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거유향人去留香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
그리고 가끔은 향기를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인거유향.
평소 행실이 좋은 사람은 죽어서도 선한 영향을 남긴다는 뜻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몰래 사라진 위종에겐 글자 그대로의 뜻이었다.
"아까 위종의 몸에 천리향을 뿌렸습니다. 물을 잔뜩 섞어서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향이죠."
누구보다 코가 예민한 구후영으로서도 긴가민가할 정도로 옅게 희석했다.
"그러나 이 향을 맡으면 천리향 냄새가 잘 찾아집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현월궁은 한때 청로옥서환을 만들 정도로 약에 조예가 깊었다. 청로옥서환이 강호에 대환단이란 이름으로 전설이 된 걸 생각하면 당시 현월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현월궁이기에 천리향을 희석하거나 천리향을 더 잘 느끼는 다른 향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간은 필요치 않아 안 만들었던 거지, 구후영이 요구하자 사흘도 안 되어 뚝딱해냈다.
"준비를 철저히 했구나."
어찌 보면 구후영이 길치인 게 다행이었다. 사실 처음엔 천리향을 자기 몸에 뿌리면 길을 잃었을 때 오던 그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희석한 것도 향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혹여 짐승한테 향이 옮겨 길을 헷갈릴까 봐서였다.
위종의 몸에 뿌린 건 흩어지기로 했을 때 임기응변으로 실행한 것이었다.
"문제는 위종이 갔던 곳만 알 수 있을 뿐 마지막에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구후영이 처음부터 향 얘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다. 향이 있던 곳은 위종이 머물렀다는 증명일 뿐이지 거기서 사라졌다는 단서는 되지 못한다.
지금은 아무도 위종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터라 궁여지책으로 천리향 얘기를 꺼냈다.
"그거면 된다."
구후영이 생각하기엔 궁여지책이지만, 앞이 깜깜하던 일행에겐 거대한 횃불이나 다름없었다. 별 기대가 없는 구후영과 달리 일행은 확실한 단서를 잡은 듯이 흥분했다.
"일단 계단에 가서 향이 있는지 살피자."
풍불지의 말에 구후영은 육 층과 오 층을 이어주는 계단에 가서 코를 킁킁거렸다.
"어떠냐?"
"계단엔 향이 없습니다."
위종이 육 층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행은 벽과 천장에서 칠 층으로 향하는 길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횃불을 갖다 대고 얼마 없는 물을 뿌리고 해도 전혀 문틈으로 보이는 흔적은 없었다.
그때.
"잠시만요."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귀연이 갑자기 외쳤다.
"우리 속았어요."
"그래. 위종인가 하는 놈팡이에 속았지."
풍불지가 탄식으로 대꾸했다.
"그거 말고. 이 궁전 말이에요."
귀연이 흥분한 얼굴로 콧김을 내뿜었다.
"이 궁전이 몇 층이죠?"
"칠 층이지."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귀연이 자문자답했다.
"밖에서 지붕 일곱 개를 봤으니깐요."
"그래서?"
"칠 층은 맞아요. 그런데 우리가 밖에서 봤던 것처럼 일 층 위에 이 층이고 이 층 위에 삼 층일까요?"
"무슨 뜻이야?"
귀연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청빈이 질문했다.
"오 층 다음이 꼭 육 층이란 법이 없잖아요."
귀연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왜?"
"밖에서 우린 궁전에 창문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그저 벽에 새긴 문양이었어요. 이 궁전엔 창문 따위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지붕이 과연 지붕일까요?"
귀연의 말에 구후영도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 밖에서 본 일 층의 지붕이 일 층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일 층과 이 층 사이에 숨겨진 층이 있을 수 있고, 이 층과 삼 층 사이에 숨겨진 층이 있을 수도 있고."
오 층과 육 층 사이에 칠 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위종은 미리 알고 있었단 건가?"
풍불지가 중얼거렸다.
"미리 알았으면 혼자 찾아왔겠죠. 아무래도 이곳에 와서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곳까지 혼자서 찾아올 자신이 없으니 우릴 이용한 거다?"
"잠깐. 그러면 연 선생이랑 둘이 같은 편이란 뜻이잖아."
일행이 여기까지 온 데는 연 선생의 '도움'이 컸다. 이는 둘이 협력했다는 뜻이다.
"연 선생이 위종의 장기 말일 가능성도 있죠."
한편으론 연 선생이 그저 위종이 시키는 대로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자자.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풍불지가 일행의 토론을 끊어버렸다.
"놈이 뭘 하려는 거든 무조건 빨리 찾아내서 제지해야 해. 절대 좋은 일이 아닐 테니까."
"횃불. 횃불로 찾아요. 틈이 생겼을 거예요."
공간과 이어진 틈은 아주 미세하거나 먼지 등으로 막혔을 때 횃불을 갖다 대는 방식이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불과 얼마 전에 사람이 드나들었으니 횃불을 근처에 댔을 때 빨려갈 가능성이 크다.
"바닥을 살펴주세요."
귀연의 말에 다들 횃불을 바닥에 대고 틈이 있는지 찾으려 애썼다.
"찾았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불은 위로 사른다.
그렇기에 바닥에 틈이 있을 경우 찾기가 무척이나 힘들지만, 다행히 일행 중엔 감각과 눈썰미가 뛰어난 고수가 여럿 있었다.
덕분에 아주 미세한 횃불의 쏠림을 놓치지 않고 육 층 바닥에 있는 비밀 문을 찾아냈다.
"이러니까 눈으로 못 찾지."
바닥에 새긴 있는 듯 없는 듯한 문양 탓에 눈으로 찾아내는 건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이걸 어떻게 열어야 하지?"
천근추를 써서 눌러도 보고, 흡력을 발생해 들어도 보고, 네 방향으로 밀어도 보고.
온갖 짓을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진법이에요."
한참 고민한 귀연이 말했다.
"밑에 진법이 있어요. 우린 위에서 밑의 진법을 자극해 문을 열어야 해요."
바닥 아래에 진법이 있는데, 바닥 위에서 진법을 발동해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여는 방법만 알아선 소용이 없고, 바닥 위에서 진법을 자극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여기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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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문을 여는 데 일각이 걸렸다.
"위종이란 놈이 실력을 숨겼다는 건데, 어떻게 했지?"
일행 중 바닥을 투과해 진법을 자극하는 능력을 갖춘 건 구후영과 풍불지뿐이었다.
악불형은 내공이 부족했고 옥무영은 운기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다는 건 위종이 악불형보다 내공이 깊고 옥무영보다 운기를 잘한다는 뜻인데, 그걸 어떻게 숨겼는지 일행 모두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해할 시간도 아까운 터라 곧 진입하기로 했다.
"몇 명이 남는 게 낫지 않을까요?"
원래는 함께 들어가기로 했으나 정작 비밀 문을 열자 구후영은 망설임이 생겼다.
"안에 또 뭐가 있을지 모르니 함께 들어가는 게 좋겠다."
귀연의 능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청빈만 밖에 둘 순 없다.
결국 일행은 함께 밑으로 가기로 했다.
"제 뒤를 따르세요."
구후영이 귀연을 업고 앞장섰다.
천리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 구후영뿐이고 진법과 기관을 찾아낼 사람이 귀연뿐이었기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던 것과 달리 향을 따라 걷는 내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무사히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예요."
오 층과 육 층 사이에 칠 층이 있는 게 아니라 일 층 아래의 지하까지 통하는 통로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궁의 외곽을 빙빙 돌며 조금씩 내려가는 기나긴 통로였다. 혹시 모를 진법과 기관을 조심하느라 일행은 무려 일각을 소모했다.
'이 궁전을 만든 사람은 참으로 심계가 대단하구나.'
밖에 창문과 지붕 그리고 온갖 문양을 그려 사람을 현혹한 것도 그렇고. 지하의 입구를 육 층에 만든 것도 그렇고.
귀연의 번뜩임이 아니었으면 일행은 지금도 벽이나 천장에서 '위'의 칠 층에 올라가는 통로를 찾으며 헤맸을 것이다.
"소리가 들린다."
냄새에 집중한 구후영과 달리 풍불지는 듣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앞선 구후영보다 먼저 소리를 찾아냈다.
그러나 조급하게 바로 뛰어갈 순 없었다.
"진법도 기관도 없어요."
귀연이 반복적으로 신중히 살핀 뒤에야 일행은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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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구조는 복잡했다.
휑하니 기둥뿐이던 위와 달리 집 혹은 건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수백 개 널려 있었다.
다행히 천리향의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어 일행은 길을 헤매지 않았다.
'건축 양식이 너무 제멋대로다.'
문외한이 봐도 각각의 건물은 완전히 다른 양식이었다.
'양식 사이에 연관성이 없어.'
시대에 따라 건축 양식에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그건 진화와 발전이지 격변은 아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건축물들은 서로 연관성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양식이 제각각이었다.
"여긴가?"
향이 끊긴 건 반원형인데 꼭대기에 굵직한 기둥이 뻗어 나온 특이한 양식의 건물 앞이었다.
"진법과 기관은 없어요."
귀연의 말에도 일행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고, 몸이 제일 단단한 원경이 혼자서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챙!
그리고 병장기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저기서 들었다고?'
구후영은 내공이 깊을 뿐만 아니라 오감도 인간의 한계치까지 발달했다. 그런데도 풍불지가 들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감탄과 호승심이 동시에 솟구쳤다.
"이 층이다."
안의 공간은 밖에서 확인한 것보다 훨씬 작았다. 이는 반원형의 속이 통째로 빈 게 아니라 반만 비었기 때문이었다.
반은 아래를 파서 일 층을 내고, 반은 위를 파서 이 층을 만들었다.
일행은 이 층으로 통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구멍을 향해 앞다투어 몸을 날렸다.
'수정벽?'
귀연을 데리고 가장 마지막에 이 층에 오른 구후영은 지하도시의 것과 똑같은 수정벽 그리고 수정벽 너머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내를 확인했다.
둘 중 한 명은 위종이었고, 남은 사내는 처음 보는 자였다.
더불어 수정벽 앞에 모여 이를 가는 악불형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거 깨지지 않아."
악불형은 일점공격술로 세상 어떤 것도 부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얄팍해 보이는 벽 하나를 못 부수자 화가 치밀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합시다."
이 수정벽이 지하도시와 같다면 여닫는 기관이 아마 안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생면부지의 사내를 설득해 문을 여는 게 유일한 방법이고, 그러려면 일단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한다.
그때.
"팽창회!"
홍기영이 갑자기 외쳤다.
"저놈이 팽창회야."
구후영은 귀연을 원경한테 맡기고 수정벽에 붙어 안을 자세히 살폈다.
안엔 위종과 큼직한 칼을 든 사내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사내 뒤엔 침상 두 개가 있었다.
하나의 침상엔 허연 수염을 곱게 빚은 관복을 입은 노인이 잠자듯 누워 있었고, 다른 침상엔 약관 정도로 보이는 절세미남이 있었다.
그 외에도 삼십 개가 넘은 침상이 더 있었는데, 일부는 사람이 누웠고 일부는 하얀 가루가 조금 있었다.
그때, 위종의 손이 번뜩이더니 귀검 하나가 날아서 침상 위의 도복을 입은 노인의 목에 꽂혔다.
노인의 목에 꽂힌 귀검은 생물이라도 되듯이 꿈틀거리며 몸 안으로 파고 들어갔고, 차 한 주전자 끓을 시간이 흐르자 노인은 흰 가루로 변했다.
"동방삭도 이렇게 가는구나."
위종이 짐짓 탄식했다.
- 작가의말
두둥!
사대신협이 한자리에 모이면 신룡, 아니, 천마를 소환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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