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분지계三分之計
하늘은 청량함으로 파랗게 물들고 들은 국화로 노랗게 덮이고 산은 단풍으로 빨갛게 칠한 가을의 어느 날.
시뻘건 숯덩이를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준마가 살찐 엉덩이를 실룩이며 마찬가지로 커다란 덩치의 소년을 태우고 목마하를 따라 질주했다.
"너도 참 지극정성이다."
혈총이 멈춘 곳은 한 무리 야생마가 한가롭게 풀 뜯는 근처였다. 거기엔 네 발굽 근처 빼곤 모두 시커먼 아름다운 자태의 암말이 있었다.
"열심히 해봐."
말에게 격려의 말을 전한 자룡이 평평한 곳을 찾아 태극권 수련에 몰두했다.
잠시 후.
혈총이 고개를 축 늘어뜨린 풀 죽은 모습으로 다가왔고, 자룡은 바로 수련을 멈추고 혈총의 등에 탔다.
자룡을 태운 혈총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발굽을 놓아 달렸다.
"거봐, 내 말이 맞지?"
구월이어서 대부분 야생 암말은 발정기가 지났거나 임신했거나 갓 새끼를 낳은 상황이다. 혈총이 덩치 크고 잘생기긴 했지만, 짝 찾기가 쉽지 않은 시기다.
혈포규찰대에 있으면서 이러한 얘기를 얻어들었던 자룡이 그간 거듭 말렸는데, 혈총에겐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형이 내년에 좋은 짝 찾아준다고 했으니까 그만 상심해."
자룡의 위로가 먹혔는지, 아니면 달리다 보니 차인 기억이 희미해졌는지.
혈총이 금세 신나서 발굽질을 했다.
"나도 난데, 너도 참 해맑아서 좋다."
엉겁결에 천산까지 가서 혈포규찰대의 일원이 됐고, 형을 따라 홍엽산장에 간 다음엔 온갖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룡은 단 한 번 걱정에 잠긴 적이 없었다. 형이 자신과 형제 관계를 청산하려 해서 잠깐 슬프긴 했으나, 그거로 의기소침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쩜 형 말고 너랑 내가 친형제 아닐까?"
푸르륵.
자룡의 말에 혈총이 투레질로 대꾸했다.
"맞는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자룡이 툴툴거리며 발로 혈총의 배를 툭 찼다. 그에 혈총이 발굽질을 멈추고 절벽을 구르는 낙석 같은 기세로 일지봉을 향해 달렸다.
"형, 일지봉에 손님 왔어."
추수가 끝난 벌에서 새잡이를 하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지나간 자룡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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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무영의 사주를 받았소?"
깊어가는 가을을 따라 일지봉을 방문한 객은 다름이 아닌 황실의 부름을 받아 순천부로 향하던 현영자였다.
"아니오."
"구후 장주 혼자의 생각이란 말이오?"
현영자의 추궁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친김에 대장로께 부탁할 일이 있소."
"아니. 사람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거로 모자라 부탁까지?"
현영자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었다.
"황궁에 들어간다고 무당 일을 손에서 놓을 건 아니잖소."
"말해보시오."
"철혈방은 셋으로 갈라질 거요."
"어떻게 말이오?"
"공형선 방주가 이끄는 호남대유방, 왕경초 방주가 이끄는 귀주대유방, 장선 방주가 이끄는 호북대유방."
"구후 장주는 빠지는 거요?"
"대유방 방주 구후영."
현영자가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다.
"쉽게 이해 가지 않을 거요."
"그렇소. 황제가 이름을 내린 기회를 빌려 세력을 크게 확장해도 모자랄 판에, 셋으로 쪼개는 이유를 모르겠소."
"위협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오."
구후영이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작년에 벌어진 일은 다른 무리의 소행이오."
"누구요?"
"나도 모르오. 그저 서창이나 동창은 아님을 확인했소."
"셋으로 나눠 서로 호응하겠단 뜻이오?"
그제야 현영자는 구후영의 뜻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소. 누군지 모르지만, 우릴 노리려면 골치가 아플 거요."
서창이 철혈방을 상대하기 위해 세운 십수 개 계획 중엔 은마단에 역모죄를 뒤집어씌우는 방법도 있었다.
말 장사를 하는 은마단에 북원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씌운 뒤, 그걸 철혈방 전체에 적용해 역모로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철혈방 전체를 역모로 몰기엔 부담이 커서 계획만 세우고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예전엔 여덟 같은 하나를 상대했는데, 지금은 하나같은 셋을 상대해야 하겠군."
현영자가 핵심을 명확히 짚었다.
예전의 철혈방은 겉으론 하나고 실상은 여덟이었다. 여덟을 동시에 상대하지 않고 개중 하나만 때려도 철혈방 전체가 연루되니, 공격하는 입장에선 참으로 편한 상대였다.
지금은 셋 같은 하나가 되었다. 철혈방을 치려는 자는 예전처럼 하나만 상대해도 되는 게 아니라 셋을 함께 상대해야 한다.
괜히 하나만 건드리면 남은 둘이 도울 것이고, 돕지 않더라도 경각심을 높여 웬만한 음모엔 걸려들지 않는다.
"합치면 강해지고 흩어지면 약하다는데, 철혈방은 정반대군."
"단단한 철괴 여럿을 어설프게 합치면 오히려 쉽게 부서지지 않겠소?"
구후영의 말에 현영자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근데, 공형선이나 왕경초가 구후 장주의 단단한 줄을 쉽게 놓으려고 할까."
철혈방을 처음 만들 때 홍엽산장이 꼭 필요했듯이, 지금의 철혈방엔 구후영이 절실하다. 어찌 보면 구후영 혼자 힘으로 철혈방을 불구덩이에서 건져낸 거나 마찬가지기에, 셋으로 나눠 소원해지는 것을 공형선 등이 반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대장로께 부탁하려는 거 아니오."
"무슨 부탁이오?"
"철혈대회를 화천대회로 이름을 바꿀 생각인데, 의사결정권 다섯 중 무당이 하나만 가져가시오."
삼 월 십오 일에 홍엽산장에서 밀담할 땐 두 개를 주기로 했다. 그 정도는 돼야 무당도 조정에 명분이 서기 때문이었다.
"그럼 무당에 뭘 주겠소?"
"무당 말고 대장로께 황궁에서 지내는 데 꼭 필요한 조언을 드리겠소."
병 준 구후영이 약을 꺼내 들고 약 올리자, 현영자는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위기는 곧 기회란 말도 있잖소. 대장로가 황제의 비위를 얼마나 잘 맞추는지에 따라 무당의 위상이 변화하지 않겠소?"
현영자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한 다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저 얘기하시오."
"화천대회의 의결권은 장선, 공형선, 왕경초와 내가 하나씩 갖고, 남은 하나를 무당에 드리겠소. 대신, 무당엔 해마다 한 번 화천대회를 단독으로 소집할 권한을 드리겠소."
언뜻 보기엔 그저 그런 권리 같지만, 원하는 때에 모두를 불러 모을 수 있는 건 꽤 이점이 큰 일이다.
"나쁘진 않군. 그런데 이건 구후 장주의 뜻이오 아니면 철혈방 전체의 뜻이오?"
"철혈방엔 이미 서신으로 알렸소."
구후영은 서신과 더불어 생일 연회에 초청하는 청첩도 함께 보냈다. 동의하면 청첩을 들고 태원부로 오고 아니면 청첩을 찢고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했으니, 구 월 이십사 일이면 결과를 알 수 있다.
"좋소. 그럼 이젠 조언을 들을 차례군."
"황제는 단약을 자주 복용하여 오장육부에 약 기운이 잔뜩 쌓인 게 화근이었소. 그런데, 여기에 딱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 있소."
구후영의 말에 현영자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오장육부 중에 비장은 약 기운이 잘 안 닿는 곳이오. 그런데 폐하는 비장에도 기운이 넘쳤소. 그게 이상해서 그간 폐하가 복용한 단약의 제조법을 모조리 검토했는데, 비장에 기운이 쌓일 정도의 약은 없었소."
"제길."
"왜 그러시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겠소."
"기운이 강한 약은 맛도 강하오. 그러니 음식이나 물 같은 데 섞어서 몰래 먹이는 건 어렵소. 황제가 자의로 복용했다는 말이니, 괜한 일에 휘말릴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구후영의 말에 굳었던 현영자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황제는 게으른 사람이오. 그러니 뭘 시키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시오. 단약을 더 복용하는 건 신선의 길과 멀어지는 거라고 거듭 강조해 더는 약을 못 먹게 하시오."
구후영은 자신이 아는 바를 현영자에게 자세히 전했다.
'잘만 구슬리면 무당에 진무관 건축 같은 일을 몇 개 더 벌일 수 있고, 그 과정에 땅과 은자를 얻을 수 있겠구나.'
구후영의 얘기가 길어지며 현영자는 속에 맺혔던 울화가 사라지고 희열과 기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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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킨 대로 말했소."
현영자를 배웅하고 구후영과 단아가 일지봉의 장원 주변을 산책했다.
"다음에 할 일은 뭐요?"
"옥 장문께 부탁 하나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부탁 말이오?"
"무당 장로들을 데리고 여기로 와달라고 말입니다."
"내 생일에 무당 장로 모두를 초청하자는 말이오?"
그에 단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 구후 공자가 신검과 검을 논하는 대단한 고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생일을 핑계로 무당 장로 모두를 부를 정도는 아직 아니죠."
단아의 농에 구후영이 못 참고 크게 웃었다.
"천하를 진동한 내 위명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무당 장로들을 무슨 명분으로 부른단 말이오?"
"황명 때문에 태원부를 떠나기 힘드니, 태극혜검의 해독을 이어가고 싶으면 몇몇 장로를 태원부로 보내라고 하면 됩니다."
"다 부른다고 하지 않았소?"
"누구나 그 몇몇이 되고 싶어질 테니깐요."
구후영은 꾀가 많은 사람이 아닌 거지 멍청하지 않다.
"신검이 홍엽산장 장주에게 검법 가르침을 받는다는 헛소문이 호북에 잠깐 돌았던 것처럼, 태원부에도 별의별 소문이 다 돌겠소."
"옥 장문에게도 자기 세력을 모아 무당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이니 우리 청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공짜로 들어주진 않을 거요."
옥무영은 예측이 어려운 사람이 아니다.
구후영이 아는 옥무영은 아무리 친하고 좋아하는 상대여도 거래할 땐 손해를 절대 안 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가끔 뜬금없이 호의를 베풀 때도 있는데, 지나고 보면 다 옥무영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현영자를 치워줬으니 이 정도는 무리한 부탁이 아닐 겁니다."
"그럼 저녁에 서신을 작성하겠소."
"생일 전후로 해서 무당 장로들을 태원부로 불러달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알고 잘해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구후영이 끝내 못 참고 질문했다.
"낙화문이 양양이 아닌 태원부에 뿌리를 내려야 함은 알겠는데, 굳이 무당 장로들까지 부를 필요가 있겠소?"
호북에는 이미 무당이 있고 철혈방도 있다. 예전의 낙화문이라면 양양에 뿌리를 내려도 괜찮은데, 구후영이 거목으로 자란 지금은 별 견제 세력이 없는 산서에 자리를 잡는 게 훨씬 낫다.
"공자. 명성은 무력만큼 큰 힘입니다."
단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대신협은 황궁에서도 건드리길 망설입니다. 공자가 그만한 명성을 얻으면 우리 모두 훨씬 안전해집니다. 그러니 꼬장꼬장한 선비 흉내는 그만 내세요."
"지금 얻은 명성도 감당하기 힘드오."
구후영은 산서에서 자리를 잡기엔 이미 얻은 명성으로도 충분하여, 굳이 무당 장로들을 일지봉까지 불러서 세를 과시하는 건 화사첨족畵蛇添足이라고 여겼다.
"그렇긴 한데, 문제는 이번에 황제를 치료한 일입니다."
"덕분에 많은 일이 해결됐소."
"공자의 명성엔 딱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공자의 이름을 들으면 강한 무력을 품은 무인보단 침을 든 의원을 먼저 떠올릴 겁니다."
단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공자는 사람들에게 강한 무인으로 각인되어야 합니다."
능력이 출중한데 힘이 모자라면 멍청한 자가 함부로 부리려 든다. 대단한 의원으로 알려진 지금, 구후영에겐 강한 무인으로서의 명성이 절실하다.
- 작가의말
구후영 : 아니, 내가 왜 힘이 부족하오?
단아 : 소문이 엔간해야죠.
구후영 :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하고 무당 장로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친 거 모두 사실이잖소. 신검과 검법을 토론한 것도 진실이고, 신창과 친한 것도 사실이오.
단아 : 문제는 정작 중요한 소문이 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구후영 : 뭐요?
단아 : 공자가 주인공이라는 소문이 아직 안 났습니다.
구후영 : 헐.
단아 : 우리 결혼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여차하면 공자가 저와 이혼하고 회귀하여 판을 모조리 뒤엎을 수 있음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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