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나찰羅漢羅刹
십팔나한진은 다양한 변화가 있지만, 기본이 되는 건 세 개의 육합이다.
이중 육근을 대표하는 육합진은 기세를 피워 상대를 흔들고, 육진을 대표하는 육합진은 상대에게 접근해 직접 타격한다. 육식을 대표하는 육합진은 육근과 육진을 조화하고 힘과 기세를 부풀리는 역할이었다.
구후영은 육진을 이룬 서른여섯 나한에게 물샐틈없이 둘러싸인 채 상체를 가격하는 주먹과 하체를 노리는 발길질을 숨 가쁘게 피해야 했다.
'예상은 했지만.'
십팔나한진이 백팔나한진으로 변하며 정교함이나 효율 등은 크게 저하했다. 그러나 위력만큼은 다른 부분보다 저하가 선명하지 않았다.
진법의 증폭 효과가 줄어 경천동지할 위력은 사라졌지만, 여섯 진나한이 하던 공격을 서른여섯이 하는 거로 바뀐 덕분에 여전히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력이었다.
'만만치 않구나.'
구후영을 직접 공격하는 나한은 넷에서 여섯 정도뿐이지만, 이들은 진법을 타고 흐른 힘을 갖다 쓰며 본신이 품은 것보다 훨씬 큰 위력을 선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본신이 품은 적 없는 힘을 마음껏 휘두르지 못해 현재로서는 구후영한테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물론, 구후영의 상황이 괜찮은 건 절대 아니었다.
구후영이 체력이 뛰어나다지만, 상대는 서른여섯 명이 번갈아 가며 구후영을 상대한다.
구후영이 내공이 깊고 대결 도중에 회복할 수 있다지만, 육근에서 오는 압박 때문에 평소처럼 내공을 쉽게 보충할 수 없었다.
그 탓에 처음엔 나한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피하기보단 흘리는 데 주력했다.
'상황을 바꿔야 한다.'
지금 이대로도 꽤 오래 버틸 자신은 있다. 그러나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상대가 먼저 지치는 요행을 바라야 한다.
구후영은 뭔가 변화를 줘서 상황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끌어오기로 마음먹었다.
'이동제정以動制靜.'
무림에선 이정제동以靜制動을 더 높은 경지로 친다. 대부분 문파는 상대가 어떻게 변화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걸 선호했다.
대표적으로 경기공硬氣功의 최고봉인 소림 무공이 그랬고, 이유제강의 무당 역시 포원수일抱元守一을 높은 경지로 치며 자신이 변화하기보단 상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걸 무의로 삼았다.
그러나 물극필반物極必返이라고, 극과 극은 통한다.
나한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을 끊임없이 쏟아내자 구후영은 빠른 움직임으로 진법의 효용을 무력화하기로 했다.
"합!"
결정을 마친 구후영이 짧은 기합을 지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에 몇몇 나한이 구후영을 향해 탄주彈珠(쇠구슬)를 발사했다.
땅!
구후영이 잽싸게 전대모검을 꺼내 가장 빠른 탄주를 때렸고, 반탄력을 이용해 더 높이 솟구쳤다.
땅!
그에 그치지 않고 나한들이 새로 발사한 탄주를 때려 방향 전환까지 했다.
'됐다.'
두 번의 움직임으로 구후영을 속박하던 압력이 한결 약해졌다.
"곤륜?"
날개 돋친 새처럼 허공에서 연신 방향을 바꾸는 구후영의 모습에 구경하던 무인들이 너나없이 중얼거리던 그때.
'지금이다.'
기류를 타고 방향을 전환하며 진법의 압박을 완전히 벗어난 구후영이 나한진을 향해 하나의 초식을 펼쳤다.
담화일현曇花一現.
담화는 밤에 개화하는데, 딱 하룻밤만 피어 월하미인月下美人으로도 불리며, 짧게 피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이 한층 부각됐다.
구후영이 펼친 담화일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격이 지속한 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위력만큼은 백팔나한진으로 힘을 모은 나한들도 대경실색하여 피할 정도였다.
흡!
바닥에 내린 구후영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소모한 내공을 급히 보충했다.
담화일현은 일손구손을 이용해 만든 검법 초식으로, 전대모검으로밖에 펼치지 못한다. 일반 검으로도 몇 번 시도해 봤는데, 매번 검이 수십 조각이 되는 결과였다.
위력이 이 정도이니 진법이 흐트러지는 것도 모르고 나한들이 무작정 피한 것이었다.
후!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팔나한진은 육진과 육근과 육식의 셋이 역할을 전환할 수 있다. 육근이 육진이 되고, 육진이 육식이 되고, 구후영의 공격에 흩어졌던 육식이 모여서 육근이 되며 구후영이 호흡 한 번 한 사이에 금세 진법을 재구축했다.
#
육합진 하나를 공격해 흐름을 끊은 구후영은 지체 없이 이동했다.
'먼저 지치는 쪽이 진다.'
진법이 강한 건 제각각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화산의 육합매화진처럼 여섯 개의 공격을 조화하는 협공진挾攻陣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진법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을 내기 위함이다.
백팔나한진도 대부분의 진법에 속하는데, 진안陣眼(진법의 핵)에서 시작한 힘이 전달되는 과정에 점점 강해지는 방식이었다.
구후영은 귀검동에서 태극부터 시작해 구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방식을 경험한 덕분에 따로 배운 적은 없어도 상대하는 법은 이미 몸에 새겨있다. 지금의 대응책 역시 머리로 고민해서 얻은 게 아니라 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어디서 대나한진에 관해 들은 건가?'
방법을 찾아 여유로운 듯 보이는 구후영과 달리, 소림 방장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백팔나한진은 대부분 진법과 달리 진안이 고정되지 않았다. 상대의 위치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기에 진법의 변화에 숙달한 나한들도 본인이 갇혔을 때 진안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구후영은 힘이 생기기 시작할 때마다 대단한 경공으로 빠르게 접근해 흐름을 차단하고 맥을 끊어 진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대로는 저놈을 죽이는 건 고사하고, 소림의 명예만 실추된다.'
백팔나한진은 반쪽짜리 진법이다. 진안에서 시작한 힘이 흐름을 타고 어느 정도 강해지지 않는 한, 그저 구후영과 백팔 명의 나한이 대결하는 거나 다름없다.
'뭔가 조치해야 한다.'
진법을 이루지 않는다고 반은 절정인 백팔 명의 나한과 대등하게 대결할 무인은 적다.
문제는 구후영이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거다.
뛰어난 경공으로 포위당하지 않고, 포위당하더라도 허공답보와 비슷한 방식으로 쉽게 벗어났다. 처음에 뭘 모르고 포위당했을 때도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에 잘 대처했고, 허공에 떠오른 후엔 세 개의 육합 중 하나가 흩어질 정도로 강한 초식을 선보였다.
이대로는 대치만 길어지며 소림의 명예가 실추되는 건 물론이고, 아직 절정을 밟지 못한 나한들이 지치며 진법이 파탄을 보일지도 모른다.
"사제, 그걸 써야겠네."
방장의 귓속말에 넋 놓고 구후영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원병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는 눈이 많소."
"어차피 까막눈 아닌가."
십팔나한진으로 백팔나한진을 만드는 과정에 놀라운 발견이 있었는데, 진법에 두 개의 진안을 만들면 힘의 증폭이 십수 배나 강해진다.
문제는 반동이 만만치 않아 진법에 속한 나한 일부도 내상을 입기 일쑤여서 나찰진羅刹陣이란 이름을 달고 약한 위력으로만 수련할 뿐 실전에서 꺼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제 와서 멈추자고?"
지금 멈추기엔 소림은 너무 멀리 왔다.
"주해본을 생각하게."
어차피 나찰진을 알아볼 사람은 소림 제자를 포함해도 몇 없고, 설사 외부인이 알아본다고 쳐도 주해본으로 얻는 실익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다.
"알겠소."
방장의 채근에 원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절반이 내상으로 고생할 거고, 몇몇은 무공을 잃을 정도의 큰 내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근경과 세수경의 주해본을 얻어 진정한 칠십이절기를 부활할 생각을 떠올리며 원병도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일월호영日月互映의 상황을 만들어 쌍룡번해雙龍飜海를 사용한다.]
일월호영은 구후영을 겹치는 곳으로 모는 걸 말하고, 쌍룡번해는 나한진을 나찰진으로 바꾸는 걸 말한다.
'뭔가 변했다.'
원병의 전음은 백팔 명의 나한당 제자들한테만 전해졌으나 구후영은 달라진 분위기로 변화를 느꼈다.
'함정인지도 모르니 기회가 생겨도 무시하고 저들이 지칠 때까지 버틴다.'
#
"이만하면 된 거 아니오?"
구후영이 백팔나한진을 상대한 지 이미 반 시진이 지났다.
말이 좋아 반 시진이지, 강호 전체에서도 반 시진 동안 쉬지 않고 수련할 정도로 내공과 체력 모두 받쳐주는 무인이 손에 꼽을 정도다.
젊어 체력이 좋으면 내공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내공이 넉넉하면 신체가 노쇠해 체력이 달리기 십상이다.
"버티는 게 아니라 진법을 벗어나야 합격이오."
반 시진 가까이 지났는데도 나한들이 일월호영을 이루지 못한 바람에 속은 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으나, 방장은 짐짓 태연한 기색을 가장했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
사실 갑갑하기는 구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전력을 다하던 나한들이 원병의 지시 이후 일월호영을 이루는 데 집중하며 힘을 적당히 뺐다. 게다가 돌아가면서 쉴 수 있어서 구후영의 바람처럼 지쳐 나떨어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포기하게 만들자.'
백팔나한진이 자신한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음을 확실히 증명하지 않으면 소림이 계속 물고 늘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소림이 진실을 밝히면서 도움을 청할 것이고, 배후가 누군지와 무슨 목적인지를 알아낼지도.'
생각을 마친 구후영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에 백팔나한진이 빠르게 일월호영을 이뤘고, 잽싸게 나찰진으로 전환했다.
'됐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방장과 원병이 동시에 웃었다.
반면, 구후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찰진으로 전환한 나한들이 쌍룡번해의 수법을 펼치자 두 개의 진안에서 생긴 막대한 힘이 서로 호응하며 구후영을 꼼짝달싹 못 하게 압박했다.
'실수했다.'
현현자가 절대 하지 말라고 한 일손구손의 위력이 어마어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도를 벗어난 나찰진 역시 파괴력 하나만큼은 구후영이 감당할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구후영의 장점은 가장 핵심적인 하나만 바라보며 흔들림 없었던 거였는데, 대치가 길어지며 머리가 복잡해진 탓에 한순간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이젠 어쩌지?'
태극을 꺼내 원철을 이긴 건 상대가 원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이 아닌 진법을 상대하는 거기에, 같은 방식이 먹히지 않는다.
'위기다.'
백팔나한진 자체가 반쪽짜리 진법인데, 나찰진은 거기에서 정도를 한 발 더 벗어났다. 그 탓에 흉흉한 기운이 밖으로 넘쳐 연무장 밖까지 살기로 자욱했다.
'외곽에서 흔드는 건 효과 없고.'
옥무영은 소매 안에서 잡은 판관필 한 쌍에 자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부은 채 진법에 뛰어들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옥무영뿐이 아니라 연무장의 모든 사람이 숨마저 멈추고 집중하던 그때.
진법 안팎을 산처럼 짓누르던 압박이 돌연 사라지며 기세만으로 압도하던 두 갈래 힘이 느리나 확실하게 구후영을 덮쳤다.
후!
구후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긴장이 극에 달한 나머지 마음은 이미 명경지수가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습관적으로 웃은 것이었다.
흘린다.
이는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아닌 구후영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의지였다.
하나는 바닥으로, 하나는 하늘로.
그때.
"이쪽은 내가 맡으마."
세상 단단한 목소리가 구후영의 귀에 울렸다.
- 작가의말
여래가 아수라였듯이, 나한은 나찰이었습니다.
강호에서 다구리에 강한 무인 최신 차트.
1위 장삼풍(사망)
1위 천마(행불)
3위 신검
3위 신장
5위 구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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