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석분좌割席分坐
관녕과 화흠이 젊었을 적에 함께 공부하는데 화려한 복장을 한 고관대작이 근처에 행차했다. 관녕은 무시하고 책에 집중했으나, 화흠은 책을 덮고 구경하러 나갔다.
그러자 관녕이 함께 깔던 돗자리를 칼로 베어 두 개로 나눈 뒤, 돌아온 화흠에게 '품은 뜻이 다르니 그대와 난 이제 친구가 아니요.'라며 같은 돗자리에 앉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고 한다.
이로써 할석분좌라는 말이 생겨 뜻이 맞지 않는 친구와 절교하는 경우를 가리켰다.
관녕과 화흠과 달리, 구후영과 옥무영은 성격도 뜻도 다르고 나이도 스무 살 넘게 차이가 나는데도 친분은 갈수록 깊어졌다.
"사제는 관은고검을 빨리 찾고 싶지 않아?"
유월은 무당이 가장 바쁜 시기다.
부자들은 봄엔 살필 게 많고, 가을엔 거두고 사고파느라 바쁘다. 겨울이 한가하긴 한데, 원행이 어려워 무당을 찾는 손님은 유월이 제일 많다.
장로들이 평소 친분이 깊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바쁜 덕분에 모처럼 생긴 휴식 기회를 구후영은 옥무영과 삼청전에서 차를 마시며 보냈는데, 그간 구후영이 잃어버린 검에 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음을 상기한 옥무영이 불쑥 질문했다.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닌데, 최대한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구후영에게 천공교검은 그저 비싼 보검이 아니다. 취화봉의 동굴이나 풍애협의 절벽은 천공교검이 아니었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고, 그간의 대부분 대결에서 천공교검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당연히 빨리 되찾고 싶으나,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들 때문에 최대한 억눌렀다.
"사제. 무위자연이란 건 집착하고 싶으면 집착하고 질투하고 싶으면 질투하는 거야.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여겨 숨기고 억제하는 건 무위를 위배하는 짓이다."
옥무영의 말은 구후영에게 큰 깨달음을 줬다.
'규찰대주는 명쾌하고, 단 소저는 모든 일을 통찰하고, 사형은 솔직하다. 그러나 사형도 예전부터 솔직했던 건 아니다.'
제자를 찾아 육전신공을 전수하기 전까지 가면을 쓰고 생활했던 옥무영이다. 임초현 역시 사제들 앞에서 이십 년 넘게 본심을 숨겼다.
둘 다 주변 환경 때문에 자신을 숨기고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구후영은 이러한 행동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질투 안 하려 하고 집착 안 하려 하는 것 역시 무위자연의 일부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질투 안 하고 집착 안 하는 것 역시 무위자연이라고 말하면 옥무영과 저녁 늦게까지 말다툼해야 한다.
'내가 떠올린 걸 솔직히 말하지 않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모처럼 생긴 휴식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은 탓에 구후영은 옥무영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다행히 전대모검田大厶劍이 있어 이젠 괜찮습니다."
田은 가면을, 大는 주술사를, 厶는 주술사가 든 지팡이를 형상한 것이다. 이 셋이 합쳐서 귀鬼가 되었는데, 양신陽神과 음귀陰鬼라고 예전에 신은 하늘을 귀는 땅을 관리하는 신적인 존재였다.
세월이 흐르며 귀신에 대한 나쁜 얘기들이 생긴 탓에 현재는 부정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지만, 주술사가 가면을 쓰고 지팡이를 든 채 신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형상화한 좋은 의미의 글자였다.
구후영은 귀검을 합쳐 만든 검에 귀검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명칭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귀검이라고 부르기도 무엇해서 전대모검으로 풀이했다.
"사제는 단단함이 과하고 유연함이 부족하니, 늘 경계해야 한다. 단단하기만 하면 더 단단한 것과 부딪쳤을 때 깨지기 십상이다."
옥무영은 구후영의 단단함과 흔들림 없는 태도가 부러웠지만, 너무 단단하여 굽히지 않고 그저 부러질까 봐 걱정이 컸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마침 평범한 검으로 바꿀 시기가 되어 아쉬움이 덜한 겁니다."
"그 검도 평범해 보이진 않는데."
전대모검은 예리함이 천공교검에 손색이 있지만, 더없이 단단했다. 특히 내공을 싣는 면에선 천공교검보다 훨씬 나아서 전반적으로 따지면 구후영에게 더 적합했다.
"아주 단단한 걸 빼면 평범한 검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관은고검은 기병奇兵에 속한다. 속을 비워 수은을 담은 것부터 일반적이지 않은데, 검이 품은 예기도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
그 탓에 풍불지가 가르친 다섯 검결 중의 도결과 요결의 수련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전대모검으로 바꾼 덕분에 남은 세 검결의 경지를 금세 따라잡았다.
"사제는 자신과 꼭 닮은 검을 만났군."
옥무영의 농담에 구후영이 큰소리로 웃었다.
'사형도 마찬가지면서.'
판관필은 길이가 짧아 상대와 근접해 싸우는 흉험한 무기다. 싸우는 과정에 빠른 반응이 필수고, 일격필살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변화와 속임수가 승패의 관건이다.
평소 유들유들해 보이나 철혈방이 방문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뇌물을 강요해 그간의 숙원을 풀어버린 거나, 사부인 풍불지를 데리고 와서 현영자를 어르고 달래 원하는 바를 당일로 이뤄낸 것 등을 보면, 옥무영은 일격필살에 능한 자다.
판관필 한 쌍을 쓰는 옥무영 역시 자기 성격과 꼭 알맞은 무기를 골랐다.
"사제. 뭔 좋은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는 건데? 나한테도 좀 알려주면 안 될까?"
그때.
푸른 도복을 입은 제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구후영도 안면이 있는 해검지를 지키는 무당 제자였다.
"장문께 아룁니다. 황제 폐하의 성지가 도착했습니다."
"응? 또?"
진무관을 짓는 일에 관련해서 성지를 받은 게 약 일곱 달 전 일이다. 그때 황궁에서 조서를 들고 온 일행의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린 옥무영이 이마를 찌푸렸다.
"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지금 올라오고 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다.'
황제가 성지를 내릴 땐 미리 알려서 준비케 하는 게 상식이다. 반대로 말하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건 뭔가 비상식적이어야 할 정도로 다급하거나 중대한 일이라는 뜻이다.
"내 도복이 어딨지?"
"장문 말고 구후 장주가 준비하셔야 합니다."
제자의 조심스러운 일깨움에 옥무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제. 짐작 가는 일이 있는가?"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여긴 내가 응수할 테니, 사제는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라."
구후영이 경공을 펼쳐 자신의 방으로 옷 갈아입으러 가고 얼마 안 지나 키가 육 척 정도에 얼굴이 반반한 환관이 삼청전에 팔자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망포蟒袍?'
망포는 황제가 입는 곤룡포袞龍袍를 닮았는데, 곤룡포의 용은 발가락이 다섯 개고 망포는 발가락이 네 개다.
'진무관을 지을 때도 투우포鬪牛袍를 입은 자가 왔는데.'
망포는 정식 관복이 아닌 황제가 하사하는 옷이다. 이 옷을 입는 자는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환관이나 큰 공을 세운 고관이다. 이다음은 뿔 두 개가 달린 비어를 수 놓은 비어포飛魚袍이고, 투우포는 비어포 다음이다.
단순히 환관이 입은 옷만 봐도 은자 오십만 냥을 들여 진무관을 짓는 일보다 더 중대함을 알 수 있다.
'성지를 내린 걸 보면 딱히 나쁜 일은 아닌 듯한데.'
나쁜 일이면 성지를 든 환관 대신 칼을 든 금의위가 오는 게 정상이다.
"그대가 구후영인가?"
옥무영이 고민하는 사이 삼청전을 둘러보던 환관이 입을 열어 질문했다. 그에 자신의 실태를 알아차린 옥무영이 정신을 차려 성지를 들고 찾아온 환관을 정중히 맞이했다.
"빈도는 무당 장문 옥무영이오. 내 사제는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금세 성지를 받들러 올 거요."
"오호. 그대가 그 유명한 신검의 제자군. 내가 평소 궁금한 게 있었는데, 질문해도 괜찮겠소?"
환관은 손님이 왔는데도 맞이할 생각도 없이 자기 생각에 빠졌던 옥무영을 나무라지 않았다.
"얼마든지 물으시오. 내가 아는 일이라면 숨김없이 말해드리리다."
환관이 까다롭게 굴지 않자 옥무영도 딱히 나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신검이 평소 검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데, 사실이오?"
너무나 뜻밖의 질문이라 옥무영은 멍한 얼굴로 대답을 잊었다.
"아닌가 보군."
옥무영의 표정을 본 환관이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내 사부가 하루에 팔백 리까지 달린 일은 있는데, 검을 타고 날아다니는 건 나도 본 적이 없소."
"오. 사람이 천리마보다 빠르군."
천리마도 하루에 육백 리 정도가 한계다. 겁 많은 짐승인 말은 날이 어두우면 달리지 않기에, 길게 잡아야 하루에 여섯 시진 정도 달릴 수 있다.
그러니 신검이 천리마보다 빠르다는 말은 틀린 셈이나, 사람도 열두 시진 내내 달리는 건 무리기에 신검의 경공은 확실히 감탄할 만했다.
"신검이랑 신장이 싸우면 누가 이기오?"
옥무영이 어려운 질문에 난감해하던 그때.
구후영이 등장했다.
"내가 구후영이오."
구후영을 위아래로 두어 번 훑은 환관이 수행한 수하의 손에서 성지를 받아서 들고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야인野人(관직이 없는 일반 백성) 구후영은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들라."
환관의 말에 구후영이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옥무영을 비롯한 무관한 사람은 구후영의 뒤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봉천승운황제奉天承運皇帝 조왈詔曰."
환관이 성지를 읽었다.
'뭐라는 거지?'
옥무영도 글공부는 했으나 학문이 깊지 않았다. 그 탓에 평소 안 쓰는 온갖 단어로 치장된 조서가 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했다.
"흠차欽此."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삼창을 한 구후영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두 손으로 조서를 공손히 받았다.
"구후 장주는 우리랑 함께 당장 출발해야 하오."
"잠깐 짐 정리할 시간을 주시겠소?"
구후영의 청에 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각 정도는 드릴 수 있소."
환관에게 감사를 표한 구후영이 짐 정리를 핑계로 삼청전을 떠났다. 옥무영 역시 눈치를 슬슬 보다가 장로들이 몰려오며 혼란한 틈을 타 몰래 몸을 뺐다.
"사제, 무슨 일이지?"
경공을 펼쳐 구후영의 방으로 간 옥무영이 문을 닫으며 질문했다.
"황제 폐하께서 인사불성에 빠졌는데, 나더러 치료를 도우랍니다. 내게 의술을 가르친 의원이 황궁으로 불려갔는데 수전증으로 침을 놓지 못해 마지막 제자인 나를 소환했다고 합니다."
구후영은 대답하는 동시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서신을 작성했다.
"사형께 부탁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구후영은 작성한 서신을 옥무영에게 건넸다.
"사형, 이건 내 사부께 전하고, 이건 내 할머니께 전하고, 이건 단 소저한테 전하십시오. 지금 쓰는 건 내 동생한테 주는 서신입니다. 철혈방 방주 및 낙화문 장문 자리를 모두 내놓고, 홍엽산장 장주 자리는 동생에게 넘긴다고 적었습니다. 동시에 모두와 의절함을 명확히 적었습니다. 무당은 괜찮을 듯한데, 사형한테도 편지 하나 써드릴까요?"
구후영의 말을 들은 옥무영이 입을 헤벌리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에 구후영이 설명을 곁들였다.
"치료에 실패하면 그걸 트집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예전엔 왕이나 황제가 죽으면 어의가 함께 순장했다. 악습으로 여겨 사라진 지 꽤 되었으나, 작년에 어마어마한 음모를 겪었던 구후영은 방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작가의말
관녕과 화흠이 같이 밭을 가는데, 반짝이는 누런 금덩이를 발견했습니다. 관녕은 못 본 척 계속 밭을 갈았고, 화흠은 그걸 주워 금덩이임을 확인한 후, 관녕의 눈치를 슬쩍 보고 멀리 던졌습니다.
그 이유가 이 글의 서두에서 서술한 고관대작의 행차를 구경하러 갔다가 관녕한테 절교당할 뻔한 기억 때문이었죠.관녕은 글공부하는 선비가 부귀영화와 재물을 탐하는 걸 죄악시한, 2천년 전부터 ‘정치적 올바름’을 몸소 실천해온 선구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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