주가 직접 나설 사안이다.'
일반 표물도 아니고 관의 표물을 약탈한 일에 철혈방이 연루되었다면 군대가 움직일 일이다.
거기에 무당과 무당 편을 드는 강호 문파들도 철혈방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게 뻔하다.
"증거로 추 대주의 친필 서신을 제출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상대는 단김에 쇠뿔을 뽑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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