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지추落葉知秋
소리 없는 아우성이 한바탕 휘몰아치며.
고요한 가운데 의미 모를 눈빛들이 오가고, 읽기 힘든 표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본심은 흔들림 없는 표정에 가려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고, 생각은 의미 없는 웃음에 흐려져 도무지 확신할 수 없다.
구후영이 떠나겠다고 말하는데도 딱히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는데."
동엽이 양쪽 눈치를 보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구후영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불청객은 이만 가겠소."
말을 마친 구후영은 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이미 결정권을 구후영에게 맡긴 연무쌍 역시 별말 안 하고 구후영의 뒤를 따랐다.
그에 공형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오. 구후 장주."
구후영은 무시하고 그대로 떠날지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엔 발걸음을 멈췄다.
"공 당주와 이렇게 재회하여 나도 감개가 무량하오. 지난 만남부터 석 달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오랜만으로 느끼시는 걸 보면 그간 많은 일이 있었나 보오."
"석 달 동안 확실히 많은 일이 있었소."
공형선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대부인께서 철혈방과 의절한다고 단호하게 선언했고, 구후 장주도 본 당과 오해를 풀 생각도 없이 훌쩍 떠나서 아무도 안 올 줄 알았소. 그래서 미처 자리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이리 불쑥 나타나서 적잖이 당황했소."
"미안하오. 청첩을 받았어도 공 당주의 마음을 헤아려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구후영의 가시 돋친 말을 공형선이 태연하게 받았다.
"본 당은 육비나타의 일로 홍엽산장과 불편한 관계요. 구후 장주가 본 당을 불편하게 여길 게 뻔해서 은도당 쪽에 자리 하나 내라고 했는데, 그토록 애타게 구후 장주를 찾고 구후 장주의 대변인이 되어 나를 성토하던 은도당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단칼에 거절할 줄은 나도 몰랐소."
각자의 실제 속마음이 어떤지는 일단 제치고, 표면적으로 보면 구후영과 금검당은 불편한 관계가 맞는다.
은도당 입장에선 공형선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할 명분이 없다.
"공 당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나 또한 섭섭하오."
은도당 당주 왕경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 당주는 분명히 육비나타의 일을 구후 장주께 잘 해석해서 원만히 해결했다고 쭉 얘기해왔고, 태원부까지 가서 돈독한 친분을 쌓았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러 차례 자랑하기도 했소. 반면, 우리 쪽엔 철추당이 있어 구후 장주가 불편하오. 당연히 금검당 쪽에서 자리를 하나 내는 게 맞소."
'뭔가 이상하다.'
구후영은 둘이 손잡아서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들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 수상쩍었다.
"철추당이 구후 장주가 불편하다니. 홍엽산장 장주는 대대로 철추당 부당주 직을 맡아 성실하게 이행했는데, 불편할 게 뭐 있소."
"장 당주의 친위대에 간세가 들어온 것조차 모른 멍청함에 구후 장주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소."
철추당을 대표하여 철혈대회에 참석한 사내가 말했다.
'내 가정이 틀렸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둘이 손잡았다는 가정이 틀렸음이 확실시됐고, 아까 지웠던 가능성이 하나둘 부활했다.
그에 구후영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삼촌. 절 말려주세요.]
"조카. 철혈방과 홍엽산장의 인연은 송나라 때까지 거스른다. 너무 매정하게 굴면 조상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다."
구후영의 전음을 받은 연무쌍이 적절히 나섰다.
"송구합니다. 조상님이 목숨까지 버려가며 지킨 의기를 못난 후손이 더럽힐 뻔했군요."
연무쌍과 구후영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팽팽하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들었다.
"두 분이 나랑 합석하는 건 어떻소?"
눈치를 살피던 동엽이 이때다 싶은지 제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은도당 쪽에 앉은 사내가 혀를 찼다.
철혈방은 방도가 수천 명이나 되는 명실상부한 중원 최대 방파다. 비록 무당에 밀려 예전의 성세는 없지만, 호북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호남과 귀주 일부 지역에도 힘을 쓴다.
이러한 철혈방인데, 아무리 허수아비 방주라도 구후영과 합석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차라리 대결로 정하는 게 낫겠소."
공형선이 말했다.
'왜 이리도 자리를 양보하기 싫어하지?'
안건이 뭔지 모르지만, 철혈대회가 소집됐다는 건 금검당과 은도당 모두 수긍했다는 뜻이다. 그런 마당에 구후영에게 자리 하나 내주는 일로 칼부림까지 가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양보하는 쪽이 밀린다.]
그때, 먼저 상황을 알아차린 연무쌍이 전음을 보냈다.
[우리한테 어떤 자리를 내줘도 구설에 오른다.]
구후영도 그제야 이들이 이토록 첨예하게 맞붙는 이유를 알아챘다.
금검당이 자리를 내준다고 치면, 구후영에게 상석을 내줄지 차석을 내줄지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괜히 상석을 내주고 금검당이 차석에 앉으면 홍엽산장과 구후영에게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비칠 수 있고, 차석을 주면 홍엽산장의 장주와 호북 무림의 자랑 연무쌍을 무시한다고 욕먹는다.
은도당은 더 난감한 처지다. 그간 금검당을 압박하기 위해 홍엽산장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행동했기에, 상석을 양보하면 수하처럼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차석을 내주기도 그런 게, 욕먹는 건 둘째고 어렵게 회유한 철추당이 크게 섭섭할 수 있다.
만약 은도당과 철추당이 상석과 차석에 앉고, 구후영에게 세 번째 자리를 준다면?
철혈방에 속하지 않으나 철혈방과 긴밀히 연결된 방파와 무인들이 은도당에 등 돌릴 가능성이 구 할 구 푼 이상이다.
'그렇다는 건, 금검당과 은도당이 손잡지 않았다는 뜻이다.'
백 년 넘게 대립했던 두 당이 손잡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이득이 따르거나 각자 명운이 달린 위기 상황이어야 한다.
둘 중 어느 거여도 고작 구후영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로 이토록 다툴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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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구후 장주와 연 대협의 왕림을 위해 한 잔 마시는 게 어떻소?"
결국, 방주의 맞은편에 상 하나를 추가해 구후영과 연무쌍을 앉혔다.
예의에 알맞은 배치는 아니나, 딱히 구설에 오를 일도 아니다. 당사자인 구후영과 연무쌍이 군소리 없이 착석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술 마실 때가 아닌 것 같소."
공형선의 차가운 목소리에 동엽이 어색하게 웃었다.
"알겠소. 그런데 구후 장주도 토론에 참여하는 거요?"
공형선과 왕경초가 입을 꾹 다문 채 눈싸움을 했다. 아무래도 구후영을 끼워주기 싫은데, 자기 입이나 같은 편 입으로 말하긴 싫은 눈치였다.
"토론이야 이치에 맞으면 되는 거 아니오? 의사결정권도 아닌데 굳이 자격 제한을 둘 필요가 있소?"
구후영이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왕경초가 먼저 입을 열어 구후영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반대하지 않겠소."
공형선이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안건을 말하겠소. 얼마 전에 무당의 대장로 현현자가 죽었소."
동엽의 말에 구후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수명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더니, 진짜였나 보구나.'
"현현자가 죽기 전에 비급 하나를 남겼는데, 무당에서 태극혜검太極慧劍이라고 이름을 지었소."
대부분 사람이 동엽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양의검법도 장삼풍이 창안한 지 사십 년이 넘는데 이제야 빛을 발했소. 현현자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장삼풍에 미치진 못할 테니,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소."
"마 단주의 말에 나도 동의하오. 그러나 이번 일은 무공이 문제가 아니오."
"그럼 뭐가 문제인 거요?"
"무당이 태극혜검을 장삼품의 유작이라고 소문내고 있소. 현현자가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 장삼풍의 유작을 해석해 글로 옮겼다는 소문이 벌써 순천부까지 전해졌소. 황제가 그 소문을 듣고 무당산에 장삼풍을 기리는 진무관을 크게 지으라고 명했소."
"참 나. 똑같이 칼부림하는 놈인데 누군 신선이고 누군 무식한 칼잡이고."
철혈방 사내들이 툴툴거렸다.
"마저 얘기하시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왕경초가 나섰다. 그에 사내들이 입을 닫고 동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교의 임시 교주 배산이 연회를 크게 열어 중원의 문파들을 초대한 일은 다들 아실 거요. 우리 철혈방도 청첩을 받았으나 정중히 사절했소."
무공도 별로인 허수아비 방주가 가는 건 본인을 포함해 누구도 원치 않았고, 공형선이나 왕경초 역시 위험할지도 모르는 자리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철혈방은 고심 끝에 예물과 함께 편지를 보내 불참을 선언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소. 그러나 무당과 화산이 마교의 일부 세력하고 손잡았다는 소문이 있소."
"화산과 무당이 왜?"
"마교가 무너지면 그다음이 종남과 우리 아니겠소."
"마교가 그리 쉽게 무너질까. 천산에만 수십만 명 있고, 중원에도 신분을 감춘 마교도가 백만은 될 텐데."
"그러니까 문제요."
동엽이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했다.
"마교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 황실이 우선순위를 바꾼 거 같소."
"확실한 얘기요?"
마교 다음은 종남과 철혈방이다. 강한 순서대로라면 종남이 맞겠지만, 아예 거꾸로 가서 철혈방을 먼저 무너뜨리려고 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무당에 진무관을 짓는 걸 보면 우리가 목표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오?"
동엽이 얼굴을 가라앉히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황실이 종남이나 우릴 안 건드린 건, 우리 모두 민생과 큰 연관이 있기 때문이오."
섬서의 객잔과 주루 중 최소한 반은 종남이 차린 거다. 미행이나 포목점이나 양조장 등도 종남의 손길이 닿은 곳이 많다.
이는 송나라 때부터 시작해 유구한 세월 동안 이룬 성과로, 아무리 황실이어도 단박에 엎을 순 없다.
철혈방 역시 호북의 민생과 큰 연관이 있다. 철추당만 해도 야장과 나무꾼들이 모인 방파다. 비록 고수들이 유입되어 고위직을 차지했지만, 철추당의 근간을 이루는 건 여전히 나무꾼과 야장들이다.
금검당이나 은도당은 한 지역의 경제를 책임질 정도로 큰 세력이고, 다섯 단도 철추당만큼 민생과 연관이 밀접하다.
"그런데 진무관을 지으면서 무당이 큰돈을 풀 것이오."
황실이 하사한 거대한 자금이 무당을 통해 호북 전역에 뿌려진다. 무당이 뿌린 돈으로 철혈방이 와해하며 생기는 문제들이 최대한 완화될 것이다.
철혈방을 치기 딱 좋은 시점이다.
"철혈방을 치면 호북의 민생이 도탄에 빠질 가능성이 크오. 그러나 무당이 뿌리는 돈이 있으면 다르오. 철혈방이 무너지며 생긴 공백을 다른 자들이 메우기 충분한 시간과 금액이니까."
'그냥 허수아비는 아니었구나.'
구후영은 동엽의 분석에 감탄했다.
'공형선과 왕경초도 이 말을 들어 철혈대회의 소집에 동의한 거겠지.'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모인 건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오?"
누군가가 막막한 얼굴로 말했다. 이 자리에 앉을 정도면 글을 아예 모르진 않으나, 글을 아는 것과 무식하지 않은 것 사이엔 필연적인 연관이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이 위중한 사태의 해결책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으면 하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으며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 작가의말
낙엽지추 - 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가을이 다가옴을 알다. 일엽지추랑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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