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룡출세劍龍出世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이 있다. 범의 등에 탄 사람은 무조건 버텨야만 한다. 범의 이빨과 발톱이 안 닿는 등에서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떨어지는 순간 범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현재 구후영과 낙화문이 바로 그랬다.
공형선과 연무쌍의 등장으로 낙화문은 범의 등에 탔다. 용호표국이 철혈방과 연무쌍을 걱정해 낙화문을 어떻게 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원만해진 건 아니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용호표국이 중심이 되어 산서 무림 연합이 구성될 게 분명하다. 낙화문은 아무래도 배제될 것 같고, 그게 아니어도 좋은 대접을 받기 그르다.
낙화문 입장에선 차라리 공형선과 연무쌍이 없고 계속 무시당하는 게 나은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아까 논의를 마저 하는 게 어떻소."
어떻게든 타파해야 한다.
"혹시 산서 무림에서 조용히 해결할 일이 있다면 공 모가 자리를 피하겠소."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공형선이 약삭빠르게 발 빼려 했다.
"마침 잘됐소. 산서 무림의 평화를 위해 연합을 구성할 논의를 하던 차인데, 철혈방의 경험을 좀 빌리고 싶소."
구후영이 그런 공형선을 압박했다. 구후영에게 잘못한 게 있어 공형선도 무작정 뿌리치지 못했다.
"철혈방이 돌아가는 꼴이 어떤지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니 우리처럼 하라고 하진 못하겠소. 연합을 이루려면 강한 지도자 한 명이 있거나 실력과 명분 모두 갖춘 삼강 체제를 갖춰야 하오. 거기에 모두에게 이득이 돼야 하오."
강호의 큰 문파를 보면 돈을 떠날 수 없다.
소림은 향화객들이 내는 향전이 어마어마하고 부처께 바친다며 전답을 보시하는 부자도 적지 않다. 종남은 원나라 때 많은 재화를 받았고, 무당과 화산은 명 황실의 지원을 받는다.
철혈방은 금검당과 은도당은 물론 철추당과 오단도 각자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있다. 여덟이 철혈방의 이름으로 표면적으로나마 하나가 되었기에 다툼이 줄었고, 덕분에 쓸데없는 지출과 소모를 줄여 재물이 쌓였다.
산서에선 용호표국을 위수로 하는 표국 연합 빼면 딱히 돈 많은 문파가 없다. 낙화문이 예외이긴 한데, 돈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그 위력이 드러나지 않았다.
공형선이 말한 실력에 무력과 재력이 다 포함되었다면, 왕가장은 명분이 있으나 실력이 없고, 용호표국은 명분과 실력 모두 있고, 낙화문은 실력과 명분 모두 부족하다.
삼강 체계는 물 건너갔다.
그렇기에 낙화문과 구후영은 일강의 자리를 노려야 한다.
"장조부, 비무를 제안하면 제가 저자의 기염을 누르겠습니다."
장인호가 담진웅에게 속삭였다.
"안목을 더 길러라. 일류의 경지다."
용형호보권을 익히며 자신감이 부쩍 늘었던 장인호는 구후영도 일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에 이를 꽉 악물었다.
'평생 저놈을 못 이기는 건가?'
구후영이 그저 일류의 경지에 이르렀으면 별걱정이 없었겠으나, 낙화문이 제자들한테 영약을 먹여 내공을 키운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속이 갑갑했다.
'영약 하나에 수백 냥씩 하는데, 언제 돈을 모아 내공을 키우지?'
"저는 어떻습니까?"
곁에서 듣던 담청산이 말했다. 담청산 역시 구후영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
용호표국을 이끌어야 하기에 괜한 트집을 걸어 구설을 만들 생각은 없지만, 정당한 대결로 상대의 기를 꺾을 수 있다면 굳이 마다할 생각도 없다.
"내공이 너보다 많다."
담진웅의 말에 담청산도 충격에 빠졌다. 강호에선 권장법을 익히는 자가 무기를 드는 자보다 내공이 깊은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검을 쓰는 자가 권법을 쓰는 자신보다 내공이 많다고 하니 덤비고 싶은 생각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담 표국주한테 묻겠소. 연합을 구성하려는 목적이 산서 무림의 안녕이오? 아니면 발전이오?"
구후영의 질문에 담진웅이 되물었다.
"안녕과 발전이지. 둘이 서로 모순되는가?"
"안녕을 추구하는 거면 나이가 있고 중후한 사람이 연합을 이끌어야 하고, 발전을 추구하면 그래도 젊은 사람이 이끄는 게 낫지 않나 해서 질문했소."
구후영이 연합을 이끌 야심을 드러내자 연무장에 자리한 자들의 머리가 눈알만큼 빠르게 굴러갔다.
용호표국에 붙으면 안정적이고, 신예인 낙화문에 붙으면 당연히 떨어지는 게 많을 테니 선뜻 누구를 선택하기 어려웠다.
'저놈이 난 안중에도 없구나.'
구후영의 말은 분명히 자신하고 담진웅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다. 해가 바뀌면 정식으로 용호표국의 표국주가 될 담청산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다.
'기호지세구나.'
담진웅이 속으로 한탄했다.
담진웅이 연합을 만들려는 덴 딴 속셈이 있었다. 믿지 못할 소문 몇 개를 들었고, 강호에 큰 파문이 일 거란 생각에 힘을 모아 크게 도약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쓸데없이 낙화문의 행사를 훼방하려다가 자충수에 빠지고 말았다.
이대로 낙화문을 배제하면 영도력이 의심받게 되고, 안고 가기엔 골이 너무 깊어졌다.
"그 말엔 동의하지 않네. 젊은 사람이라고 안녕을 추구하지 못하는 건 아니잖소."
말을 절반만 했지만, 숨긴 뜻을 못 알아차릴 머저리는 없었다.
담진웅의 단호한 말에 원체 복잡하던 산서 무림인들의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아무리 철혈방과 연무쌍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애송이한테 뺏길 순 없지.'
용호표국을 하북의 팽가 정도로 키울 절호의 계제고, 영약을 얻어 내공을 늘리는 거로 공격력이 부족한 용행호보권의 약점을 보완하여 강호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고수가 될 기회다.
나이가 환갑에 가까운 담진웅에게 이런 기회가 두 번 생길 일은 없으니 정말이지 구후영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나도 자신은 있지만, 나이가 어려서 아무래도 쉽게 믿음을 얻지 못할까 봐 걱정이오."
구후영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담진웅에 맞섰다. 그 모습에 젊은 자들은 호감을 느끼고 나이 든 자들은 반감을 품었다.
"나도 산서 무림을 아우를 자신은 있으나 각양각색의 사람을 어떻게 같은 마음으로 합칠지 고민이 크네. 구후 장문은 어떤 고견이 있으시오?"
둘은 겸양하는 척하면서 할 말을 다 했다.
구후영은 사부의 의견을 물을까 하다가 전음을 못 하는 것과 이젠 본인이 장문인이라는 자각 때문에 참았다.
"본문에 영약 제조법이 있소. 공짜로 드리는 건 힘드니 무공을 겨루는 자리를 마련하여 좋은 모습을 보인 분께 상으로 드리는 건 어떨지 싶소. 영약을 만드는 데 드는 돈은 십시일반 모으면 해결이 쉬울 듯하오."
도박처럼 여럿이 돈을 걸고 이긴 자가 다 따는 방식이다.
"용호표국은 전도유망한 아이들을 표행에 끼워 강호를 경험케 하고 실전 기회도 줄 수 있네."
"보시다시피 연무장이 꽤 크지 않소? 대련을 원하시면 얼마든지 연무장을 빌려드리고 상대가 돼 드릴 수 있소."
"고수는 용호표국에 훨씬 많소. 무공도 다양하고."
"연합에 왕가장을 껴야 한다고 하셨소? 왕 장주가 내 의형이오."
범도 제 말하면,
"왕가장 왕 장주 일행입니다."
온다.
"오. 손님이 많구나. 내가 늦은 건 아니겠지?"
"마침 잘 오셨습니다."
"동생, 내가 누굴 데려왔나 한 번 맞춰보게."
왕제상은 백 명이 넘은 사람 앞에서 마치 구후영과 단둘이 있는 듯이 편하게 대화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배짱만큼은 일국의 재상을 해도 남을 정도로 넉넉했다.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둘째가 왔어."
그때, 검은 인영이 연무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막내가 장문인이 된다고 해서 내가 선물을 갖고 왔다. 오대산에서 나는 신령한 돌이다."
원경이 등에 업은 커다란 돌을 연무장에 내려놨다. 크기로 봐선 못해도 오천 근은 할 것 같았다.
저 무거운 걸 오대산부터 메고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장문, 귀한 선물을 들고 온 손님은 누구신가?"
임초현이 질문했다.
"소림에서 오대산으로 유학을 오신 원경 스님입니다."
구후영의 말에 연무장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호가 원경이면 소림 방장이랑 같은 배분 아니오?"
공형선의 질문에 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장 사형을 아십니까?"
"아니오."
공형선이 모른다고 하자 원경은 곧장 흥미를 잃고 구후영에게 주의를 돌렸다.
"동생, 선물이 마음에 들어?"
"이형의 성의가 있는데 어찌 마음에 안 들겠습니까."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그런데 돌이 못생겨서 아쉽네. 부처님 말 틀린 게 없어. 욕심이 과하면 꼭 후회한다더니."
무작정 크고 무거운 놈으로 골랐는데 정작 선물이랍시고 내놓으니 못내 아쉬웠다.
"돌이야 깎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육백 리나 되는 길을 저 무거운 걸 메고 왔다고 생각하니 감격으로 벅찼다.
사실 수레로 끌고 배에 태워 근처까지 온 다음에야 직접 메고 온 거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건 마찬가지다.
"그래? 이거 꽤 단단한 건데."
"소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뽑은 뒤 원경이 들고 온 돌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필생의 대적을 상대하는 듯한 진지함에 구경꾼들도 숨소리를 죽이고 더없이 집중했다.
'낙화검법, 난화검법, 유일검법.'
사실 유일검법은 검법이라고 부르기 미안한 정도다. 천칠백 년 전에야 어떨지 몰라도 요즘엔 간단한 편인 삼재검법도 초식이 서른여섯 개나 된다.
그러나 천공교검을 쓰는 데 꼭 필요하여 구후영이 제일 공을 들였다.
'참결, 벽결, 자결, 요결, 도결.'
신검이 가르친 검의들도 떠올랐다.
'심검.'
구후영은 아직도 심검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자신이 백화궁 궁주를 상대로 펼쳤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들어서 알지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다.
'만균.'
생뚱맞게 마지막에 만균이 조각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구후영의 기세가 확장했다. 경지가 낮은 자들은 그저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느낌만 받았고, 구후영이 기세를 넓게 퍼뜨린 걸 아는 자는 담진웅과 원경 그리고 연무쌍과 공형선까지 넷뿐이었다.
돌 앞에 다가간 구후영은 눈을 감고 심상에 뜬 형상에 집중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연무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으로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약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 검을 멈춘 구후영이 눈을 천천히 떴다. 동시에 넓게 퍼졌던 기세가 사라졌다.
"하하. 강호에 신성이 나타났군."
공형선이 호탕하게 웃었다.
연무쌍은 기쁜 마음에 함박웃음을 지었고 임초현은 격동한 나머지 연신 눈물을 훔쳤다.
"검이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르겠고 어디서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의 휘두름 같기도 하고 그저 수만 번의 간단한 휘두름이 반복된 것 같기도 하고. 신룡은 구름에 숨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더니, 동생의 검술이 바로 그렇지 않나 싶구나."
원경이 감탄했다.
"산서 낙화문에서 검룡이 났어."
그때, 두전의 외침이 여느 때보다 크게 울렸다.
"신검 풍불지 대협이요!"
"젊은 친구!"
사람들이 놀라 분분히 일어날 때,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접근한 풍불지가 구후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무사히 깼다는 소문에 며칠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뻤네. 그래,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담진웅의 얼굴이 새까맣게 질렸다.
- 작가의말
실제로 산서 오대산에선 돌을 신령하게 모십니다. 이는 원나라 때부터 시작했는데, 티베트 밀교에서 전해진 풍습입니다.
66화로 1부 초출강호가 끝났습니다. 곧 2부 주유강호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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