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점작소鳩占鵲巢
황금빛 물결을 출렁이던 벌판이 추수의 시작과 함께 헐벗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벌레를 잡아 풍년에 커다란 이바지를 한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울어대며 작별 인사를 했다.
가을이 깊어지며 나뭇잎들이 슬슬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가지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곰은 굴에서 뱀은 땅속에서 동면할 거고, 강남으로 떠난 기러기와 제비는 봄이 되어야 돌아올 예정이다.
그러나 가을의 끝에 이별만 있는 건 아니다.
"기분이 참 좋구나."
임초현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구후영이 실없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며칠 전에 항주의 하오문 총단에서 돌아온 두전이 희소식을 전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자룡을 형제가 드디어 찾아냈다.
형제는 비록 천신만고 끝에 사람을 찾아냈지만, 자룡을 설득할 방법이 없어 일단 돌아왔다. 돌아온 형제는 태원부로 와서 구후영을 찾았는데, 구후영은 양양에서 돌아오기 전이고 두전은 형제를 찾으러 항주로 간 때였다.
둘은 고심 끝에 항주로 돌아가 두전과 만난 후, 시월 초하루에 서안부에서 구후영과 만나 자룡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사형! 사부! 우리 멧돼지 잡았어요."
두전의 아들 두유손이 흥분한 얼굴로 달려왔다.
구후영이 갓 깨었을 때만 해도 삼음절맥으로 고생했던 탓에 여전히 파리하던 얼굴이 어느새 살이 포동포동 올랐고, 아버지를 닮아 뼈가 굵은지라 체구도 나이 많은 사형들보다 더 커졌다.
"좋구나. 마을 사람들 모아 놓고 저녁에 잔치나 열자."
임초현이 술 생각이 간절한지 입맛을 한껏 다셨다.
"삼 사형이 검으로 놈의 눈을 찔렀어요. 칠 사형이 뒷다리를 벴고요."
흥분한 두유손이 침까지 튀기며 사형들의 업적을 칭송했다.
'마음가짐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인호표국 아이들과 대결해 끝내 승리한 사제들은 자신감이 생겼다.
예전이었으면 천방지축 날뛰며 범이나 곰한테도 대드는 멧돼지가 두려워 피했을 텐데, 이젠 합심해서 사냥하기까지 했다.
'나도 자룡이 무사하단 소식을 듣자마자 일류의 경지에 들었지.'
사실 홍엽산장에서 얼떨결에 일류의 경지가 되었는데 그간 마음의 짐이 커서 미처 몰랐다. 자룡이 무사하고 행방까지 안다는 소식에 부담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덕분에 수련하다가 자신의 경지가 일류에 올랐음을 발견한 건데 구후영은 마음가짐이 달라져서 일류로 도약했다고 오해했다.
물론, 나쁜 오해는 아니다. 타고난 재능으로 이룰 수 있는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마음가짐이 중요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 역시 마음이다.
"경 총관 일 참 잘하네."
수확량을 확인하러 온 관리에게 은자를 찔러주는 경 총관을 보며 임초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임초현과 어린 제자들이 돕는다곤 하지만, 장원과 연무장을 짓고 창고를 빌리고 농부들을 감독해 수확하는 등 수많은 일을 단 하나의 차질도 없이 잘 해낸 건 순전히 경 총관 덕분이다.
"자양단을 미끼로 무공을 수련케 하는 건 어떻습니까?"
너무 열심히 일하는 경 총관의 건강이 걱정된 구후영이 말했다. 그에 임초현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내공이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고 하면 꼼짝없이 넘어오겠구나."
#
시간이 빠르게 흘러 구월 십오일이 됐다. 일지봉의 연무장은 이미 완성됐고, 장원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낙화문은 연무장에 상을 잔뜩 차리고 손님을 영접했다.
"임 형. 출세했군 그려."
"고 형. 이게 얼마 만이오. 술 단지를 산만큼 쌓아놨으니 오늘 안 취한 놈이 개자식이오."
"아무렴. 이번엔 꼭 끝까지 버텨 임 형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겠소."
임초현은 그간 강호에서 안면을 튼 자 중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빠짐없이 불렀다.
"근데 정 형은 같이 안 왔소?"
"작년에 죽었소. 관동으로 가는 표행에 꼈다가 눈먼 화살에 맞았다나."
"그럼 정 형 몫까지 해서 오늘 몇 단지 더 마셔야겠군."
임초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근데 벌써 은퇴하는 거요? 사십이면 한창나인데."
용호표국에 절정의 경지를 밟은 사람은 담 표국주뿐이고, 용호표국과 연합을 맺은 표국 중에도 절정에 이른 자는 둘밖에 없다.
임초현은 절정의 경지임을 밝히진 않았으나 실력까지 숨길 순 없었다. 덕분에 틀에 박힌 생활이 싫어 표사는 안 되고 표국 일을 돕는 거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고, 술을 좋아하고 성격도 호쾌해 인기가 좋았다.
"제자들 수련이나 도우며 살려고."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임초현이 알고 지내던 자들을 불렀다. 몇이나 올지 몰라 걱정했는데, 하오문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벌써 스무 명 넘게 모였다.
손님이 너무 적으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머릿수를 채우려던 임초현으로선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때.
"용호표국 담 표국주 일행 드십니다."
예의상 청첩은 보냈으나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용호표국이 등장했고, 심지어 담 표국주가 직접 행차했다.
그에 미리 온 손님들이 분분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담진웅의 위세가 산서에서 얼마나 대단한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네가 낙화문의 새 호법인가?"
일류의 경지에 이르러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칠 수 있는 두전이 손님들을 호명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배 두전이 담 영웅께 인사드립니다."
"내공이 깊고 뼈가 굵으며 여력膂力(등허리 힘)도 출중해 보이니 권장법을 익히면 고수가 되겠군. 어떻게,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없는가?"
예전이었다면 두전은 넙죽 엎드려 절을 했을 것이다. 담진웅의 제자가 된다는 건 대단한 무공을 전수한다는 의미뿐이 아니다.
비천한 사냥꾼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천하가 평안하려면 각자 안분지족安分知足(분수를 알고 자기 자리에 만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담 영웅의 제안은 감사하나 소인의 본분에 넘치는 일이라 사절하겠습니다."
명문가의 사위가 되고 열심히 글공부했던 두전이다. 비록 공부 머리가 없어 글자만 익히고 별다른 학문을 쌓진 못했지만, 구후영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서당 개보다 나았다.
"아쉽구먼."
딱히 기대한 건 아닌지, 담진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인호가 일류의 경지에 들었구나.'
임초현이 정갈하게 다듬어진 장인호의 기세를 보고 감탄했다. 예전이라면 문파를 버리고 떠난 놈이 잘되는 꼴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봐줬겠지만, 지금은 모든 일이 순조로워 흉금이 넉넉해진 덕분에 작게나마 응원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대동부의 고 모가 담 표국주께 인사드립니다."
"평양부의 진 모입니다."
"택주에서 온 전 모입니다."
먼저 온 손님들이 눈도장 찍으려고 하나같이 몰려와서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에 기분이 하늘에 닿은 임초현도 속이 조금 쓰라렸다.
'이건 강호의 도의가 아니지.'
안에서 지켜보던 구후영 역시 기분이 그랬다. 다행히 최근 경지가 오르고 자룡의 행방도 알았기에 너무 속에 담진 않았다.
"임 장문, 아직 한창나인데 장문직을 내려놓는다니 크게 감탄하는 바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이나 내가 너무 속물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됐고, 조만간 손주에게 표국주 자리를 넘기기로 했소. 이게 다 임 장문 덕분이오."
담진웅의 말에 임초현이 이를 빠득 갈았다.
오늘은 임초현이 장문직을 구후영에게 넘기는 기분 좋은 날이다. 그런데 담진웅이 십수 명이나 끌고 와서 표국주 자리를 담청산에게 넘길 걸 선포했다.
산서 무림에서 가장 큰 세력인 용호표국의 표국주가 바뀌는 일은 낙화문 같은 군소방파의 장문이 바뀌는 일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큰일이다.
낙화문의 행사에 축하하러 온 자들이 오히려 용호표국의 일에 관심을 더 주고, 구후영과 안면을 트기보단 담청산과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쓸 게 뻔하다.
이는 애들 전쟁놀이에 어른이 갑옷 입고 나타난 셈이다.
'담진웅이 손녀 일이라면 옳고 그름도 제대로 못 분간한다더니. 아무래도 유저가 장인호한테 망신을 톡톡히 준 모양이구나.'
임초현이 아는 담진웅은 이렇게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면 노망이 났거나.'
아직 환갑도 안 됐고 내공이 절정에 이른 담진웅이지만, 아무리 고수여도 노망은 피할 방법이 없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용호표국이 큰일을 하다 보니 담 표국주 아니면 어렵지만, 낙화문이야 작은 문파 아닙니까? 임 모가 제자한테 추월당한 지 오래서 더는 장문 자리를 차지할 면목이 없어 이제야 퇴위양현退位讓賢(자리를 나은 자에게 물려주다)하는 겁니다."
임초현의 말은 언뜻 겸손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담청산이 담진웅을 대체하기에 부족하다고 욕하는 거였다. 담진웅은 노망이 든 게 아니어서 임초현이 숨긴 말뜻을 알고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손님들이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담진웅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임초현과 친하고 임초현의 초청을 받고 온 자들이기에 임초현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제가 귀한 손님을 오래 세워뒀군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상석에 앉았던 손님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웠다. 경 총관이 왕가장에서 빌린 하인들이 재빨리 상을 치우고 수저와 잔 그리고 음식을 새로 올렸다.
그에 용호표국에서 온 자 중 담진웅과 담청산과 장인호 및 두 명의 대표두가 상석에 앉고 남은 자들은 알아서 다른 자리를 찾았다.
그냥 절정도 아니고 산서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담진웅과 더불어 일류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네 명이나 왕림했다. 잔치를 벌이는 주인으로선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어려서부터 강호에서 막 굴러다닌 임초현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대동부 비마문 양 문주 일행 드십니다."
"황첨산 도솔관 청암 도장 드십니다."
"곽주 공형문 막 문주 일행 드십니다."
임초현이 초청한 적도 없는 산서에선 꽤 알려진 문파나 무인들이 속속 도착했다.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문에서 손님의 도착을 알리는 두전의 입이 거의 쉴 틈이 없었다.
도착한 자들은 하나같이 임초현과는 겉치레로 몇 마디 대충 나누곤 곧 담진웅한테 가서 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대화했다.
어느새 임초현이 초청한 사람의 몇 배가 되는 무인이 연무장을 바글바글 채웠고, 임초현이 초청한 자들은 점점 말석으로 밀려났다.
'이건 도리가 아닌데.'
현재 담진웅이 하는 짓은 주객전도를 훨씬 넘어서 구점작소(산비둘기가 까지 집을 차지하다)의 행태다.
지탄해야 마땅한 일인데, 힘의 격차가 너무 커서 임초현은 화를 꾹꾹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두유손이 다가와 임초현에게 속삭였다.
"대사형께서 어떻게든 참으시랍니다."
그제야 임초현은 자신이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음을 자각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딴에는 잘 참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에서 지켜보던 구후영마저 감지할 정도로 화가 얼굴에 쌓였다.
'그래. 유저라면 이런 경험도 좋은 쪽으로 교훈을 섭취할 거다.'
제자에게 장문 자리를 넘기는 기분 좋은 날에 훼방을 받아 기분이 나빴으나, 상황을 최악으론 만들지 말자는 마음으로 임초현은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
- 작가의말
어른들 싸움 시작.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