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귤북지南橘北枳
화산은 송나라 때 황실의 지원을 크게 받았다. 그때의 화산파는 도사 집단이었고, 좋은 단약을 만드는 거로 유명했으나, 금나라가 송나라 땅을 빼앗으면서 몰락했다. 돈을 주고 단약을 사는 송나라와 달리, 금나라는 칼을 휘두르며 공짜로 가져갔다.
결국, 약초를 구할 돈조차 없어 단약을 만들지 못한 화산파는 급격히 몰락했고, 세월이 흐르며 단약 조제법마저 전부 유실했다.
그러나.
화산파엔 단약을 먹어 내공을 얻은 자가 많은 덕분에 심법 연구가 활발했고, 우연히 자하신공이라는 절세의 심법을 만들었다.
문제라면 내공만 많고 쓸만한 무공이라곤 격투술인 추산공推山功밖에 없었다. 격투술이라는 게 일단 고수가 되면 어마어마하나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당연히 화산의 명호는 섬서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명이 원을 교체하며 종남파를 견제할 세력을 찾았고, 화산이 눈에 들었으나 강한 무공이 없어 망설였다.
그에 화산은 낙화문과 합치기로 했다.
낙화문의 낙화검법은 초식이 삼백 개가 넘을 정도로 많았으나 훌륭한 심법이 없어 마찬가지로 고수가 적었다.
두 문파는 서로 상대의 심법과 무공이 필요하여 합치기로 했으나, 당시의 낙화문 장문이 끝까지 반대했다.
실랑이 끝에 화산과 합치기를 원하는 제자들은 하산하는 형식을 취했고, 대신 화산의 검종은 낙화문에 예를 다하기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류의 경지에 불과한 구후영이 화산의 절정 고수 두 명에게 예를 올리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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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의 안자는 키가 작고 얼굴도 못생겼으나 언변이 출중하여 사신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한 번은 안자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초왕이 연회를 크게 베풀어 환대했다.
그런데 초왕과 안자가 서로 덕담을 나누며 즐겁게 술을 마시던 중에 군졸들이 사내 한 명을 포박해 데려왔다. 초왕이 누구냐고 물으니, 군졸들이 '제나라 사람인데 도둑질로 잡혔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초왕이 '제나라 사람은 도둑질하는 게 습관인가 보오.'라고 말했고, 안자는 '회남의 귤나무를 회북에 옮겨서 심으니 탱자가 되어 맛이 별로라고 합니다. 제나라에서 멀쩡하던 사람이 초나라에 오자마자 도둑질을 배웠군요.'라며 응수했다.
그리고 지금. 천산 백옥봉의 한 장원에서.
화산으로 옮긴 나무는 자신이 탱자가 아닌 귤이라고 자신했다.
'이걸 원한 게 아닌데.'
구후영은 섣불리 나선 게 너무 후회됐다. 장문검의 권위에 기대려는 생각에 매몰하여 강호에 힘만큼 강한 명분이 없음을 깜빡했다.
구후영이 지더라도 전중광은 장문검에 예를 표할 거지만, 구후영은 상석 자리를 내놔야 한다. 그러면 새로 생긴 상석 자리 때문에 화산과 종남 등이 있는 중석에서 다툼이 일 거고, 하석 역시 중석으로 가려고 다툼이 일 가능성이 크다.
배산 공자에게 부탁이 있는 구후영으로선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어리석은 놈. 철혈방의 일을 겪고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니.'
지금은 엄연히 상황이 다른 게, 그때는 철혈방이 주인이고 복장표국이 손님이다. 지금은 명분을 쥔 구후영이 주인 편이고 힘을 가진 화산은 손님이다.
그래서 미처 이런 진행을 염두에 두지 못했는데, 분란을 일으키려는 화산의 결심이 구후영의 예상보다 훨씬 확고했다.
[위험하면 내가 어떻게든 도울 테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대결에 임하게.]
용천의 전음에 구후영은 이제 와서 대결을 피하는 건 글렀고, 어떻게든 이기거나 비기는 데 집중해야 함을 깨달았다.
장문검을 품에 넣은 구후영은 마음을 다잡으며 중석으로 향했다. 상석은 상을 여섯 개만 놓을 정도로 자리가 좁았고, 하석이 제일 넓긴 한데 상을 빼곡히 놓아 공간은 오히려 중석이 제일 컸다.
"검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소. 낙화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최대한 조심하겠으나 장담은 어려우니, 위험하다 싶으면 억지로 버티지 말고 항복하길 바라오."
전중광의 말에 구후영은 오기가 불쑥 치밀었다.
"내가 그대 수준에 맞출 테니 가진 기량을 마음껏 펼치시오."
상대를 기세로 누르기 어려움을 깨달은 전중광은 말싸움을 멈추고 검을 뽑았다. 구후영 역시 검을 뽑자마자 더 정갈하게 다듬어진 상대의 기세에 대항하기 위해 천공교검을 잡았다.
'이긴다.'
천공교검을 뽑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경솔함에 후회와 걱정이 가득했던 구후영이건만, 대결을 시작하자 바로 잡념을 떨쳐버리고 이기는 데 온정신을 집중했다.
선공은 전중광이었다.
전중광은 매화검법의 일지한매一枝寒梅로 구후영의 심장을 노렸다. 생사결이 아닌 이상 눈과 목과 심장 등은 노리지 않는 게 예읜데, 전중광은 밥 말아 먹은 모양이었다.
'어딜.'
구후영은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무슨 초식인지 대충 예상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고 강한 찌르기에 당황하지 않고 몸을 비틀어 상대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화낙동로花落東路의 초식으로 적절히 응수했다.
비슷한 찌르기 초식인데 천공교검이 화산의 청안검靑雁劍보다 길고 구후영의 찌르기가 더 빠른 덕분에 후공인 구후영이 먼저 상대를 위협했다.
"오!"
작게 감탄한 전중광이 공격을 멈추고 천공교검을 피한 다음, 검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공격을 이어갔다.
초식이 상대한테 간파되었을 때 다른 초식으로 바꿔서 이어가는 매개이도梅開二度의 초식이다. 이걸 굳이 초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단순히 난이도만 따지면 매화검법의 어떠한 정식 초식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매개이도를 본 구후영은 야효와 펼쳤던 대결이 떠올랐다. 그때 구후영도 비슷한 방식으로 멈추려던 초식을 이어갔다.
다른 점이라면 구후영은 같은 초식을 잠깐 늦췄다가 이어갔고, 전중광은 새로운 초식으로 바꿔 공격했다.
'그렇다면.'
구후영도 천공교검을 회수하지 않고 검 끝으로 원을 그리며 공격을 이어갔다.
"초식이 비슷해."
둘이 스무 초식 정도 주고받은 시점에 하석의 누군가가 감탄을 터뜨렸다. 초식이 비슷한 건 둘째 치고, 검을 쓰는 방식 자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젠장.'
비슷하다는 말에 자극받은 전중광은 끊임없이 새로운 초식을 펼쳤고, 매화검법을 다 펼치자 낙안검법으로 바꿨다.
'보인다.'
구후영은 전중광의 모든 초식에 훌륭히 대처했다. 전중광이 아무리 빠르게 펼치고 온갖 허초로 진의를 숨기려 해도 구후영은 상대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정확하게 대응했다.
'다 보여.'
화산파는 낙화검법을 매화검법과 낙안검법을 비롯한 열 개가 넘은 검법으로 나눴다. 온갖 종류의 초식이 섞였던 낙화검법을 특징에 따라 깔끔하게 분류한 덕분에 초식을 수정하고 새 초식을 만드는 게 쉬웠다.
대신 검법이 약간 단순해진 느낌이 있는데, 위력은 오히려 나아졌다. 내공을 싣기 어려운 복잡한 초식보단 단순한 검법이 실전에서 훨씬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구후영과 겨루면서 그 약간의 단순함이 문제가 됐다. 구후영은 전중광이 초식을 다 펼치기도 전에 뭘 하려는지 예상하지만, 전중광은 상대적으로 복잡한 낙화검법의 초식에 반응이 조금은 느렸다.
게다가 검술 경지도 비슷해서 확실한 절정인 전중광이 일류에 불과한 구후영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세 개의 검법을 바꿔가며 공격해도 이득을 얻지 못한 전중광은 마음이 조급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화산파는 당시 사정이 급해 낙화문에 양보를 꽤 많이 했다. 어차피 고수 대부분이 떠난 문파가 더는 유지되지 못할 거란 분석 때문이었고, 과연 스무 명 정도 남았던 낙화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가 줄었다.
그러다 결국 섬서를 떠나 산서로 갔고, 꽤 오랜 기간 소식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잊다시피 했는데, 중요한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장문검의 권위로 화산의 행사를 방해할 줄이야.
'오늘 내 손으로 화산 검종과 낙화문의 악연을 끊는다.'
낙화문과 화산은 왕래가 전혀 없고, 대부분 검종 제자는 낙화문의 존재조차 모른다. 그러나 실권을 잡은 장로들 가슴엔 여전히 낙화문이 멍으로 남았다.
그걸 지우면 전중광 앞엔 탄탄대로뿐이다.
'잡념이 많구나.'
구후영은 상대 초식을 알아보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재미에 빠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화산의 초식이 단조롭고 경직됐음을 느끼곤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덕분에 대결에 집중했던 주의력이 대결 상대한테 옮겨가며 전중광의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함정을 파자.'
빠르게 결정을 내린 구후영은 바로 일락서산日落西山을 다시 펼쳤다. 마음이 조급한 전중광은 아는 초식이 나오자 의심할 생각도 못 떠올린 채 급히 일락서산의 약점을 찔렀다.
구후영은 당황한 척 낙화분분으로 응수했다. 전중광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오골쟁쟁傲骨錚錚으로 낙화분분을 뚫고 구후영의 가슴을 공격했다.
그때, 구후영이 변화를 일으켰다. 쇠로 만든 검이 마치 산 구렁이라도 된 듯 비틀리며 검을 잡은 전중광의 손목을 노렸다.
그에 전중광은 머리가 하얘졌다.
이미 힘을 과하게 쓴 전중광으로선 초식을 거둘 수 없고, 공격을 견지하면 자기 손목이 날아가게 된다. 유일한 방법은 검을 놓고 손을 빼는 건데, 그러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어쩌지?'
구후영 역시 상대 손목을 베지 않으면 자기 가슴에 구멍이 뚫릴 판이라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화산 제자의 손목을 자르는 것 역시 구후영이 바라는 바는 아니다.
그때, 붉은 인영이 구후영의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붉은 인영은 왼손 검지와 중지로 집게를 만들어 구후영의 검 끝을 잡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전중광의 검 끝을 잡았다.
똑 소리와 함께 청안검이 부러졌다.
'뭐지?'
흑 장로는 싸움을 원치 않는다. 중원에서부터 십수 년에 걸쳐 천산까지 쫓겨나는 고난의 시간을 모두 겪어봤기에 당금의 안정적인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구후영이 전중광의 손목을 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자 끼어들었다.
그러나 감히 배산의 장원에서 검을 뽑은 불혹 정도의 어설픈 놈과 약관 정도의 여물지도 못한 새파란 놈이 괘씸해서 검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런데 전중광의 검은 예상대로 부러졌지만, 구후영의 검은 멀쩡했다.
'아예 숨기는 건 가능해도 경지를 속이는 건 천마도 못 했던 일인데.'
내공 고수가 늘며 보검의 의미가 점점 퇴색했다. 지금에 와선 보검 살 돈으로 영약을 구해 먹는 게 이득이란 건 상식과 같다.
흑 장로는 화산과 무슨 관계가 있다곤 하나 처음 듣는 낙화문이란 이름에 선입견이 생겨 구후영의 천공교검이 대단한 보검일 거란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다.
덕분에 구후영이 경지를 숨긴 게 아닌지 의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여기 낙화문의 장문은 흑 장로의 출수를 알고 힘을 거두었으나, 화산은 힘을 거두지 못해 검이 부러졌군. 난 낙화문 장문의 승이라고 보오."
종남파가 이때다 싶었는지 나섰다.
"초식이 비슷한 걸 보니 낙화문과 화산의 인연이 깊은 것 같은데, 이쯤에서 끝내는 게 어떻소?"
배산 역시 기회다 싶어 싸움을 뜯어말렸다.
그러나 낙화문의 이름을 화산 앞에 두는 거로 실질적으론 구후영의 승리에 무게를 실어줬다.
- 작가의말
화산당 : 단일화하면 지원금이 나온다니까.
낙화당 대표 : 싫어.
낙화당 : 그럼 당 대표는 남으시고, 우린 당적을 옮기겠습니다.
그렇게 낙화산당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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