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신장如來神掌
불면유여정만월佛面猶如淨滿月
부처의 얼굴은 맑은 보름달 같고,
역여천일방광명亦如千日放光明
또한 천 개의 환한 해와도 같아,
원광보조어십방圓光普照於十方
밝고 원만하게 세상을 골고루 비추어,
희사자비개구족喜舍慈悲皆具足
희사자비(사무량심)가 넘치누나.
"여래신장을 펼칠 거요."
원철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태극권으로 상대하겠소."
원철이 여래신장을 언급했음에도 구후영은 여전히 검을 뽑을 생각이 없었다.
그에 원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첫 대결에서도 구후영은 검으로 황룡배불의 초식을 막다가 낭패를 보았다. 황룡배불보다 수십 배 강한 여래신장이기에 검을 뽑아도 자신 있는 마당에 구후영이 맨손으로 상대한다고 하자 원철은 필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심하시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원철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일심인一心印을 구현했다.
그에 구후영은 태극권의 허보압장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원철은 바로 공격하지 않고 일심인을 광취불정인光聚佛頂印으로 바꿨고, 이어서 부동근본인不動根本印과 천고뇌음인天鼓雷音印으로 전환했다.
"부처다!"
네 개의 수인을 연이어 완성하자 원철의 뒤로 어렴풋한 부처의 형상이 나타나며 워낙 강하던 기세가 수십 배로 커졌다.
"부처가 현신했다!"
숨죽이고 구경하던 구경꾼들이 너나없이 감탄했고, 소림의 스님들은 부처의 형상을 향해 합장례를 올리며 아미타불을 연신 외쳤다.
구후영 역시 부처의 출현에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수습하고 침착을 되찾았다.
그러는 사이.
원철의 손가락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허!"
수인이 전법륜인轉法輪印에서 일광보살인日光菩薩印으로 바뀌고 끝내 금강궐인金剛厥印이 되자 원철의 등 뒤에 나타난 부처가 오른손 손바닥을 들어 구후영을 가리켰다.
순식간에 일곱 개의 불심인을 선보인 원철이 집중한 얼굴로 구후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왼손으로 지길상인智吉祥印을 맺고 오른손으로 성취일체명인成就一切明印을 맺어 유지했다.
이는 여래신장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복합수인複合手印으로, 소림에선 여래신인如來神印이라고 불렀다.
'위험하다.'
옥무영은 구후영과 십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원철의 오른쪽 얼굴과 구후영의 왼쪽 얼굴을 동시에 눈에 담고 있었다.
이는 옥무영이 대결하는 둘의 측면에 자리했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철의 몸에서 발산하는 기세로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나라면 절대 못 막는다.'
옥무영이 둘의 대결에 끼어들어야 할지 그저 구후영을 믿고 가만히 있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그때, 연무장에 부처의 형상이 나타났을 때보다도 훨씬 큰 소란이 일었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품은 여래신장을 상대로 구후영이 허보압장의 자세를 풀고 뒷짐을 진 다음, 눈마저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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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게 거닐던 새털구름이 발길을 세우고, 졸졸거리며 봄을 노래하던 냇물이 침묵하고, 산들거리며 여기저기 소식을 전하던 바람이 구석으로 숨었다.
연무장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가운데.
쿨럭.
바닥에 쓰러진 원철이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그에 멈췄던 숨들이 다시 쉬어졌고, 경악하여 호흡도 잊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뭐지?"
태산 같은 무거움을 들고 당장 구후영을 오체분시할 것 같던 원철이 갑자기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소리 없이 떨더니 끝내 토혈했다.
그 과정에 구후영이 한 거라곤 고작 뒷짐을 지고 눈을 감은 것뿐이었다.
"비겁하게 독이나 암기를 쓴 거 아니야?"
구경꾼들이 의논이 분분한 가운데.
"원철 당주께선 대결을 속개할 수 있으시오?"
눈을 뜬 구후영이 담담한 말투로 원철에게 질문했다.
그에 방장은 느닷없는 살의로 속이 들끓었다.
'저자는 소림에 큰 위협이다.'
강호에 알려진 소림을 대표하는 세 고수 중 공유는 죽고 원철은 약관의 애송이한테 패했는데, 마침 그 애송이가 무당의 제자다.
이대로는 무당의 명성이 소림을 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실력마저 추월할지도 모른다.
'한 선생의 부탁도 있으니 반드시 제거한다.'
태극혜검을 얻은 현영자가 사람이 확 달라졌던 것처럼, 방장 역시 혜가의 주해가 달린 역근경과 세수경만 얻으면 작은 구설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고 여겨 어떻게든 구후영을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뭘 한 거요?"
그새 눈이 퀭해진 원철이 맥없는 말투로 되물었다.
원철이 펼친 여래신장은 송나라 때 개방의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의 초식 중 하나인 항룡유회亢龍有悔를 참조해 개조했다.
항룡유회는 일곱 갈래 경력勁力으로 상대를 타격하는데, 서로 방향이 다른 이 일곱 경력은 마치 먹잇감의 목을 무는 맹수의 이빨과 같아 일단 걸려들면 피륙은 물론이고 뼈까지 부서지기 일쑤였다.
소림은 항룡유회의 이러한 특성을 바뀐 내공심법 때문에 위력을 잃은 여래신장에 접목했는데.
개조 과정에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성질이 상반된 산장과 첩장을 조화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거로, 첩장 덕분에 산장은 넓은 범위에 퍼지면서도 위력이 약해지지 않았고, 과한 힘을 응축한 첩장이 기운을 방출하기 어려웠던 점 역시 산장 덕분에 일거에 해결됐다.
게다가 아홉 개의 불심인을 차례로 펼쳐 여래신장을 구현한 다음부턴 산장은 모이고 첩장은 퍼지는데, 끝내 산장과 첩장이 하나가 되는 순간 만 근의 바위를 산 위로 굴리는 어마어마한 힘이 분출된다.
"피할 수도 없었을 텐데."
산장이 주변 공간을 장악한 바람에 구후영은 쇠사슬에 묶여 늪지에 던져진 처지였다.
"막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굳이 여래신장까지 갈 것도 없이, 첩장만 해도 위력이 공성용 쇠뇌보다 강해 도저히 육신으로 버텨지는 수준이 아니다.
"난 세상과 하나가 되었고 스님과 하나가 되었소."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후영은 중요한 깨달음을 연이어 얻었다.
첫 깨달음은 여래신장에 관한 것이었다.
'패배를 인정한다고 멈추지 않겠지?'
십 장 밖의 측면에서 지켜보던 옥무영마저 위협을 느낄 정돈데 정면에서 맞서는 구후영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당연히 가슴속에 패배감이 차올랐고, 대결을 멈추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소림이 자신을 가만둘 생각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어리석은 생각을 바로 부정했고, 덕분에 여래신장의 약점을 발견했다.
'무공은 완벽할지 몰라도, 사람은 아니다.'
여래불은 자비의 상징인데, 원철의 여래신장은 자비로움이 아닌 피와 살육에 미친 아수라의 광기만 느껴졌다.
구후영은 소림이 여래신장을 개조한 사실을 모르기에, 그저 원철이 부족하여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 여겼다.
'무공 대신 사람을 공략한다.'
무당의 무공이 태극을 품어야 본연의 위력이 드러나듯이, 자비를 잃은 소림의 무공 역시 완전무결할 리 없다. 구후영은 여래신장이 아닌 원철한테서 타개책을 찾아내기로 했다.
두 번째 깨달음은 태극혜검에 관한 거였다.
세간무태극世間無太極 태극존심중太極存心中.
구후영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원철의 공격을 코앞에 두고 태극혜검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이 구절은 세상엔 태극이 없고 마음에만 존재한다는 말로, 덕분에 구후영은 사람마다 다른 태극을 찾아야 함을 깨달았었고.
'세상에 태극이 없다면.'
중요한 순간에 더 큰 뜻을 찾아냈다.
'내가 마음을 열면 된다.'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구후영은 단숨에 망아의 경지에 들었고, 자신이 품은 태극을 세상에 꺼냈다.
다행스럽게도 구후영이 품은 태극은 세상을 크게 거스르지 않아 고스란히 받아들여졌고, 순식간에 우위가 역전되고 승패가 뒤바뀌었다.
"스님은 스님한테 패한 거요."
얼핏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은 구후영의 변화가 원철에겐 커다란 난제였다.
원철은 구후영을 목표로 삼고 필살의 공격을 펼쳤는데, 구후영이 갑자기 달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었다.
부처의 자비 대신 아수라의 파괴 욕구만 담은 여래신장은 공격 상대를 잃자 창끝을 돌려 주인을 덮쳤고, 여력을 전혀 남기지 않았던 원철은 자신의 무공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당했다.
"아我가 타他고, 타가 아다. 아는 타가 아니고 타는 아가 아니다."
입속으로 중얼거린 원철이 선혈을 울컥 뱉고 그대로 기절했다. 그에 접객화상이 황급히 달려가 원철의 상세를 살폈다.
'내상뿐이 아니라 주화입마까지?'
여래신장의 수련자는 먼저 철사장鐵砂掌을 수련해 손을 단단히 하고 이어서 악석장握石掌을 통해 내공으로 타격하는 법을 배운다.
이 두 무공 모두 대성하면 비로소 여래신장을 익힐 자격이 생겨 불심인에 입문하는데, 불심인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무공으로, 아홉 수인手印 모두 정확하게 구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인과 수인의 전환이 바위 사이로 물 흐르듯 부드러워야 한다.
불심인을 대성한 다음엔 천수여래장의 차례다. 천수여래장은 외력장과 내력장이 조화하고 초식 중에 산장과 첩장을 모두 품은 대단한 무공으로, 여기에 속한 십수 개 초식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사람은 평생이 걸린다.
문제는 불심인과 천수여래장을 익혔다고 끝이 아니다. 원철은 두 필수 무공 외에도 칠십이절기에 속한 무상겁지와 천엽수千葉手까지 익히고서야 겨우 여래신장을 얼추 펼칠 수 있게 됐다.
수십 명의 무공 기재가 도전하여 원철만 여래신장을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원철은 여래신장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무공에 관한 이해는 공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함을 인정하나 대결하면 자신이 이긴다고 자신했다.
현재 원철은 전력을 다한 자신의 공격에 당한 것도 있지만, 여래신장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지며 심적으로 타격을 입은 게 훨씬 위중했다.
'첫 만남부터 기분이 나쁘더니.'
접객화상은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구후영을 일별한 다음, 원철을 안고 연무장 밖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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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무슨 영문인지 알겠는가?"
방장이 당황한 나머지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질문했다.
"경지에서 진 것 같소."
원병이 속삭여 대답했다.
"소림의 반야당 당주가 저딴 애송이한테 경지에서 졌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장 역시 구후영이 엿들을까 봐 걱정되어 무의식중에 전음을 자제하고 있었다.
"절대적 경지 말고 상대적 경지에서 진 것 같소."
원병의 말에 방장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차가운 숨을 들이켰다.
'원철의 여래신장 경지보다 저 애송이의 태극혜검 경지가 높다고?'
여래신장이나 태극혜검 정도면 사실상 어느 무공이 더 강하냐는 비교는 애초에 무의미하다. 둘 다 제대로 익히기만 하면 천하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무공으로, 수련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현재의 결과는 구후영이 원철보다 낫기에 생긴 일이다.
문제는 강호의 평판이다.
사람들은 구후영이 강해서 원철이 졌다고 생각지 않고, 태극혜검이 여래신장을 이겼다고 여길 게 뻔하다.
"마지막 대결이 끝난 것 같은데, 방장의 생각이 궁금하오."
구후영의 맑은 목소리가 연무장에 크게 울리며 가뜩이나 초조한 방장의 속을 사정없이 긁었다.
- 작가의말
드립이 고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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