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룡화호雕龍畵虎
양무제 시절, 화가 장승요가 금릉의 안락사 벽에 용 네 마리를 그리며 눈을 완성하지 않았다. 왜 마저 안 그리냐고 주변에서 채근했더니 장승요가 '눈을 그리면 용이 날아간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아 거듭 그려보라고 하니 장승요가 독촉에 못 이겨 붓을 휘둘러 점 두 개를 찍는데, 우레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 용이 벽을 나와 승천했다.
그리하여 벽엔 용 두 마리만 남았고, 한동안 안락사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걸 명공名工에게 맡겨 멋진 조각으로 만들면 값이 열 배 이상이 될 거란 말씀이지요?"
"그럼. 거기에 경매에 부치기라도 하면 더 난리지. 내가 최소 천 냥 받아줄게."
"얼마나 걸릴까요?"
용호표국과 걸어서 반 각 정도 거리에 있는 장원은 은자 백육십 냥에 샀다. 정식 건물만 여섯 채고, 측간이나 창고나 마구간이나 부엌방 등을 합치면 열 채도 넘는 중간 규모의 장원이었다.
원래 집주인이 책상과 의자를 포함한 가구를 모두 갖고 떠난 바람에 약간 휑한 느낌이지만, 성황묘는 물론이고 일지봉에 있던 집보다도 훨씬 나아서 임초현과 어린 제자 모두 즐겁기만 했다.
문제는 가구나 그릇을 사고 이불 등을 사면서 구후영에게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부의 손 치료는 구후영도 자신이 전혀 없어서 서안부의 신의 안물을 찾아갈 계획이다. 그러나 안물은 치료비를 비싸게 받기로 유명한 자여서 수중에 남은 수십 냥으론 어림도 없어 마음이 급했다.
"이렇게 하자. 내가 집에 말해서 은자 오백 냥을 먼저 줄게. 대신 보석의 가공비는 네가 내고 판매 금액의 일 할은 내게 주는 조건이다."
"고작 일 할로 될까요? 이게 다 대형 덕분인데."
소주부와 항주부에만 있는 경매장은 수수료로 삼 할을 떼간다. 게다가 구후영이 내놓은 보석을 조각해서 값을 불리자는 생각도 왕제상이 꺼낸 거기에 구후영은 미안한 마음이 컸다.
"형제가 좋다는 게 뭐냐. 난 누나만 가득하고 하나뿐인 형은 일찍 집을 떠나 얼굴을 몇 번 못 봤다. 그래서 늘 남자 형제가 있었으면 했는데, 원경과 청빈은 스님과 도사라서 너처럼 살갑진 않더구나."
왕제상의 제안에 따르기로 마음먹은 구후영은 사부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구했다.
임초현은 무공을 잃은 뒤 사제들한테 받은 수모만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 정도라 당장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서 구후영과 왕제상의 계획을 십분 찬성했다.
구후영은 곧장 보석들을 들고 왕제상과 함께 왕가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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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제상의 형은 어린 나이에 유건의 양자가 되어 집을 떠났다. 당시 유건은 문무백관의 우두머리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였다.
그런데 유건이 환관의 우두머리인 유근을 죽이라고 황제한테 직언했다가 미운털이 박히며 관직을 박탈당한 바람에 왕가장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았다.
유건 때문에 오히려 손해인 부분이 많았다.
왕제상이 서른 가까이 되는 데도 장가를 못 간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물론, 왕제상 본인의 잘못이 훨씬 크긴 하지만.
"이제야 정신 좀 차리려는 거냐?"
남편이 일찍 죽은 바람에 왕가장의 대소사는 왕 부인이 모두 주관했다. 왕 부인은 일로 바빠서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 때문에 왕제상이 아무리 형편없이 굴어도 뭐라 못 했는데, 이제야 철이 든 듯해서 무척이나 기꺼웠다.
"어머니. 우리 왕가장이 그 정도로 돈에 쪼들립니까?"
왕제상은 일 할만 받기로 해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극찬을 받자 어안이 벙벙했다.
"에구. 기대한 내가 바보지. 구후 소협은 우리 제상이 의동생이라고?"
"소생은 낙화문의 대제자 구후영입니다. 왕 부인의 존안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래. 구후 소협은 내가 왜 기뻐하는지 알겠는가?"
"제가 책만 파고 세상을 겪어보지 못해 왕 부인의 의중을 파악하긴 어렵습니다만, 고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필부무죄匹夫無罪 회벽기죄懷璧其罪."
필부 자체는 죄가 없으나 보물을 품은 것이 죄가 되었다.
"힘없는 자가 보물을 품는 게 죄가 된다면 힘 있는 자가 보물을 얻으면 범에 날개 돋친 격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제상이 사람 보는 눈은 있구나. 정기적으로 좋은 보물을 내놓아 경매에 부치면 사람들이 왕가장으로 몰리고, 그 자체가 힘이고 권력이 된다. 허영에 찬 자들이 경매에 뭐가 나올지 알려고 주변을 알짱거릴 거고, 그 과정에 왕가장의 이름은 점점 드높아지겠지."
'여중 호걸이 이런 분을 말하는 거구나.'
덩치가 좋은 왕제상과 달리 왕 부인은 체격이 왜소했다. 그러나 태원부 최고의 가문을 수십 년 이끈 지혜는 감히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어머니. 아들이 그냥 잘한 게 아니고 되게 잘한 겁니까?"
"그래. 널 낳느라 아팠던 게 아주 헛고생은 아니었구나."
어머니를 일찍 여읜 구후영은 왕 부인과 왕제상의 대화를 들으며 너무 부러웠다.
"경 총관. 서안부에서 쓰는 전표로 오백 냥 찾아서 구후 소협에게 주고 솜씨가 가장 좋고 유명한 옥조가玉雕家(보석 세공사)를 찾아 왕가장으로 부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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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초현은 오백 냥 전표를 품에 넣고 바로 서안부로 출발했다. 구후영은 제자 된 도리로 사부를 수행하고 싶었지만, 열 명이나 되는 어린 사제를 돌볼 중임이 있었다.
"대사형. 진짜 이렇게 하면 강해집니까?"
사제들은 구후영이 초식이 아닌 기본기만 수련하라고 하자 처음엔 즐거워했다. 초식이 틀려 맨날 회초리를 맞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짜 기본기 수련만 하자 슬슬 손이 근질근질했다.
"글자는 수만 개가 있고 모양이 다 다르다. 그러나 잘 뜯어 보면 결국엔 스물여덟 개 획의 조합이다. 스물여덟 개의 획만 잘 그릴 수 있으면 어떤 글자도 제대로 쓸 수 있다. 초식도 마찬가지다. 낙화검법은 짧은 베기와 빠른 찌르기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니 베기와 찌르기만 잘 익혀도 대부분 초식은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다."
구후영의 말에 사제들은 다시 기본기 수련에 열중하던 그때, 문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동생. 나 왔다."
문을 열어 맞이하니 왕제상 혼자가 아니었다.
"경 모가 인사드립니다."
"총관도 오셨군요."
"이분은 석가장에서 온 만균 선생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구후영은 셋을 객당처럼 꾸민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왕가장에 입은 은혜가 있어 이렇게 먼 길을 왔다만, 물건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이대로 돌아갈 거요."
만균은 장원의 규모에 실망한 티가 역력했고, 먼 길을 온 보람 없이 허탕을 칠 것 같아 기분이 잡친 듯했다.
왕제상은 그런 만균이 마음에 안 드는지 대놓고 입을 삐죽였다.
"성현께서 군자는 다른 이에게 싫은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내놓는 물건이 선생의 눈에 안 찬다면 바로 마차를 불러 석가장까지 편히 모시겠습니다."
구후영의 자신만만함에 만균의 딱딱하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어느 걸 꺼내야지?'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보석에 관해 아는 게 적은 구후영은 뭘 내놓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구후 공자, 잠시만."
다행히 경 총관이 있었다.
"지난번에 저한테 보여준 비취를 꺼내십시오. 제일 좋은 것부터 꺼내면 이후 계속 부탁하기 힘듭니다."
괜히 좋은 보석부터 내놓았다간 남은 보석이 눈에 안 찬다고 조각을 거절할 거란 뜻이다.
'비취가 제일 비싼 건 줄 알았는데.'
아는 게 없는 구후영은 경 총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오오! 어디서 이런 대단한 물건이!"
물건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만균의 반응이 예상 밖으로 격렬했다.
"이거 하나밖에 없소? 보통 큰 비취는 무더기로 나오는데."
"일단 품평부터 해주시죠. 이 물건을 제대로 만질 안목이 있는지 제가 궁금하네요."
구후영이 만균의 목에 고삐를 조이려는 걸 알아챈 경 총관이 찬양의 눈빛을 보냈다. 뭘 모르는 왕제상도 만균에게 불만이 있던 터라 구후영을 눈으로 응원했다.
"좋아. 내가 이야깃주머니를 좀 풀어보지."
만균은 구후영의 태도가 변한 건 안중에도 없고 비취에만 한없이 집중했다.
"보석도 나무와 마찬가지로 결이 있지. 목재도 마찬가지지만, 보석은 결이 고른 걸 최고로 친다. 이 비취는 주먹 정도로 큰데 결이 진짜 고르다. 게다가 색이 균일하다. 만 개 중에 한두 개만 나오는 상상품上上品이지. 그뿐인가. 색이 진한데도 맑아서 반대편의 불빛이 보이지. 잘 깎기만 하면 특정 위치에 빛이 모이게 해서 가치를 몇 배로 불릴 수 있다."
"얼마 정도 받을 거 같소?"
왕제상이 궁금함을 못 참고 끼어들었다.
"사흘 주면 내가 이걸 오천 냥짜리로 만들어 드리지. 어떻소? 나한테 맡기겠소?"
"뭘 만들 생각입니까?"
"그건 나도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영盈은 어떻습니까?"
구후영이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대단하군."
영은 고夃과 명皿으로 구성되었다. 밑의 명은 그릇을 뜻하는 글자다. 조각의 하단으로 삼기엔 모양도 글의 뜻도 딱 들어맞는다.
고는 풍風자와 월月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러니 조금 모호하게 조각해서 풍 같기도 하고 월 느낌도 나게 하면 풍월을 뜻하는 좋은 의미가 된다.
게다가 영盈 자체가 넘친다는 뜻으로 의미가 길하다.
"요즘 순천부의 귀인貴人들 사이에서 분재盆栽가 유행인데, 분재도 결국엔 시드는 날이 있소. 그러나 비취를 분재 형식으로 조각한다면 그 푸름이 영원하지 않겠소?"
"사흘이면 됩니까?"
"그래. 사흘이면 되지. 근데 밝은 불을 밝혀야 해. 중간에 자면 안 되거든. 손을 쉬는 중에 마실 죽을 잔뜩 끓여놔. 요강도 몇 개 준비하고."
비취에 빠진 만균은 말투가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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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류귀종이다.'
안문도의 철방에서 명인의 망치질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구후영은 만균의 세공 솜씨에도 반했다.
'초식이 쓸모없는 건 아니다.'
기본기의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초식을 조금 소원했던 구후영은 만균의 세공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저 수백 수천 번의 단순한 칼질은 결국 머릿속에서 상상한 결과물을 현실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기본기를 훈련하는 것도 결국 초식의 모든 움직임을 정확히 구현하기 위함이다.'
결론은 기본기도 중요하고 초식도 중요하다. 기본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지 초식 수련에 더 몰두할지는 개개인의 자질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초식에 대한 이해도 기본기만큼 중요하다.'
만균은 결과물을 상상하여 머리에 새긴 후에야 조각을 시작했다. 뭘 할지 머리로 명확히 아니 칼질에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구후영은 무공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단, 만균처럼 마음먹은 대로 칼이 움직이는 경지에 이를 정도로 기본기를 탄탄히 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기만 하라면 수련 재미를 못 느끼지. 그러니 적절히 섞어야 한다. 사제들을 위해 단순한 수련용 초식을 만들자.'
새 초식을 만드는 건 어려우나 이미 있는 초식을 간략하게 바꾸는 건 검술 이해가 높은 구후영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민이 깊어지면서 구후영의 눈도 비취처럼 푸르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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