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아구분敵我區分
태양보다 뜨거운 불이 거세게 일어 힘이 닿는 모든 것을 삼키려 한다. 바짝 마른 나무는 불똥을 탁탁 튀기며 빨갛게 달아오르고, 젖은 나무는 회색 재를 흩날리며 검은 연기를 꾸역꾸역 토해낸다.
"손 쓸 길이 없군."
연무장에서 탈출한 사내들은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물을 찾아 불부터 끄려 했다. 그러나 많은 손님이 올 것을 대비해 비축한 대량의 물은 금세 동나 사라졌다.
그에 커다란 장원이 불에 훨훨 타는 모습을 그저 한탄하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의 생각이 궁금하오."
어깨 나란히 불을 바라보며 각자 깊은 생각에 빠진 왕경초와 공형선에게 구후영이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 말이오?"
"이대로 각자도생할지, 아니면 힘을 합칠지."
"이대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오."
왕경초가 솔직히 말했다.
"전대 마 단주 때부터 시작한 음모라고 생각하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소."
"난 생각이 다르오."
공형선이 이를 빠득 갈았다.
"솔직히 갚아줄 엄두는 나도 안 나오. 그러나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도 안 되는 상황에 흩어지는 건 아니라고 보오."
"뭉치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데?"
왕경초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싸우는 게 승산이 높지 않겠소? 구후 장주가 우리와 힘을 합친다면."
말을 마친 공형선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구후영을 바라봤다.
"두 분이 과거의 나쁜 감정을 당분간 털어버릴 수 있다면, 나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오."
대화하는 사이, 공형선과 왕경초도 내공을 회복했다.
"다들 잘 들어."
공형선이 내공을 실어 크게 외쳤다.
"오늘 이 일은 철혈방을 싫어하는 세력이 꾸민 짓이다. 다행히 홍엽산장의 구후영 장주가 음모를 간파하고 우리 목숨을 구했다."
"홍엽산장 만세!"
"구후 장주 만세!"
죽음의 위기를 겪고 한껏 위축됐던 철혈방 방도들이 아직 남은 공포를 깨끗이 날려버리겠다는 듯이 악을 썼다.
"우리는 이 일을 벌인 모든 범인을 찾아내 끝까지 응징할 것을 철혈방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며, 이번 음모에 가담한 동엽의 방주 직을 박탈하고, 구후 장주를 철혈방의 새로운 방주로 추대한다."
황천길 문턱에서 용케 뒷걸음질을 친 천 명이 넘은 사내가 구후영을 연호하며 발을 굴렀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에 산이 움츠리고 강이 떨었다.
"그럼, 새로운 방주의 취임사를 듣겠다."
구후영이 앞으로 나서자 사내들이 광란의 발 구르기를 멈췄다.
"내가 근래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소."
구후영의 목소리가 아까 뒤로 물러나라고 외쳤던 목소리와 같음을 확인한 사내들이 한바탕 술렁였다.
"내 조부와 부친 모두 피살되었소."
처음 듣는 소리에 철혈방 방도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그 이유가 철혈방을 와해하여 각개격파하기 위함이오."
"그 개자식이 누굽니까!"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께 부탁할 일이 하나 있소."
"말씀만 하십시오. 칼을 물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웃으면서 가겠습니다!"
"우선, 은마단 소속이 있으면 손을 드시오."
손을 든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에 구후영은 공형선과 왕경초와 눈빛을 교환했다.
"합시다."
왕경초가 말하자 공형선도 눈에 힘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은 은마단의 음모요."
쳘혈방도들이 끓는 기름에 부은 물처럼 순식간에 들끓었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에 장원을 기운차게 태우던 불길마저 놀라 수그러들었다.
"그 배후가 있는지 더 조사할 일이지만, 일단 은마단은 형제가 아닌 적이오. 그리고 하나 더."
사내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내공이 실린 구후영의 목소리를 덮지 못했다.
"함께 온 사람 중에 사라진 자가 있는지 확인해서 각 단주와 당주에게 보고하시오. 은마단의 음모에 동조했을 수도 있으나, 은마단에 잡혀 어딘가에 갇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어느 경우든, 숨기지 않고 알리는 게 철혈방과 당사자를 위한 길임을 명심하시오."
곧, 사내들은 소속으로 나뉘어 누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펼쳤다.
"이젠 연명장의 일을 해결할 차례요. 혹시 마 단주가 어딜 갔을지 예상되는 곳이 있소?"
"놈도 산공독을 먹었으니 말을 탔을 거요. 만약 말을 타고 한강까지 가서 배를 탔다면, 어딘가에 말이 버려진 채 있을 거요."
"굳이 말을 안 달리고 배를 탔다면 하류 쪽일 테고, 말을 발견하지 못하면 상류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겠군."
셋이 어떻게 마 단주를 잡아 연명장을 회수할지 고민하던 그때.
"구후 공자."
단아가 나타났다.
"홍엽산장은 무사합니까?"
구후영의 걱정 어린 질문에.
"제가 출발할 때까지 대치하고 있었는데."
단아가 뜸을 들였다.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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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찍 구후영과 연무쌍이 떠나고 홍엽산장엔 단아와 장선만 남았다.
괜히 혈포규찰대까지 있는 걸 알고 상대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것을 걱정해 규찰대주와 열 명의 대원은 홍엽산장 근처에 대기했다.
"놈들이 흩어지면 둘이서 되겠소?"
장선이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장 당주는 몰린 자들을 처리하시고, 흩어진 자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혈포규찰대를 시작부터 부르는 게 좋지 않겠소?"
"저들은 처음부터 불을 지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홍엽산장이 불타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저들은 반항하는 사람을 모두 제압한 후 일거에 태우거나 그저 사람만 죽이고 갈 생각일 겁니다."
장선은 단아의 심계에 속으로 깊이 탄복했다.
"만에 하나 저들이 불을 지피려고 해도 어려울 겁니다. 그에 대비하여 물을 잔뜩 뿌려뒀잖아요."
며칠 사이 우물의 수위가 낮아질 정도로 물을 퍼서 잘 탈 것 같은 건물에 아낌없이 뿌렸다. 물이 얼면서 몇몇 건물에 파손이 생기긴 했으나, 누구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교주의 도움은 평생 잊지 않겠소. 혹시 이 장 모가 도울 일이 생기면 쓸모없다고 내치지 마시고 언제든 입을 여시오."
"방금 하신 그 말씀 단단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홍엽산장으로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다.
"칠십 명이라. 저들이 우릴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니오?"
"뒤에 더 있습니다."
"그게 보이오?"
"제가 산장 주변의 주민을 매수했습니다. 혹시 의심쩍은 자가 보이면 불을 지피고 내가 준 물건을 태우라고 했습니다. 지금 세 곳에서 노란색 연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장선은 단아의 철저한 준비성에 다시 감탄했다.
"첫 무리는 아무래도 이목을 끄는 용도인 거 같습니다. 살인과 방화를 책임진 건 뒤의 무리겠죠?"
"그럼 내가 저놈들을 상대하겠소."
말을 마친 장선이 경공을 펼쳐 활짝 열린 홍엽산장의 대문을 향해 달렸다.
"물 만났네."
대문을 넘은 무리를 향해 신나서 달려드는 장선을 보며 단아가 중얼거렸다.
비록 일대일 비무에서 단아한테 졌고 실력도 연무쌍 아래로 평가받는 장선이지만, 그거로 장선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장선은 일대일보다 다수와 벌이는 혼전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싸움꾼이다. 장선의 여의권은 빠른 공격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무공이어서 상대가 적으면 오히려 실력 발휘가 제대로 안 된다.
"반갑구나."
그러는 사이, 열 개가 넘은 은밀한 기척이 홍엽산장의 담장 안으로 들어왔다.
"칠살문."
은밀히 접근한 자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단아가 기쁘게 웃으며 조용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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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살문이?"
"뭔가 걸리는 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칠살문의 무공도 귀검동에서 시작했음을 알기에 괜히 관심이 갔을 뿐, 돈 받고 목숨 파는 자객들이 홍엽산장의 일에 끼어든 것 자체에는 별 의문이 없었다.
"제가 암기로 칠살문의 자객들을 거의 처리할 때, 이백 명 규모의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이백 명이나?"
"절정 고수가 몇 명 되고, 일류 수준은 서른이 넘는 무리였습니다. 옷차림이 제멋대로여서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자들은 어떻게 상대했습니까?"
"그때, 신창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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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은 원래 거칠 게 없는 사람이었다. 연남산의 제자가 된 것도 연무쌍을 때린 일이 발단이었다. 비록 그땐 연무쌍이 나이가 어리고 무공을 배우기 전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꿈속에서도 권왕의 아들을 때리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철추당의 당주가 되고 사부와 홍엽산장 등 고려할 게 많아지면서 조금씩 성격을 고쳐갔다.
거의 닿았던 여의권의 마지막 경지가 차츰 멀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젠장."
홍엽산장의 대문을 넘은 자들을 향해 오랜만에 거칠 게 없이 덤볐던 장선이다. 상대는 대부분이 무기를 들었고, 암기는 물론 석회 가루를 던지는 야비한 놈도 있었다.
그러나 장선의 호기를 단 일 푼이라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몇 명의 절정에 수십 명의 일류가 섞인 무리가 닥치자 장선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았던 호기가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말았다.
[장 당주. 연무장으로 유인하세요. 저는 혈포규찰대를 부르겠습니다.]
장선은 쓰린 가슴을 애써서 달래며 단아의 말대로 연무장 쪽으로 물러났다.
그때.
"모두 멈추어라."
처음 듣는 거친 목소리가 장선의 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장선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친 목청의 주인은 가짜 구후영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키도 덩치도 큰 사내였다. 추운 겨울임에도 훤히 드러낸 양팔은 허벅지처럼 굵었고, 왼손으로 살며시 감아쥔 검은 창은 속이 빈 대나무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난 신창 악불형이다. 이제부터 내 허락 없이 홍엽산장에 발을 들이는 자는 이마에 구멍을 뚫는다."
"네가 신창이면 난 신검이다."
수백 명 무리에서 가장 앞에 선 털보가 말했다. 그에 뒤를 따르던 자들이 하나같이 낄낄거리며 악불형을 비웃었다.
"왜?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겁나냐? 오줌 쌌냐?"
"내가 겁이 났는지 아닌지 알고 싶으면."
악불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문턱을 넘어 보아라."
그에 허리에 거검을 찬 사내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슉!
강호에 전해지길, 진정한 고수는 병장기를 휘두를 때 소리가 없다고들 한다.
개소리였다.
묵룡이 세찬 소리를 내며 사내의 이마로 쏘아졌다가 거둬졌다. 검도 안 뽑고 홍엽산장의 문턱을 넘던 사내가 이마의 구멍으로 피와 뇌수를 흘리며 뒤로 쿵 넘어졌다.
"뭐야!"
껄껄거리던 자들이 그 모습에 기겁했다. 장선 역시 긴장과 흥분으로 오줌이 마려웠다.
'어떻게 한 거지?'
악불형의 묵룡은 사내의 이마에 닿지도 않았다.
"자네가 혹시 폭풍권으로 불리는 장선인가?"
"젊을 때 잠깐 얻었던 허명입니다."
"아까 보니까 잘 싸우더구먼. 근데, 여기 구후영 소형제의 장원 맞는가?"
"맞습니다."
"소형제는 어디 있는가? 기척이 안 느껴지는데."
"철혈방의 철혈대회에 참석하러 제 사제와 함께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다행이군. 낙화문으로 갔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혹시 나 때문에 무슨 변고를 당한 게 아닌지 심히 걱정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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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돼서 제가 여길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단아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는 길에 수상한 자를 만났습니다. 말을 타고 커다란 편액을 든 채 정신없이 채찍질하더군요."
- 작가의말
처음 듣는 거친 목소리가 장선의 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리슨. 디스 이즈 마이 리얼 스토리.”
코걸이와 귀걸이를 잔뜩 하고 찢긴 청바지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마이 네임 악불형. 모든 여자의 이상형. 마초 진화의 최종형. 천마만 내게 형. 나한테 개기면 무기형. 나한테 맞으면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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