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혜검太極惠劍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일월영측日月盈昃
진수열장辰宿列張
"이딴 걸 언제까지 붙잡고 있어야 해?"
성질이 불같은 누군가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소림과 어깨를 견주는 거대 방파의 장로로서 체통에 안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누구도 그 부분은 지적할 의욕이 없었다.
"인자引子(글의 처음에 놓여 전편을 이끌어갈 머리말)를 무시하면 어쩌자는 거요?"
"이건 그냥 천자문이잖아."
천자문千字文은 삼자경三字經과 백가성百家姓과 함께 삼대몽학三大蒙學으로 불리는, 아이들을 계몽하는 학문이다.
천자문은 양무제의 명을 받은 주흥사가 지은 것으로, 약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송나라 때 지어진 백가성이나 삼자경보다 오백 년 이상 앞섰으며, 글을 익히는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학문이다.
특히 천자문을 시작하는 열여섯 글자는 어릴 적에 서당 좀 다녔다 하면 애들도 다 아는 내용으로, 태극혜검의 머리말에 적힐 정도로 대단한 문구가 절대 아니다.
"대장로께서 먹이 남아서 저걸 쓰셨을까?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하자!"
현현자가 죽고 대장로가 된 배불뚝이가 고함쳤다. 비록 무공은 무당에서 열 손가락에도 들지 못하지만, 시야가 넓고 사고가 유연하여 심약한 장문 대신 실질적으로 무당을 이끄는 자다.
"사형. 도대체 왜 천자문에 이리도 집착하는 거요?"
쭉 불만을 제기했던 장로가 배불뚝이에게 질문했다.
"너도 뒤 내용은 읽어봤지?"
"그렇소."
"그래서 초식 하나라도 찾아낸 거 있어?"
배불뚝이의 추궁에 시종 툴툴거리던 장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무공 초식을 적은 글이 아니다. 작고한 대사형의 깨달음이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을 제대로 해석하면 무당의 모든 무공이 소림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를 능가하는 신공이 될 수 있다."
감회가 깊은지 배불뚝이 장로가 잠깐 말을 멈췄다.
"문제는 뒤의 문장이 두서도 없이 너무나 난잡하다. 게다가 같은 글자여도 도가와 불가의 해석이 다르고, 유가의 해석 또한 차이가 있다. 글자 혹은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두 이 인자에 달렸다."
현현자가 남긴 태극혜검은 일관된 흐름이 없었다. 한 달 넘게 아무런 성과도 못 내자 배불뚝이는 태극혜검을 관통하는 무의가 인자에 숨었다고 확신했다.
"정학 사조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현재 장문과 같은 배분인 젊은 장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숙은 자신을 무당의 일원이라고 생각지 않으신다. 삼풍 조사의 유언 때문에 무당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지. 게다가."
배불뚝이 장로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분은 글자를 모르신다."
#
같은 시각, 무당의 삼청전에서.
"장문 사형은 태극혜검의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소?"
무당 장문이 가장 친한 사제와 차를 마시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도덕경을 읽은 모든 사람이 공자가 되고 맹자가 된 건 아니잖아. 태극혜검을 본다고 꼭 고수가 된다는 보장이 있어?"
"그래도 말이오. 혹시나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이 갑자기 풀려 경지가 상승할지도 모르잖소."
"꿈 깨. 나한테 그걸 보여줄 리도 없지만, 내가 본다고 쳐도 너한테 알려주지 않을 거야."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였소?"
"얼굴 안 치워? 사내 녀석이 징그럽게."
무당 장문이 사제의 초롱초롱한 눈을 비난할 때, 푸른 도복을 입은 제자가 삼청전에 들어왔다.
"장문께 고합니다. 철혈방의 방주와 두 당주를 비롯한 여섯 손님이 뵙기를 청합니다."
"철혈방 방주와 두 당주가 지금 왔다고?"
해검지를 지키던 제자가 전한 소식에 무당 장문이 깜짝 놀랐다. 현허자가 죽고 꽤 많은 제자가 물망에 올랐음에도 운 좋게 장문 자리를 차지한 행운아지만.
"어떡하지? 들이자니 서로 소원함을 넘어 적대하는 관계고, 내치자니 괜한 구설에 오르겠고."
대부분 결정을 장로들에게 맡기는 심약한 자로, 무공 역시 특출나지 않았다.
"네 생각엔 어쩌면 좋겠냐."
무당 장문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사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인이 손님을 모실 땐 청첩을 보내고, 손님이 주인 뵙기를 청할 땐 배첩拜帖을 올려 미리 날짜를 정하고 어떤 일로 방문하는지 알리는 게 예의요."
"그렇지. 지금은 철혈방이 무례한 거니까 배첩 핑계로 우선 시간을 끌고, 장로들이 나오면 그때 여쭙는 게 좋겠구나."
장문이 기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들었지? 배첩을 올리고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해라."
그에 소식을 전한 제자가 경공을 펼쳐 해검지로 돌아갔다.
"사제 덕분에 난제 하나를 해결했구나. 톡톡히 보답할 테니, 저녁에 몰래 안주 들고 내 방에 오거라."
"또 어디서 술을 얻은 것이오?"
"놀라지 마라. 이번엔 그냥 여아홍도 아니고 소흥 진가장의 십삼 년 된 여아홍이다."
"사형은 참 재주도 좋소."
한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둘이 온갖 화제로 담소를 나누던 가운데.
"철혈방 방주가 올린 배첩입니다."
내려갔던 제자가 다시 나타났다.
"순순히 돌아간다고 하더냐?"
"네. 급한 마음에 무례했다며 장문께 사과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잘했다."
장문이 흡족한 마음으로 철혈방의 배첩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무당이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이 도우려 하오.
철혈방 방주 구후영.
"웃기는 놈이네."
배첩의 내용을 확인한 사제가 코웃음을 쳤다. 무당과 철혈방은 대놓고 칼을 겨누는 관계는 아니지만, 사이가 나쁜 건 호북 무림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철혈방이 무당의 돈을 받고 무당을 위해 일할 리도 없지만, 철혈방이 원한다고 해도 무당이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잠깐. 철혈방 손님들을 태청전에 모시거라."
장문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사형. 갑자기 왜 그러시오?"
"넌 어서 내려가서 내 말을 전해라."
배첩을 전한 제자가 떠나자 무당 장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야. 일감을 맡겠다는 자들이 빈손으로 왔을까? 좋은 술이나 귀한 물건이나 푸짐한 은자를 준비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에 맡길 리는 없잖소."
"그건 그렇지."
"뇌물을 받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소?"
"고작 뇌물을 날렸다고 철혈방이 무당 장문을 어떻게 할까?"
말문이 막힌 사제가 기가 찬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로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형에게 장문 자리를 맡겼는지 모르겠소."
그때, 해검지의 다른 제자가 삼청전에 들어왔다.
"장문께 고합니다. 철혈방 방주가 이상한 소릴 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아라."
"철혈방 방주가 작고한 현현자 대장로의 유체가 묻힌 곳에 가서 절을 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응?"
장문과 사제 둘 다 의문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천산 백옥봉에서 내공 대결을 벌이고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는데 미처 고맙다는 말을 못 해서 이제라도 하고 싶답니다."
뜻밖의 말에 장문의 눈알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대외적으로 무당의 최고수로 알려진 현현자가 약관 정도의 청년과 내공 대결을 벌여 비긴 건 어디서 자랑할 일이 아니다. 배불뚝이가 입단속을 단단히 하여, 현현자와 구후영이 내공 대결을 벌인 일은 그날 연회에 참석한 무당 제자들만 알았다.
비록 현재 구후영과 현현자의 대결 소식이 호북 전역에 퍼지고 있지만, 근래에 출문한 제자가 없어 아직 무당에 전해지지 않았다.
"혹시 너는 무슨 말인지 아느냐?"
절정에 이르지 못해 무당을 떠나지 못하는 제자 중에서 그나마 해검지를 지키는 자들이 귀가 가장 밝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겨울에 무당을 찾는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해검지의 제자도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사제는 이번에 백옥봉에 가서 뭐 보거나 들은 게 없어?"
장문의 질문에 사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소."
그때, 배첩을 전달하고 떠났던 제자가 다시 나타났다.
"분부대로 철혈방 일행을 태청전에 모셨습니다."
"사제는 일단 옥청전에 가서 지금 일어난 일을 보고해. 난 태청전에 가서 철혈방 사람들을 잡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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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손님을 모셔 놓고 그만 실례했소."
웃음소리가 들린 건 약 이십 장 밖이었다. 그러나 말이 끝났을 때 상대는 이미 태청전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바로 무당 장문 옥무영이오."
이립은 넘어 보이는 사내가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특이한 자로구나.'
옥면비룡은 비록 경공으로 유명하나, 무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옥무영은 방금 놀라운 경공을 보여준 데 비해 내공 경지가 낮고, 무공 역시 강해 보이지 않았다.
"철혈방 방주 구후영이오."
구후영이 인사를 마치자 연무쌍 등도 일일이 일어나 옥무영에게 신분을 밝혔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홀대해서 미안하오. 무당은 딱히 음주를 금하진 않으나, 대체로 멀리하는 분위기여서 술을 구비하지 못했소."
"괜찮소. 우리도 술 마시러 온 건 아니오."
구후영의 대답에 옥무영이 껄껄 웃었다.
"구후 방주의 마음이 급해 보이니 나도 말을 돌리지 않겠소. 철혈방이 무당을 찾은 진짜 목적이 무엇이오?"
"목적은 이미 배첩에 적었소."
"진무관을 짓는 일을 맡겠다는 게 진심이오?"
구후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북에 철혈방만큼 목재를 잘 아는 곳이 있소? 호북에 철혈방만큼 돌을 잘 캐는 곳이 있소? 호북에 철혈방만큼 신용이 확실한 곳이 있소?"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진무관을 짓는 일을 철혈방이 꼭 하고 싶소."
"그게 아니고."
옥무영이 은근하게 말했다.
"뭐가 아니란 거요?"
"구후 방주가 패기만 있고 눈치는 없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으로 말하겠소. 나한테 얼마를 줄 거요?"
뜻밖의 말에 구후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례상 일 할 오 푼이 맞는데, 이번 일은 워낙 액수가 크고 하니 난 이 할을 원하오."
옥무영의 이어지는 말에 연무쌍 등도 입을 헤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이러시오. 공 당주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닐 텐데."
그에 공형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군이나 관에선 삼 할을 도로 가져가는 거로 알고 있소. 사실 이 할이면 나도 크게 선심 쓴 거요."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일단 이 할을 주기로 약속하고, 일 할을 선불하면 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여러분의 성의를 의심하기 어렵지 않겠소?"
옥무영이 제출한 뜻밖의 요구로 머리가 어지러워진 구후영은 망연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봤다.
"얼마 드리면 됩니까?"
단아가 질문했다.
"진무관 짓는 데 약 오십만 냥으로 예산을 잡고 있소. 일 할인 오만 냥을 주면 바로 계약을 체결하겠소."
"바로 계약을 체결한다고?"
이번 일에 우려가 많은 왕경초와 달리, 공형선은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하려는 쪽이다. 그러나 옥무영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오자 오히려 의심이 생겼다.
"내가 일만 냥을 줄 테니 금검당 당주 자리를 내놓으라면, 공 당주는 어찌할 생각이오?"
옥무영의 질문에 공형선은 말문이 막혔다. 머리로는 당주 자리를 못 내놓는다고 외치고 싶지만, 정작 속마음은 갈등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더 흥정할 생각이 없소. 그러니 내 요구를 들어줄지 말지를 어서 정하시오."
- 작가의말
어제부터 접속이 불안합니다. 아예 안 되는 건 아닌데, 몇 분씩 페이지가 안 열리는 일이 있습니다. 사이트 문제라기엔 강호정담에도 한 분이 접속 잘 안된다고 글 올리셨고, 제 문제라기엔 다른 사이트는 엄청 빠릅니다.
혹시 글이 제때 올라가지 못하는 일이 있고 공지가 없으면 제가 문피아에 접속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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