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악심곡鎖惡深谷
무당산의 봉우리들이 가장 높은 천주봉天柱峰을 향해 기울어 마치 신하가 주군을 경배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바람에 예로부터 만산조공萬山朝貢이라는 명성을 떨쳤다. 산이 기운 듯 보인다는 건 펑퍼짐한 모양이 아니라는 뜻이고, 무당은 중원의 모든 산을 통틀어 절벽이 많기로 유명하다.
절벽이 많으면 당연히 협곡도 많을 수밖에 없다.
구후영과 칠살문의 사내들은 정학을 따라 무당산의 협곡 중 하나를 걸었다.
"살인이 나쁘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악인도 죽이지 말아야 합니까?"
구후영은 협곡까지 오는 내내 쭉 생각했지만, 정학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끝내 반문했다.
"아니. 함부로 죽이면 마음이 괴로워. 그러나 죽일 놈을 안 죽이면 그것도 괴로워."
"죽일 놈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기운을 봐. 불은 무언가를 태우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어. 불의 기운이 강한 자가 악행을 저지르면 죽여야 해. 금의 기운이 강한 자는 투쟁심이 강해 악행을 쉽게 저지르지만, 잘 두드리면 협객이 되기도 쉬워. 그러니까 이런 자들에겐 회개할 기회를 줘야지."
정학은 오행의 기운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땅의 기운은 단단해서 쉽게 변화하지 않아. 대신 악행도 잘 안 저지르지. 만약 땅의 기운이 악행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테니 그걸 알아내서 죽일지 말지 결정해야 해."
"물과 나무는 어떻습니까?"
"나무는 주변 영향을 많이 받아. 주변에 선한 자가 많으면 악한 쪽으로 자라고, 악한 자가 많으면 오히려 선한 쪽으로 자라지. 그래서 나무의 기운이 강한 자는 나쁜 놈들과 함께 가둬야 해. 물은 반대야. 물은 어떤 형태에든 맞춰 담기거든. 그래서 물의 기운이 강한 자들은 경 읽는 스님이나 도사랑 같이 살게 해."
구후영은 정학의 말을 들을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럼 저는 무슨 기운이 강합니까?"
"넌 단단한 금의 기운이야. 협객이 돼야 해."
"저자들은요?"
"저자들은 멈춘 물의 기운이야. 환경을 바꿔주지 않으면 썩은 물이 되어 영영 착한 사람이 못 될 수 있어."
대화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달빛도 제대로 안 드는 협곡에는 수십 명 사람이 있었다. 일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생기 없는 시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여긴 쇄악곡이야.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가두어 훈육하는 곳이지. 그런데 절반 이상이 여기 오면 보름 안에 자결해."
"왜 자결합니까?"
"악행을 저지를 수 없으니까."
구후영의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게 쿵 떨어졌다. 세상에 나쁜 짓을 못 해서 괴로워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은 진짜로 충격이었다.
"그런 자들은 일찍 처단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니야. 그런 놈들이 있어야 나무의 기운이 바르게 자라지."
"대신 물의 기운은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게 아닙니까?"
"물의 기운은 따로 관리해. 저기서."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협곡의 양측엔 약 오십 장 정도 되는 절벽이었고, 삼십 장 정도로 높은 곳에 나무로 지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저기에 내 사형 할아버지들이 있거든. 두 분이 물의 기운이 강한 자들을 가르치고 있어."
장삼풍이 제자를 받기 시작한 건 불혹이 넘어서다. 그럼에도 제자 두 명만 빼고 모두 장삼풍보다 먼저 죽었다.
정학은 장삼풍이 백 세가 넘어서 받은 제자로 마흔이 안 됐다. 그래서 곧 여든인 두 사형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잠깐 기다려."
정학은 갓 잡아 온 자들의 덜미를 잡고 절벽을 발로 차며 두 사형이 있는 집으로 갔다.
"흐어!"
정학이 사라지자 산발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자가 괴성을 지르며 구후영을 향해 달려왔다.
'살인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닌데.'
구후영이 처음 죽인 건 장방선생이다. 악행이 극에 달하기도 했고 직접 손쓴 게 아니어서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두 번째 살인은 백화궁의 궁주 자매로, 어떻게 죽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에다가 당시 생사가 엇갈리는 기로에 있어 죄책감이 하나도 없다.
세 번째는 하오문주로, 어린 사제들을 불태워 죽이려 했던 사악한 마음에 격분해 단호히 목을 잘랐다. 네 번째는 여인을 간음하려던 사내들인데,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출수가 중해 셋이 즉사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는 생각에 역시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일도 아니니 웬만하면 피하자.'
허나 정학의 말을 듣고 보니 살인을 최대한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후영이 긴 생각을 마쳤을 때 비로소 괴한이 근처에 이르렀다. 구후영은 가볍게 보법을 밟아 자신을 덮치는 괴한을 피했다.
괴한은 쇄악곡의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양발이 쇠사슬로 묶였고 피파골이 뚫려서 양팔에 힘이 없었다.
'특별히 악한 자인가?'
언뜻 스치며 확인한 바로 음식을 씹는 데 필요한 어금니만 남기고 앞니와 송곳니는 전부 발치해 없었다.
"흐어. 흐어어."
턱 양측에 짧은 침을 꽂아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살기가 별로 없는 걸 봐선 구후영을 어떻게 하려고 덮친 건 아니고, 구후영의 검에 죽고 싶어서 그런 듯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또 뉘우치시오. 그러면 마음에 평정이 올 것이오. 그때 죽을지 살지 다시 고민하시오."
구후영의 말에 괴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잘했어. 협객 아이야."
어느새 돌아온 정학이 구후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칭찬했다. 그러곤 우는 사내의 덜미를 잡고 가까운 공터에 갔다.
"모여. 수련 시간이다."
정학의 외침에 사내들이 쇠사슬을 쩔꺽거리며 공터로 몰려왔다.
"날 따라 해라. 매번 말하지만, 태극권을 익혀내는 자는 그냥 풀어준다."
정학이 근처에 왔는데도 전혀 못 느낀 것에 충격을 받았던 구후영이 한 번 더 놀랐다.
'악인들에게 무당의 절기를 가르친다고?'
태극권의 형은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태극권을 펼칠 때 의념을 어디에 두고 운기를 어떻게 하는지, 태극권의 무의가 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무당의 제자 중에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악행을 저질러 백번 죽어 마땅한 자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친다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발은 뿌리가 되고 힘의 시작은 다리다. 가장 중요한 건 허리고 힘을 발산하는 건 손가락이다. 하체는 늘 전후좌우 어디로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상체는 하체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보통 무공은 하체가 흔들림이 없고 상체가 영활하다. 그런데 태극권은 반대로 행하고 있었다.
'허리가 중심인 무공이구나. 상체가 음이고 하체가 양이야.'
총명한 구후영은 태극권의 무의 중 하나를 금세 깨우쳤다.
태극권에서 중심이 되는 건 허리다. 이유극강의 무의 덕분에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상대하는 게 가능한 무당이기에 태극권의 중심을 허리까지 높일 수 있었다.
'다른 문파는 알아도 어렵겠구나. 무당처럼 기초 무공부터 이유극강의 무의가 깊이 배어있지 않으면 오히려 태극권 수련이 독이 된다.'
강호의 규칙에 따르면 구후영은 무당파가 태극권을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봐선 안 된다. 그러나 정학이 공공연히 무당파 제자가 아닌 악인들에게 가르치고 있기에 구후영도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렵게 가르치는 게 아니잖아. 형만 배우라는 것인데 왜 저들은 전혀 못 익혀내지? 피파골을 뚫려 힘이 없을 뿐이지 팔이 안 움직이는 건 아닌데.'
일부 사내는 태극권을 펼치는 정학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딴청을 부렸고, 일부 사내는 정학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또 일부는 힘없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태극권을 따라 했는데, 비슷하게 흉내 내는 자조차 없었다.
"왜 저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는지 궁금해?"
태극권의 형을 한 번 시연한 정학은 악인들에게 알아서 수련하라고 이르고 구후영과 대화했다.
"태극권은 음양의 균형이 중요해. 저들처럼 악한 쪽으로 한껏 기운 자들은 형만 익히는 것도 힘들어."
"태극권을 익히고 여길 떠난 사람이 있습니까?"
"세 명 있어. 한 명은 밖에 나갔다가 원수 손에 죽었고, 한 명은 피해를 본 가족에게 찾아가 추운 겨울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다가 얼어 죽었지. 한 명은 여기 남아서 날 도와 죄인을 관리해. 덕분에 나도 가끔 밖에 나갈 수 있는 거고."
"혹시 청빈이라는 도사가 있습니까? 방금 잡은 둘과 마찬가지로 칠살문의 자객이었으나 회개할 마음을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
"청빈? 혹시 스무 살 정도 된 아이야? 저 위에서 사형 할아버지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어. 근데 협객 아이는 어떻게 자객 아이랑 아는 사이가 된 거야?"
"제 의형입니다."
구후영의 말을 들은 정학이 갑자기 손뼉을 세게 쳤다.
"오호. 그랬구나. 금생수라고 하더니. 단단한 동생이 물 같은 형을 바른길로 이끌었구나."
청빈은 무당산에 돌아간 후 사부와 사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도관에 불까지 질렀다. 이를 본 정학이 청빈을 악인곡으로 잡아 왔고, 청빈은 자신들의 정체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악행을 저질렀으나 회개하려는 마음이 큽니다. 거기에 악한 자를 벌하려는 의지도 강합니다. 어떻게 놔줄 수 없을까요?"
"그건 안 돼. 그 아이는 아직 태극권의 형을 다 못 익혔어. 규칙은 지켜야 해."
"그럼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따라 와."
말을 마친 정학이 몸을 돌려 절벽을 밟으며 위로 갔다. 구후영은 정학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따라 했다.
"뭐야? 제운종梯雲縱을 한 번 보고 따라 해?"
"밟는 순간 밀고, 발을 떼는 순간 당기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게 그 유명한 무당의 제운종입니까?"
"무의는 늘 간단한 것에서 출발해 점점 복잡해지지. 어리석은 자들은 복잡함에 속아 간단한 걸 못 보는데, 협객 아이는 이제 보니 총명하기도 하구나."
칭찬을 받았지만, 정학이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라 칭찬받은 기분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사형 할아버지. 손님 왔어."
방 하나 앞에 도착한 정학이 말했다.
"정학이 오랜만에 손님 데리고 왔구나."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문이 절로 열렸다. 안에는 수염은 물론 눈썹까지 흰 노인 둘이 있었다.
"낙화문 제자 구후영이 무당의 두 노신선을 뵙습니다."
"어허. 빨리 죽으라고 욕하는 거요? 신선이 되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무당의 맑은 공기를 매일 마시는 게 훨씬 낫지."
"청빈이 동생이야. 형 보고 싶어서 왔대. 정학이도 사부 보고 싶은데."
"음. 자책감이 과해서 중심을 못 잡는 그 아이 얘기군. 기운이 단단한 동생이 형을 좀 바른길로 인도해주시게."
"감사합니다."
허락을 얻은 구후영은 날듯이 기뻐 두 노인에게 넙죽 절했다.
"감사하긴. 세상에 악인이 한 명 줄고 선인이 한 명 늘면 우리가 감사할 일이오."
문이 절로 닫히자 정학은 구후영을 데리고 청빈의 방으로 갔다.
"청빈, 손님 왔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
"형님!"
산발에 옷이 엉망인 건 밑에 괴인들과 같았다. 그러나 다리가 사슬로 안 묶였고 피파골이 뚫렸던 자리는 잘 아물어 흉터만 남았다.
"동생?"
죽은 물고기 같던 청빈의 눈에 생기가 잠깐 맴돌았다.
- 작가의말
"죽일 놈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MBTI가 뭔지 물어봐. 그럼 죽일 놈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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