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법치국以法治國
춘추전국 때 백가쟁명의 시대가 열리며 수많은 국가가 각자의 이념에 따라 행동했고, 그 결과 누군가는 강국이 되어 영토를 확장하고 누군가는 쇠망하여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명에 이르러선 결국 유와 도와 불의 셋만 남았지만, 묵가나 법가를 비롯해 묵직한 발자취를 남긴 사상들이 꽤 있었다.
"우린 법가다."
호 선생이 말했다.
"약 백 년 전에 칠살문에 침투했고, 내 사부 대에 진씨 일가를 지우고 문파를 장악했다. 그때부터 칠살문은 그저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자객의 무리가 아니라 숭고한 사명감을 갖춘 혁명의 무리로 거듭났다."
"그 숭고한 마음으로 살인 의뢰를 받아 수행한 거요?"
호 선생이 진심을 담아 탄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명나라는 겉부터 속까지 다 썩어빠졌지만, 그 썩은 몸뚱이가 은자로 도배됐다. 같은 은자의 힘이 아니라면 깊은 곳까지 찔러 장기를 상하게 할 수 없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오?"
"명나라 황실을 전복해 난세를 만드는 거다."
호 선생의 이어지는 설명에 구후영은 시종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법가의 시조는 관중이다. 포숙아와 변치 않는 우정으로 관포지교라는 사자성어까지 남긴 사람으로, 제환공의 재상이 된 다음 상업을 키우는 등 온갖 개혁으로 제나라를 춘추 시절의 패주 자리로 올렸다.
관중은 제나라가 강해진 다음에도 주나라를 상국으로 삼고 주나라의 왕을 군주로 섬겼다. 대신 왕을 끼고 제후국을 호령했는데,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일을 조조보다 팔백 년 먼저 해낸 것이었다.
또한 공창제도를 최초로 도입해 국가에서 기생방을 운영하게 하여 강호 방파들이 관운장을 모시듯이 청루와 홍루에선 관중을 신으로 모셨다.
"춘추와 전국 시절에 법가를 선택한 나라는 모두 부국강병을 이뤄 한 시대의 패자가 되었지. 그러나 그 사람들의 결말은 어땠지?"
상앙은 위나라 사람으로 왕이 자신을 중용하지 않자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에서 중용을 받은 상앙은 일련의 개혁을 했는데, 역사에서 이를 상앙변법이라 일컫는다.
상앙은 호적제도를 만들고 군공에 따른 작위 수여 제도를 만들어 귀족이 아닌 자들에게 출세할 기회를 열어줬다. 개간한 황무지를 당사자의 사유 토지로 인정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시행했고, 행정구획을 명확히 나누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세금에 관한 법을 제정했다.
경제면에서 상앙은 법가의 시조인 관중과 달리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탄압했다.
그리고 매우 엄한 법을 세워 법을 어기는 자들을 엄벌했다.
이러한 조치로 진나라는 일약 강국이 되었으며 영토를 하서 지역까지 넓혔다.
하지만.
군공을 세우면 작위를 수여하는 정책은 세습으로 권력을 대물림하던 귀족들의 근본적인 이익을 건드렸고,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는 정책 역시 귀족들의 근간을 흔들었다.
웬만큼 노동력이 있는 자들은 황무지를 개간하려 하지 귀족의 땅을 소작하려 하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상앙은 있는 죄 없는 죄 모두 뒤집어쓰고 거열車裂(오체분시)의 형을 받아 처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나라의 상홍양 역시 소금과 철을 국가의 독점 사업으로 만들어 국고를 풍족하게 했고 법을 제정해 상인들에게 재산세를 받아냈다.
균수법을 만들어 각지의 특산물로 세금을 대체할 수 있게 했고 평준법을 만들어 국가가 세금으로 받은 쌀과 특산물 등을 한나라 전역에 고정 가격으로 배포해 물가의 폭등과 폭락을 방지했다.
국가 소유의 밭을 백성에게 소작을 주게 했고 백성을 변경으로 이주시켜 국경을 단단히 했다.
덕분에 한무제의 끊임없는 군사 정벌에도 한나라의 재정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한소제가 즉위한 후 곽광의 손에 죽고 말았다.
"국가가 풍전등화에 놓일 때마다 왕과 황제들은 법가를 찾았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이룬 후엔 어떻게든 원래의 불합리한 상태로 돌아가려 했고, 대부분 그렇게 됐다."
"그래서 명나라를 전복하여 세상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겠다는 거요? 그 과정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건 무시하고?"
"자. 일단 눈을 뜨고 명나라의 행태를 보아라."
명나라에 이르러 인구는 일억을 훌쩍 넘겼다.
이들을 관리하는 관리 역시 이전의 어떤 왕조보다 많았다.
진시황이 하루에 수천 근의 죽간을 읽고 처리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가벼운 종이로 하루에 수백 근씩 있다.
오죽하면 황제가 장인태감을 만들어 대신 옥새를 찍게 하고, 승필태감 여럿을 만들어 대신 상주서들을 읽고 의견을 적게 했을까.
"황제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러면 당연히 누구나 의거할 수 있는 법을 세워 대신과 지방에서 법에 따라 일괄적으로 처리하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
어느 황제는 황자들에게 일을 맡긴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태자와 여러 황자가 병들어 쓰러졌다.
"세상은 변했다. 법가는 늘 변한 세상에 따라 합당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금의 명은 말만 번지르르한 유교를 떠받들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개소리만 하고 있지. 나라는 덕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리는 거다."
이번엔 구후영도 호 선생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승필태감은 원래 상주서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는 역할이었고, 장인태감 역시 처음엔 그저 황제의 지시에 따라 대신 옥새를 찍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승필태감들이 붉은 글씨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고, 장인태감 역시 황제를 대신해 자기 의사에 따라 옥새를 찍었다.
언제든 거둬갈 수 있는 권력이지만, 황제의 권력을 환관들이 휘두르게 된 것이었다.
"황제가 놀고 싶으면 놀라고 그래. 대신 의거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모두가 지키게 해야지 않겠어? 그런데 명 황실을 봐. 유교나 도교나 불교는 일시적으로 민심을 안정하는 데 장점이 있을지 몰라도 국가의 운영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결국 나라를 지탱하는 건 법가의 유산인데, 거듭된 상서上書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가의 목소리를 줄곧 무시해왔지."
병가나 법가나 묵가 등은 사라졌어도 그 사상까지 없어진 건 아니다.
현재 명나라를 구성한 것엔 묵가나 법가나 병가의 사상은 물론이고 백가쟁명 시대의 수많은 사상이 융화되었다.
덕분에 유교처럼 국가 운영에 부합하지 않은 사상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호 선생이 격분한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오랜 기간 당연하게 써왔던 제도들이라 누구도 법가에 대한 고마움을 품지 않고, 유가의 번지르르한 말에 놀아나고 있었다.
"법가가 세상을 주도해도 유가의 충효를 버릴 수 없고 불가나 도가를 탄압하지 못하오. 누가 떠받들리든, 천하가 번영하고 백성이 태평하면 그만이 아니오?"
구후영의 말에 호 선생이 비웃음을 지었다.
"그런 세상이 얼마나 갈 거 같아? 이대로 유가의 사상이 우위를 차지하면 언젠간 완전히 망해버릴 거다."
집토끼는 산토끼보다 오래 산다. 이는 집토끼가 먹을 걱정 마실 걱정 없고, 누군가가 해치지 않을지 걱정해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법가가 다스리는 나라는 편하다.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괜히 트집잡히지 않을까. 내가 이런 행동을 했다고 벌 받지 않을까. 괜히 귀족과 눈이 마주쳐서 곤장을 맞지 않을까.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에선 이런 불확실한 것으로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귀족이 평민을 벌하는 건 가능하나 마땅한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법가를 중용한 나라들이 수년에서 십수 년의 짧은 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룬 비결이다. 똑똑한 인재들은 기침 소리 한 번 잘못 냈다고 목숨이 날아가는 나라보단 본인의 안전이 더욱 보장된 법가의 나라에 가는 것을 선호했다.
"현명한 왕들은 난세에 하나같이 법가를 찾았다. 이는 법가가 경쟁에 가장 적합한 사상이란 뜻이다. 물론, 내가 그저 법가의 부흥을 위해 이러는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명나라 황실은 이미 환관이 장악했다. 비록 황태후나 황후 등이 뒤에 있지만, 직접 상주서를 읽고 세상을 파악하는 환관들과 비교하면 이들은 장님이나 다름없다.
"명 황실이 환관 손에 망하게 해야 다음 왕조에서 더는 환관에게 일을 맡기지 못할 거고, 그렇게 되면 엄정한 법령을 세울 수밖에 없다. 이는 세상의 나아짐이다."
"당신의 생각은 알겠고, 어느 정도 수긍하는 바요. 그러나 목적이 아무리 바르다고 해도 수단이 너무 나쁜 거 아니오?"
구후영의 말에 호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명 황실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북원과 관동의 여진밖에 없는데, 난 다음 왕조로 북원이 낫다고 본다."
원은 백 년 정도 기간 중원을 다스렸으나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혹한 세금이나 등급을 나눠 사람을 차별하는 등 정책 때문이기도 했고, 황족이나 귀족이면 법 위에 군림해도 되는 풍조 때문이었다.
"여진 역시 오랑캐다. 그러니 차라리 실패한 경험이라도 있는 오랑캐가 다스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
북원은 서산으로 지는 해이고 여진은 동산에서 뜨는 해다. 지금은 여전히 북원이 더 밝지만, 시간이 흐르면 여진이 욱일승천할 것이다.
호 선생이 명 황실을 전복하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강호는 왜 무너뜨리려는 거요?"
"송나라 때를 생각해라. 장강 북쪽을 잃은 다음 수많은 무인이 우국충정을 외치며 금나라 관리를 살해했지. 그 결과는 어땠지? 송나라로 도주한 무인들은 충신이나 협객 소리를 들으며 호의호식했고, 정작 그 화를 대신 당한 건 애꿎은 백성이었다."
처음 듣는 얘기에 구후영은 다소 놀랐다.
"이후 북원이나 여진이 중원을 차지하면 반드시 그러한 멍청이들이 나올 거고, 세상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도 없는 그러한 행동으로 중원의 백성만 고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왕조가 바뀌기 전에 어느 정도 강호의 힘을 줄여야 함이 마땅하다."
"당신은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군."
불쑥 끼어든 홍기영의 질책에 호 선생이 코웃음을 쳤다.
"같은 것은 뭉치기 마련이고, 다른 것은 같아지기 위해 싸운다. 중원이 수백 개 나라였다가 하나가 됐고, 그저 중원만 차지하던 것이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해 지금까지 오지 않았느냐. 그리고 지금 중원에 오랑캐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가 얼마나 된다고 피아로 가리려는 것이지?"
호 선생의 날카로운 지적에 홍기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의 흐름은 방향뿐이 아니라 속도도 있소. 당신의 방향이 틀렸다고 하진 못하겠지만, 너무 서둘렀다고 평가하고 싶소."
구후영의 말에 호 선생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자. 세상의 일은 세상에 맡기고 우리 일부터 해결합시다."
구후영의 눈동자에 파란 불길이 일었다.
"연 선생, 초 선생, 제 선생, 한 선생. 혹시 호 선생이오?"
"아니. 난 그저 호 선생이다."
"그럼 방금 넷은 넷이오? 아니면 하나요?"
호 선생의 눈에 결연한 기운이 맴돌았다.
"하나다. 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데,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놈의 행방을 알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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