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룡고뇌子龍苦惱
무당의 무공은 이유극강의 무리를 기초로 한다.
이유극강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는 뜻인데,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이기려면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상대가 밀면 그 힘을 이용해 당기고, 상대가 당기면 그 힘을 이용해 미는 게 이유극강의 중요한 무리武理 중 하나다.
"사제는 무당으로 오지 않을 거요. 그러니 장로들이 찾아가야 하오."
옥무영의 말에 무당 장로들이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폐하를 치료하는 작은 공을 세웠다고 기고만장한 건가?"
구후영은 성품이 겸손하면서도 성정이 더없이 단단하여 대부분 무당 장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호감을 품었었는데, 태극혜검의 해독을 돕겠다던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에 다들 이마를 찌푸렸다.
"황제가 병세의 재발을 걱정해 곁에 두려 했으나 사제가 사도에 관심이 없다며 고사했소. 황제도 그 단단한 고집을 꺾지 못해 출궁은 허락했으나, 당분간 태원부에 기거하기로 절충했소."
옥무영의 말에 장로들의 언짢았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젊은 나이에 벌써 공명을 꿰뚫어 보다니.'
"장로들도 내 사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거요. 사제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마음도 달라지는 그런 가벼운 자가 아니오."
옥무영의 말에 적지 않은 장로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사제의 고매한 성품을 이용하면 세상 사람이 비웃을 것이오."
"장문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장로 한 명이 질문했다.
"황제가 철혈방에 대유방이란 이름을 하사했소. 철혈방이 우리한테 고개를 숙인 게 다 조정이 언제 자신들을 칠지 몰라 겁이 나서 그랬던 건데, 이젠 그 우려가 사라졌소. 게다가."
옥무영은 목청을 살짝 높여 끼어들려는 장로를 제지했다.
"사제는 황제의 스승으로 대장로를 추천했소. 소림의 공유 스님도 있고 오대산의 활불 감산대사도 있는데, 사제 덕분에 무당이 그 자리를 차지했소."
현영자와 마찬가지로 소림을 넘는 게 평생소원인 장로들이 옥무영의 말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당은 어떻소? 최소 은자 이만 냥을 하는 진나라 시대의 보검을 해검지에서 잊어버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못 찾아주고 있소. 그러면서 무당에 크나큰 은혜를 입힌 사제가 무당으로 오지 않는다고 나무람하고 있잖소."
현영자가 그간 대부분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한 바람에 나태함에 푹 젖은 장로들은 일시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태극혜검의 비밀이 있소."
옥무영의 말에 장로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장로들은 태극혜검을 읽으면 기분이 어떻소?"
"무슨 말이오?"
"난 솔직히 오다가다 몇 구절밖에 듣지 못했소. 그런데 들으니까 기분이 정말 더러웠소."
"그게 무슨 불경한 소리요!"
예전부터 옥무영을 자주 꾸짖던 장로가 호통쳤다.
"내 말이 형편없었으면 비웃고 말았을 거요. 장로가 이리도 화난 건, 내가 옳기 때문이오."
옥무영의 말에 기세등등해 호통치던 장로도 말문이 막혔다.
"태극혜검은 비급이 아니오. 이건 한 편의 반성문이오."
"뭘 반성한단 말이오?"
"삼풍 조사의 귀한 가르침을 그간 귓등으로 흘리며 지엽만 붙잡고 매달렸던 무당의 행태를 반성하는 글이오."
옥무영의 말에 장로들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태극혜검의 서술이 일관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오. 현현 사숙께선 무당에 부족한 부분만 강조해서 적었소. 잘하고 있는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구절과 구절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뚝뚝 끊긴 거요."
"장문은 뭘 말하고 싶은 거요?"
"현현 사숙은 내 사제와 내공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 깨달음을 얻으셨고, 개중 무당에 부족한 부분만 지적하여 태극혜검에 적었소. 그렇다면."
옥무영이 눈에 힘주어 장로들을 둘러봤다.
"현현 사숙이 당연하게 여겨 안 적은 부분을 채울 사람이 누구겠소? 사제가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던 여러분이겠소? 아니면 현현 사숙과 내공 대결을 벌이며 똑같은 걸 깨달은 내 사제겠소?"
"장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오."
옥무영과 같은 배분인데 나이가 많아서 장로가 된 자들이 나섰다.
"구후 장주는 철혈방의 생존을 위해 그간 무당이 보검을 분실한 잘못도 추궁하지 않았고, 우리가 더 강해질 것을 알면서도 태극혜검의 해독을 성심성의껏 도왔소."
막내 장로가 당당한 얼굴로 자기 의견을 토로했다.
"아까 장문이 말했다시피, 형세가 달라졌다고 구후 장주가 얼굴을 바꿀 것 같진 않소. 그러나 우리도 똑같이 행동하면 세상 사람이 비웃을지도 모르오. 더구나 태극혜검을 완성할 조각들이 구후 장주의 손에 있을 가능성이 크니, 우리가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하는 게 구색이 맞는다고 생각하오."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대표로 몇 명 뽑아서 태원부로 가는 게 좋겠소."
옥무영이 반대할 틈도 안 주고 말했다.
"몇 명만 간다고? 그럼 남은 사람은 뭘 하라는 거요?"
예상대로 반발이 거셌다.
"당연히 제자를 가르치고 문파의 대소사를 처리해야지 않겠소?"
"내 막내 제자가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뭘 더 가르친단 말이오. 문파의 일도 젊은 사람들이 수고해야 하는 거 아니오?"
"제자의 제자가 있잖소."
"사부가 제자만 가르치면 그만이지."
"장로들이 다 태원부로 가면 무당은 어쩌란 말이오?"
"맡은 일을 제자한테 인계하면 되잖소."
일이 원하는 대로 흐르자 옥무영은 속으로 박장대소했다.
그때, 장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핑계로 찾아간단 말이오?"
"그냥 태극혜검의 해독을 마저 도와달라면 되지, 왜 핑계가 필요하오?"
"에이. 그래도 체면이 있지."
"맞소. 무당 장로들이 우르르 몰려가 약관의 청년한테 가르침을 청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흠흠."
옥무영이 헛기침으로 장로들의 주의를 모았다.
"구 월 이십사 일이 사제의 생일이오. 축하 선물을 들고 찾아가면 마음씨 착한 사제가 설마 장로들을 문전박대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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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하에서 배를 구해 타고 태원부에 도착한 장인호는 장원에 가서 담진웅에게 보고 들은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내가 그래서 일부러 안 갔는데."
구후영을 의원으로 추천한 일을 추궁할 것 같아서 일부러 담청산만 보내 모르쇠를 놓게 했는데, 상대는 담진웅의 예상보다 훨씬 고명한 수를 냈다.
"형님께서 어찌 대처할지 서신으로 써달라고 했습니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넌 천천히 오거라."
일지봉에 가서 어떻게든 수습하기로 작심한 담진웅은 마구간으로 가 말 한 필을 골라 다급히 출발했다.
'뭐지? 추석도 중양절도 지났는데.'
시내에선 말을 달릴 수 없어 고삐를 끌고 가장 가까운 성문으로 가던 담진웅은 수십 명의 도사가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의문이 생겼는데, 패검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저건 어린검魚鱗劍?'
어린검은 무당 장로의 상징으로, 검날이 짧고 단단한 게 특징이다.
'설마.'
담진웅이 불길한 생각으로 불안해하던 그때.
"길 좀 묻겠네. 이쪽이 낙화문으로 가는 방향이 맞는가?"
마침 도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행인한테 길을 물었다.
'젠장.'
담진웅은 말고삐를 꽉 잡고 가만히 서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발길을 돌려 장원으로 돌아갔다.
'청산이가 잘 대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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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배를 타고 일지봉 근처에서 내린 장인호한테 자룡이 혈총의 고삐를 끌고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그래. 넌?"
연회 도중에 몰래 빠져나온 게 잘못은 아니지만, 장인호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나도 잘 지내지."
자룡의 담담한 태도에 장인호도 어느새 마음이 편해졌다.
"기분이 어때?"
"무슨 기분?"
"가족도 찾고 대단한 무공도 배웠다면서?"
"가족을 찾아서 좋긴 한데, 무슨 기분인지 잘 모르겠어. 형이라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난 머리가 둔하잖아."
"무공은?"
그에 자룡이 탄식했다.
"대단한 무공이라고 해서 익히긴 했는데, 솔직히 별로야."
"뭐가 별로라는 거야?"
"육양권법이라고 천마가 만든 무공인데, 아무리 익혀도 어디가 강한지 모르겠어."
장인호는 잠깐 느꼈던 자룡에 대한 친근감이 싹 사라졌다.
'무려 천마의 무공을 익히고도 만족을 모르다니. 괘씸한 놈.'
"요새 태극권을 배우긴 하는데, 이것도 모르겠어. 무공이라기보단 춤 같기도 하고."
'장삼풍의 무공도 눈에 안 찬다고? 분수를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좀 더 해보고 아니면 그냥 여의권이나 익히려고."
장인호는 잇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냥 여의권이나? 태극권 이전에 천하제일 권법으로 불리던 무공인데.'
"넌 어때? 가족이 생기고 새 무공을 배웠잖아."
아내를 만난 건 인생 최대의 행운이고, 용행호보권을 익힌 걸 떠올리면 가끔 꿈에서도 폭소한다.
"뭐, 너랑 비슷해."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해 장인호는 최대한 덤덤한 척했다.
"담청산은 어때?"
"뭐가?"
편한 마음으로 대화하던 장인호는 자룡이 갑자기 담청산을 탐문하자 목덜미의 털까지 바짝 세웠다.
"일 열심히 해?"
"응.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서 무공 수련을 하고, 밤늦게까지 표국이랑 표국 연합의 일을 처리하지."
상대가 무슨 의도로 질문했는지 모르기에 장인호는 일단 칭찬했다.
"넌 좋겠다."
"무슨 말이야?"
"형은 일하는 거 싫어해."
"누구? 유저가?"
장인호가 아는 구후영은 게으름과 거리가 멀었다.
"응. 맨날 뒷짐 지고 가만히 서서 하늘을 보며 깨달음을 찾아."
장인호는 부러운 마음이 세게 들었다.
"근데 그게 왜?"
자룡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장인호와 눈을 마주쳤다.
"홍엽산장을 나한테 떠넘기려는 생각인 거 같아."
장인호는 자룡의 입을 후려치려는 주먹을 겨우 멈췄다.
"그럼 네가 홍엽산장 장주가 되는 거잖아. 좋은 거 아니야?"
"난 셈도 제대로 못 하는데. 방이 백 개가 넘는 장원을 어떻게 관리해? 상상만 해도 막 싫어."
으득.
갑자기 울린 소리에 깜짝 놀란 장인호가 턱관절에서 힘을 뺐다.
"총관한테 맡기면 되는 거 아니야?"
장인호는 최대한 부러운 티를 안 내고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일은 총관들이 하는데, 장주도 다 알아야 한대. 형이랑 같이 총관들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데,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복에 겨운 새끼.'
장인호는 자룡한테 예전부터 별 감정이 없었다. 방금은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걸어줘서 호감도 잠깐 생겼었다.
물론, 지금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놈임을 명확히 인지했다.
"너도 내가 눈치 되게 빠른 거 알지?"
'네가 눈치란 게 있어?'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장인호의 입은 다르게 말했다.
"그럼."
"형이 어쩌면 철혈방 방주 자리를 나한테 떠맡길지도 몰라."
장인호는 심호흡으로 솟구치는 울화를 가라앉히며 화제를 바꿨다.
"유저가 신창이랑 신검하고 친하다며. 너도 봤어?"
"아니. 그때 난 다른 데 있었어."
만일에 대비해 신창 때는 흑호채에 있었고, 신검 때는 단아가 양양에 마련한 장원에 숨어 지냈다.
그 탓에 신창도 신검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신검을 봤으니 이건 내가 이긴 거다.'
장인호가 속으로 작은 승리를 홀로 자축했다.
- 작가의말
2부 완결.
놀랍게도 2부는 장인호의 승리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마 장인호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3부 연재는 예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비축분을 수습한 후에 재개하겠습니다. 언제라고 확실히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꼭 여러분의 성원에 어울리는 전개와 마무리로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작가의말 안 보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니 공지를 따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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