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위진以退爲進
옥녀봉은 바위산이다.
나무와 풀이 아예 안 자란 건 아닌데, 별로 무성하지도 않다. 게다가 지금은 만물이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봄이다.
덕분에 옥녀봉 꼭대기의 화산 건물을 휩쓸던 화마가 흥미를 잃고 떠났다.
"아직도 망설이는 거요?"
옥녀봉 밑에 도착하고도 용전향의 망설임은 끝나지 않았다.
'흑철은 무슨 속셈일까?'
구후영이 보인 실력과 옥무영의 협박으로 용전향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전까진 어떻게든 기종과의 약속을 지켜 목적을 달성하려는 생각뿐이었는데, 슬슬 실패가 걱정되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보통 무리를 통솔하는 자가 흔들리면 좋은 일이 아닌데,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하나만 보고 달리던 우두머리가 더 넓은 시야를 얻은 것이니까.
'강석을 공격한 건 왜고, 강석과 대등하게 싸우던 청년은 왜 또 공격했을까?'
용전향은 흑철에게 화산의 무리가 절벽을 통해 도주하는 걸 막고, 혹시 모를 지원도 막아달라고 의뢰했다.
천 명이 넘은 고수를 끌고 오면서도 굳이 흑철에게 의뢰한 건,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화산이 아닌 마교의 변수를.
'흑 장로 곁에 뭉쳐서 배산을 지지하던 자들이 흑철에게 붙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지.'
이번 계획은 여러모로 어려웠다.
우선, 마교를 떠날 때 혼자 혹은 몇 명씩 몰래 움직여야 했다. 마교가 대규모로 움직이면 조정과 중원 무림 모두 경계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소림이 무림대회를 소집하며 강호의 이목을 끈 덕분에 이 부분은 잘 해결됐으나, 몰래 움직이느라 욕심만큼 일찍 도착하진 못했다.
다음, 종남이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서신으로 얘기가 잘 오가서 정식으로 연맹하려고 자격이 되는 사람을 보냈는데, 둘이 죽고 한 명은 얼굴에 검상을 단 채 돌아왔다.
그에 용전향은 장성 근처에서 관문을 탈취하려고 대기하던 다른 자들을 전부 소환했다.
종남이 예상했던 것보다 마교가 이틀 정도 늦게 움직인 이유다.
이러한 외부적인 어려움을 빼고도 내부 문제 역시 많았다.
흑철을 고용한 것도 각 세력의 중핵들이 떠난 상황에 이상한 짓을 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용전향으로선 자기 능력 범위에서 할 만한 건 다 한 상황이다.
그런데 내부가 분열되었다던 종남이 장문의 인솔하에 육십이 넘은 고수를 차출해 화산을 도왔고, 생각지도 않은 구후영과 신검의 제자가 나타나서 마교의 일을 방해했다.
거기에 흑철이 강석을 공격하면서 용전향의 손발을 어느 정도 묶어버렸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하는데.'
용전향은 원래 결단력이 있는 자가 아니다.
마교에서 세력이 가장 크고 인망이 제일 높은 백련교임에도 교주 자리에 대한 야망을 꼭꼭 숨겼고, 모든 일을 다른 세력의 동의를 얻고 심지어 도움까지 받으며 진행했다.
이번에 세운 계획 역시 일방적인 바람이 매우 많았다.
의뢰받은 흑철이 시킨 대로 고분고분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 종남이 그럴듯한 제안에 홀라당 넘어가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리라는 희망. 자신과 북원이 제시한 조건에 화산 기종이 아무런 걱정과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협력하리란 기대.
용전향은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는 꼼꼼한 계획이 아니라, 모든 상황이 최선에 가깝게 흘러야 성공할 수 있는 허술한 계획을 세웠다.
그 탓에 어긋남이 연속되자 쉬이 결정을 못 내리고 갈팡질팡했다.
문제는, 용전향의 생각처럼 마교에 진짜 인물이 없었다. 천마는 각 세력의 불만을 실력으로 잠재웠으나 배산은 아니었고, 오히려 천마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본인한테 쏟아지자 감당하기 힘든 내색을 했다.
흑철이 무공도 강하고 교도들의 평판도 좋으나 세력이 거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자라 마교를 맡기기에 부적합하다.
흑 장로는 나이가 우선 걸림돌이고, 그게 아니어도 사람이 단순해서 수십만 교도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많다.
'차라리 저자가 천마의 제자라고 인정하면.'
백련교 자체의 조사에서 구후영이 천마의 제자일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됐고 구후영도 거듭 부인했으나,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용전향은 차라리 구후영이 거짓말로라도 천마의 제자라고 시인하고 마교로 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들 힘들 텐데, 저기 강가로 가서 목을 축이는 게 어떻소?"
가뜩이나 심란한 용전향의 마음에 구후영이 돌을 던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로 인한 파문을 애써 무시하며 용전향이 맞장구를 쳤다. 그에 마교 무리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다들 옥녀봉 밑으로 내려오기만 하면 무조건 싸운다고 생각하며 기세를 키우던 터였기에 상실감이 아주 컸다.
"난 마교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소."
강이 있는 쪽으로 걸으며 구후영이 말했다.
"내가 마교로 간 건 동생을 찾기 위함이오. 동생이 납치되었는데 혈포규찰대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어 찾아갔소."
구후영의 이야기에 마교의 무리들이 귀를 기울였다.
"혈포규찰대에서 동생을 찾았는데 대주라는 자가 놓아주질 않았소. 그때 누군지 모를 자가 배산에게 사정을 얘기하면 된다고 했소. 그래서 그날 백옥봉에 가게 된 거요. 그저 찾아가면 장원의 문턱도 넘지 못할 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상석까지 오게 된 거요?"
신창이 천마와 친분이 있는 건 용전향도 안다. 그러나 배산과 신창은 친분이 없다. 그날 신창은 역용술로 얼굴은 물론 체형까지 바꿨기에 총관이 알아보고 상석까지 모시는 건 말이 안 된다.
"배산의 부인 청월과 일면식이 있었소."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고 한마디 보탰다.
"나랑 혼삿말이 오가는 소저가 청월의 동생이기도 하고."
용전향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
'현월궁하고도 연계가 있구나.'
현월궁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으나, 실력이나 영향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그날 현현 진인과 내공 대결을 벌이며 일류이던 내가 절정이 되었소. 게다가 천산에서 대단한 무공을 얻어 실력이 일취월장했소."
마교 무인들은 구후영의 말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좌우호법만 해도 천산의 암벽에서 발견한 무공을 익혀 대단한 고수가 되었으니까.
모르는 글자가 많아 해석이 어려운 탓에 발견해도 소용없어서 그렇지, 천산에서 무공을 발견하는 건 희귀한 일이 아니다.
"마교는 내게 절정을 밟게 하고, 오늘의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단단한 발판을 마련해준 고마운 은인이오. 게다가 혈포규찰대도 지금 나랑 함께 있소."
구후영이 말한 혈포규찰대가 마교에서 생각하는 그 혈포규찰대가 아니지만, 놀라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특히 원경과 어깨동무를 하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강석 덕분에 마교 무인들의 오해는 한결 깊어졌다.
말하는 사이, 일행은 강가에 도착했다.
길진 않으나 치열했던 전투로 지친 자들이 강물로 목을 축여 피로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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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 장문 막불위요."
때를 기다리던 막불위가 나서며 어수선해진 분위기가 수습됐다.
"명교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겠는데, 간절히 원한다고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오."
"그건 당신 생각이고."
오구진이 쏘아붙였다.
"자. 그대들이 손잡으려 했던 막불손도 몰랐던 정보를 내가 어찌 알았을까?"
홧김에 나섰던 오구진이 눈치를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대들은 검종을 지운 다음 기종의 도움을 받아 관문을 열려고 했소. 내 말이 맞소?"
아무도 막불위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내게 이걸 알려준 건 화산 기종이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엔 아무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발을 구르고 이를 가는 마교 무인들을 바라보며 막불위는 부러움을 느꼈다.
'이들은 서로 믿음이 깊구나.'
막불위라면 중요한 계획을 혼자 알고 필요한 때에 따라 조금씩 알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마교는 천 명이 넘은 자 모두가 자신들이 뭘 하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
"마교가 관문을 열면 북원 기병이 올 것이고, 북원 기병이 오면 우리 종남이 보유한 객잔을 비롯한 재산들만 약탈할 거라고 기종이 알려줬소."
화산 역시 섬서 곳곳에 자산이 있다. 그러나 창문에 매화를 수 놓은 하얀 천을 걸면 북원 기병들이 약탈하지 않기로 미리 약속됐다.
"기종 입장에선 우리가 검종을 도우며 같이 망하길 바란 거겠지. 어차피 북원 기병이 들어오면 재산을 모두 잃어 더는 문파를 유지할 수 없으니, 이건 외통수요. 기종의 마음이 얼마나 시커먼지 알아도 종남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소."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오."
용전향이 평이한 말투로 대꾸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달 전에 갑자기 동창 환관들 주머니에 은자를 찔러주는 돈독한 사이가 됐단 말이오."
막불위가 미소를 지었다.
"녕하에서 이십만 보병, 산서에서 육만 기병이 움직였소. 장성 밖에 모이는 북원의 무리를 요격하러."
보통 기병과 보병이 싸우면 대부분 기병의 승리를 점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명의 군대는 튼튼한 갑주로 몸을 감싸고 투구로 머리를 보호하는 반면, 북원의 기병은 기껏해야 가죽옷으로 몸을 보호한다.
기마병의 돌격은 바닥에 박는 철제 방패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고, 강철 촉을 장착한 명나라 군대의 화살은 돌진하는 기마병에게 저승사자의 손짓과 다름없다.
일단 관문을 들어오면 기마병의 기동력으로 여기저기 들쑤시며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장성 밖에선 오히려 북원 기병이 불리하다.
거기에 비록 육만의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지만, 명나라 철갑기병도 대단한 전력이다. 명의 전투마가 북원의 말보다 체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단거리의 주력은 훨씬 뛰어나고, 더구나 전술 훈련까지 받아서 오합지졸인 북원 군대를 압살할 수 있다.
즉, 마교가 관문을 열지 못하면 북원의 군대는 명나라의 요격에 지리멸렬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크다.
"다들 눈치챘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말하는 게 좋겠지."
막불위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종은 마교를 이용해 검종을 지우려 했고, 종남을 끌어들여 마교의 손실을 키우려 했소. 겸사겸사 종남이란 눈엣가시도 치우고."
용전향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어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북원의 침투를 미리 알려 큰 공을 세우고, 마교에 맞서 장렬히 희생한 화산의 유일한 주인이 될 거고, 조정이 늘 거슬려 했던 종남이란 아픈 이도 뽑고."
"그만하시오."
용전향이 조금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제안 하나 할까 하오."
막불위는 화산 검종의 장로한테 다가가 서악화산 네 글자가 적힌 편액을 건네받았다.
"사실 명교는 오늘 화산을 전멸했고."
말을 멈춘 막불위가 화산의 정문에 걸려있던 편액을 용전향 쪽으로 휙 던졌다.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파하고 십팔동인진을 통과한 환속승 원경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혔으며."
막불위의 말에 원경이 실없이 웃었다.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여 비기고, 원철의 여래신장을 이기고, 백팔나한진을 깨고, 천마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구후영을 이겼으며."
구후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동의함을 표시했다.
"종남파 장문의 목숨까지 거뒀다고."
말을 마친 막불위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소매에서 꺼낸 비수를 자기 가슴에 콱 박았다.
- 작가의말
이퇴위진 - 물러섬으로써 오히려 나아가다.
약소국의 비애죠. 큰 전쟁에서 질 게 뻔하기에 작은 전투에서 이겨도 그 성과를 오롯이 누리지 못하죠.
그런 면에서 고구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버티기 힘들면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시간을 벌면서도 상대의 선 넘은 요구는 차일피일 미루면서 절대 안 들어줬죠.
수나라가 진심으로 공격할 때 또 확실한 한 방을 먹여 매서움을 보여줬고요. 그렇다고 무작정 싸우는 게 아니라 ‘이쯤 하면 이긴 거나 다름없으니 물러가는 게 어떻소.’ 하면서 상대 체면도 챙겨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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