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관불승劍貫佛僧
백옥일배주白玉一杯酒 녹양삼월시綠楊三月時
백옥 잔으로 술 마시다 보니 버들 푸른 삼월이 되었네.
춘풍여기일春風餘幾日 양빈각성사兩鬂各成絲
봄바람 며칠 안 남았는데 어느새 귀밑머리 하얗게 세었네.
삼월은 맞으나 아직은 버드나무가 물들기 전이고, 술 마시는 잔도 백옥이 아닌 그냥 토기다. 봄바람은 갓 불기 시작했고 귀밑머리가 하얗게 되려면 살아온 세월만큼 더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후영의 마음은 이태백이 이 시를 쓸 때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며칠 전에 공현이 사람을 보내 유근의 출행이 오월로 정해졌고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단아가 떠났다.
당사자들은 서로 마음을 확인했으나 양가 어른의 허락을 정식으로 받은 건 아니다. 단아는 배월교에 가서 이모한테 사정을 설명한 다음, 매파를 보내 혼사를 추진하려 했다.
구후영은 언제 올지 모를 공현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고, 하루가 멀다고 찾는 손님을 접대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일지봉에 남았는데, 이별한 지 고작 며칠인데도 자꾸 술이 당겼다.
'빨리 유근을 죽이고 단아랑 단둘이서 강호를 떠나 살았으면 좋겠다.'
구후영이 그리움과 기대가 섞인 오묘한 감정에 젖어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중에.
양달이 경공을 펼쳐 달려왔다.
"방주. 소림에서 찾아왔는데,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말이오?"
그리움에 취해 있던 구후영은 양달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눈썹이 흰 스님 한 분에 덩치가 소장주와 비슷한 스님 네 분이 왔는데, 소림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설마 이형이 사고가 났나?'
구후영은 소림과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기에 소림승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원경과 연관했다.
"객청으로 모시시오."
지시받은 양달이 먼저 경공을 펼쳐 출발했다. 구후영은 옷을 갈아입고 입가심을 해 술 냄새를 없앤 후 비로소 연무장 곁에 있는 객청으로 향했다.
"소승은 소림에서 온 원각이고, 이 넷은 내 제자요."
구후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소림의 스님이 인사를 건넸다.
"낙화문 장문 구후영이오. 원로에서 오신 여러분을 환영하오."
"사안이 시급하여 바로 묻겠소. 혹시 검신에 천공교검 네 글자를 음각으로 새긴 검을 아시오?"
주인과 손님이 서로 인사를 마치면 일단 차를 끓여 마시는 게 순서다. 특히 지금처럼 초면이고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상황에선 더욱더.
그러나 소림의 노승은 느긋한 말투와 달리 성격이 급했다.
"일단 자리에 앉아 얘기하는 건 어떻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먼저 주인 자리에 앉았다. 그에 노승도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자리에 앉았고, 네 제자는 노승 뒤에 시립했다.
"내게 자루 가까운 쪽 검신에 천공교검 네 글자를 새긴 검이 있었는데 작년에 분실했소."
"분실한 게 확실하오?"
"그렇소."
"사안이 중대하니 솔직히 말해주시오."
노승의 추궁에 구후영은 부아가 살짝 치밀었다.
"사안이 중대하지 않아도 거짓을 말하지 않소."
"미안하오."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알아차린 노승이 사과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면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모습이었다.
"근데, 소림에서 어찌 내 검을 아는 거요?"
구후영의 질문에 노승이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천공교검이 소림에 나타났고, 그 검에 소림의 고승 한 분이 운명했소."
상상도 못 한 말에 구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이오?"
"내가 배불러 할 일이 없어 먼 태원부까지 와서 헛소리하겠소?"
구후영과 소림승이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기 싸움을 벌이던 가운데, 양달과 임초현이 함께 객청에 등장했다.
"제자야, 무슨 일이냐?"
구후영은 방금 나눈 대화를 추려서 간단히 얘기했다.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깜박 잊고 안 한 얘기가 있다."
"뭡니까?"
"작년 십이월에 하오문이 나한테 정보 하나 건넨 적 있다. 네가 분실한 보검이 항주에 나타난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네 수련에 방해될까 봐 비밀로 하고 있었다."
'광대를 해도 되겠군.'
노승은 구후영과 임초현의 대화가 미리 준비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대화 중에 잠깐 실례하겠소. 구후 장문의 검은 언제 어디서 분실한 거요?"
"작년 이월에 무당의 해검지에 맡겼다가 분실했소. 저기 양 호위가 당시 놈들과 싸우다가 팔을 다쳤고, 해검지를 지키던 무당 제자들도 증명할 수 있소."
"맞소. 도둑들은 무공이 평범해 내 창에 다섯이나 죽었소. 비수에 바른 독만 아니었어도 검을 지킬 수 있었는데."
"그런데 왜 검을 찾지 않은 거요?"
"연이 남았으면 어떻게든 내 손에 돌아올 것이고, 연이 다했다면 아무리 애써도 못 찾지 않겠소? 게다가 당시 검을 찾는 것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소."
"그럼 작년 십이월에 검의 소식을 들었을 땐 왜 찾으러 가지 않은 거요?"
노승이 고개를 돌려 임초현에게 질문했다.
"무당 장로 수십 명이 손님으로 와서 몸을 빼는 게 여의찮다고 판단했소."
"해검지에서 분실한 거면 무당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니오?"
노승의 질문에 구후영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당시 검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소."
임초현의 대답에 노승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소림도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중대한 일이 낙화문엔 끊이지 않는군."
임초현은 화가 불쑥 치밀었으나, 상대의 기세와 소림의 위명에 눌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소림의 고승께선 언제 돌아가셨소?"
이번엔 구후영이 질문했다.
"약 보름 전이오."
"난 올해 일지봉을 벗어난 적이 없소."
"우리도 구후 장문을 의심하는 건 아니오. 장문이 비록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다지만, 그분을 살해하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오. 단."
노승이 눈에 힘주며 말했다.
"우린 흉수와 장문이 반드시 어떠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오. 그게 아니면 굳이 검을 꽂은 채 떠나지 않았을 거요. 그래서 말인데."
노승이 반론은 허락지 않는다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구후 장문께서 소승과 함께 소림에 한 번 다녀왔으면 하오."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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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총은 작년 구후영의 생일이 지난 다음 자룡과 함께 홍엽산장에 갔다. 구후영은 어쩔 수 없이 봄에 밭갈이할 때 쓰는 늙은 말 중에서 그나마 팔팔한 놈을 골랐는데, 스님들의 기마술이 평범해 얼추 비슷하게 달렸다.
"소림에 도착하기까지 사흘 시간이 있으니, 신중하게 고민하기를 바라오."
나란히 말을 달리던 노승이 말했다.
"부처를 섬기는 분이 어찌 믿음보다 의심이 많으시오."
구후영이 담담하게 받아쳤다.
"내가 의심이 많은 게 아니라 세상이 그런 걸 어쩌겠소?"
노승의 말에 구후영이 잠깐 고민하고 대꾸했다.
"사내 둘이 마주 앉았는데, 둘 사이엔 밥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고기 한 덩이가 있었소."
노승은 물론, 네 제자도 구후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본 어떤 욕심쟁이가 말했소. '오, 저 둘은 고기를 혼자 먹으려고 싸우고 있구나'.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본 어떤 군자가 말했소. '오, 저 둘은 고기를 양보하려고 서로 상대를 설득하고 있구나'."
구후영의 말에 노승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관리가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보고 말했소. '누가 가서 저 고기를 둘한테 똑같이 나눠주거라'. 키 큰 자가 지나가다가 말했소. '키가 크면 배도 크니 좀 더 많이 먹는 게 맞는다'. 마른 자가 지나가다가 말했소. '덩치 큰 놈은 힘이 세고 사냥도 잘할 테니 좀 적게 먹고 야윈 사람한테 양보하자'."
인자견인仁者見仁 지자견지智者見智.
똑같은 일도 어진 자에겐 어짊이 보이고, 지혜로운 자에겐 지혜가 보인다.
"스님께 묻겠소. 부처께서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보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소?"
"아마."
노승은 한참 고민하고 얘기했다.
"고기 한 덩이 사서 둘이 하나씩 먹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오."
"고기를 하나 더 사는 건 살생을 부추기는 행동이 아니오?"
구후영의 반문에 노승이 입을 꾹 다물고 고민했다.
"답을 찾았소?"
약 일각이 지난 다음 구후영이 시종 침묵하고 있던 노승한테 질문했다.
"못 찾았소."
"아니오. 당신은 답을 찾았소."
구후영의 말에 노승은 얼굴이 의혹으로 가득 찼다.
"당신은 고기 한 덩이 사서 둘이 사이좋게 하나씩 먹게 한다고 했잖소."
"하지만 그건 살생을 부추기는 행동이라고."
"내가 말했소. 부처가 말한 것도 아니고 당신이 떠올린 것도 아니고, 당신의 답을 들은 내가 말한 거요."
노승의 얼굴엔 더 많은 의혹이 떠올랐다.
"당신은 부처가 아니오. 당연히 부처의 답을 모르오. 나도 부처가 아니오. 나 역시 부처의 답을 모르오. 그러니 우리 둘이서 부처의 답을 고민하는 건 어불성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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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오?"
현정자가 되물었다.
"그렇소. 해검지에서 분실한 검이 소림에 나타났는데, 그 검이 어떤 고승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고 하오."
옥무영이 대답했다.
"장문의 걱정이 뭐요? 이 일로 무당의 명예가 실추할까 봐 걱정인 거요?"
"이 기회에 소림이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을까 걱정되오."
"소림이 그 정도 시비도 못 구분하겠소?"
"생각 좀 하시오. 태극혜검 덕분에 무당의 명성이 강호를 진동하는데, 소림이 이 기회를 놓치겠소?"
옥무영의 호통에 장로들이 대꾸하지 못했다.
육전신공은 한 번 절정에 이른 단전으로 새롭게 수련하기에, 두 번째 절정에 이른 후에 한동안 어마어마한 속도로 강해진다.
장담했던 반년보단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다시 절정에 이른 옥무영은 이미 무당 장로들을 기세로 누를 정도의 무위를 보였다.
"소림이 자신과 친한 문파들에 무림첩武林帖을 돌리고 있소. 확실치 않지만, 구후 사제가 있는 태원부로 사람을 보냈다는 정보도 있고."
"놈들이 구후 장주를 해치려는 게 아닐까?"
장로 한 명이 말했다.
"신검과 신창이 눈 뜨고 살아있는데, 아무리 소림이어도 그건 무리요."
다른 장로가 반박했다.
"소림이면 또 모르지. 공유 스님처럼 평생 수련만 하고 강호에 전혀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
"우리도 정학 사숙이 계시는데, 도통 문파의 일에 관심이 없으시니."
짝.
중구난방이 되자 옥무영이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했다.
"자. 시간이 급하오. 당장 소림으로 제자를 파견해야겠소. 사제한테 힘을 실어주는 한편, 이번 음모가 무당을 견준 건지 아닌지 확인해야겠소."
"준비만 하고 소림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소? 먼저 움직이면 괜히 제 발이 저린 느낌이오."
"소식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소림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오히려 작위적이 아니오?"
옥무영이 방금 말한 장로를 흘겨보며 말했다.
"천공교검을 분실한 건 무당이오. 그 검이 소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당연히 사람을 파견해 확인해야지 않겠소?"
"어떻게 할 생각이오?"
"내가 직접 사제와 사질들을 이끌고 소림으로 가겠소."
옥무영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소림이 어떻게든 무당에 망신 주려고 할 거요. 장로들이 나서면 일만 커지니, 믿고 내게 맡기시오."
- 작가의말
검관불승 - 검이 부처를 섬기는 스님을 관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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