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선탈각金蟬脫殼
매미는 땅속에서 유충의 형태로 몇 년을 산다. 그러다 때가 되면 땅을 뚫고 위로 가는데, 지상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탈각이다.
온 힘을 쏟아 껍질을 벗은 유충은 새로 생긴 날개로 자유롭게 날며 뜨거운 여름을 노래하는 매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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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에서 약 이십 리 되는 곳에서 화산이 작별을 고했다.
"화산은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내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장로 대신 손자인 청년이 검종을 대표해 나섰다.
"검종에 낙화문 비급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 구후 대협께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에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풍애협의 비급이라면 이미 취했소."
구후영의 말에 청년이 더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길 들어가는 열쇠가 낙화문의 장문검이오."
구후영이 낯빛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했다.
"대단치도 않은 비급을 얻느라 장문검을 잃었는데, 잘한 일인지 모르겠소."
구후영은 내친김에 봇짐에서 낙화검법의 비급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고, 지하도시에서 얻은 진나라 때의 것으로 유추하는 그 비급이었다.
"읽어보시오."
새로운 초식을 만들기 위해 난화검법의 천하검보와 함께 늘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구후영도 몰랐다.
"대단치 않으나 꼭 필요한 말만 적혔군요."
비급을 빠르게 훑은 청년이 말했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한 번 뒤돌아봐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생기는데, 그럴 때 읽으면 좋은 글귀들이오."
"귀한 걸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급을 돌려준 청년이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멀쩡한 사람이 드문 검종의 무리를 이끌고 숲으로 사라졌다.
"대단한 놈이군."
느릿느릿 멀어지는 검종의 모습을 보며 옥무영이 감탄했다.
"그러게요. 경지는 일류에 불과한데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합니다."
"내공에 적합한 몸을 타고나는 자가 있고, 무공에 적합한 몸을 타고나는 자가 있고, 싸움 재능을 타고나는 자가 있다."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은 장선과 두전이 떠올랐다. 장선은 명성과 비교해 내공의 경지가 부족한데 싸우는 능력은 타고났다. 두전 역시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한 적 없이 내공만 익히고도 꽤 괜찮은 실력을 자랑했다.
"가끔은 너처럼 다 타고나는 놈도 있고."
구후영도 따지고 보면 검에 적합한 몸을 타고났을 뿐이다. 공청석유가 아니었다면 내공이 적어 실전에서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싸움에 관한 재능도 개화하지 못했다.
'그럼 뭐해. 이렇게 강해져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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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겼다."
화산이 떠나고 계속 걷던 중에 원경이 검은 피를 연신 토해내더니 허리를 쭉 폈다.
"그건 아니지."
강석이 힘없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놈이 내게 쓰고 남은 힘을 네가 받아낸 거다."
원경이 짧게 고민하고 강석의 말에 수긍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흑철의 목표는 강석이었다.
당연히 강석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힘을 배분했을 거고, 원경은 남은 힘을 감당했다.
그 배분하고 남은 힘이 강석에게 쏟은 것보다 적은지 많은지는 흑철만 아는 일이니 원경이 먼저 회복한 거로 승패를 가르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
"언젠간 한 번 더 붙어보자."
원경의 말에 강석이 고개를 저었다.
"너랑 나랑 싸워서 승패를 가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원경과 강석 모두 공격보단 방어가 출중한 무인이다. 반쪽짜리라곤 하나 백팔나한진의 공격을 그저 몸으로 받아낸 원경은 말할 것도 없고, 강석 역시 지치지 않는 체력과 아무리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자로 유명하다.
신창에게 쉽게 패배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신창의 공격은 외공을 익혀 몸이 튼튼하다고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신창 앞에서 강석이든 원경이든 아무런 장점도 없는 무인이 될 뿐이다.
"그래도 가릴 건 가려야지."
원경이 투지를 불태우자 강석이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종남으로 가는 건 아닌 듯하고, 이번 일에 아는 게 없어 도움도 안 될 거 같고."
원경한테 말하던 강석이 고개를 돌려 대화 상대를 옥무영으로 바꿨다.
"나도 이만 떠날까 한다."
"보중하시오."
옥무영이 담백하게 대꾸했다.
"목숨 반 개 빚졌다고 생각한다. 종남이든 누구든 아무 때나 빚 받으러 와라. 그리고 너, 도전은 언제든 받아주마."
말을 마친 강석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일행은 계속 북쪽으로 움직여 땅거미가 어둑할 무렵에 자무산에 도착했다.
거기엔 건물이 스무 채가 넘은 큰 규모의 장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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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년근 설련 뿌리를 받은 원경은 피 묻은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한테 가고, 구후영과 옥무영은 막불손과 함께 장원 중심에 있는 가장 큰 건물로 갔다.
"오랜만입니다. 옥 대협."
자비당慈悲堂 안에서 일행을 맞이한 건 놀랍게도 서른이 넘은 미부였는데, 옥무영과는 구면인 듯한 말투였다.
"종남 제자셨소?"
옥무영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제자는 아니고, 제 부군이 종남 장문입니다."
무당처럼 혼인을 금하는 도교 문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특히 명에 이르며 도사가 될 바엔 차라리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많아 도관을 물려주려면 혼인해서 자식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막불위가 부인이 있는 건 놀랄 일이 전혀 아닌데.
"그랬군."
옥무영은 여전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형님의 죽음을 미리 아셨소?"
오는 내내 침묵하던 막불손이 입을 열어 질문했다.
말투를 보면 질문이라기보단 추궁이 어울렸지만.
"시숙,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부터 나누는 게 예의 아닙니까?"
여인이 태연하게 대응했다.
"알고 있었군. 왜 말리지 않았소?"
막불손이 붉게 상기한 얼굴로 질책했다.
"다들 자리를 비워라."
여인의 말에 종남 제자들은 물론이고, 차를 끓이던 시녀들도 밖으로 나갔다.
"이분은 믿어도 되는 겁니까?"
여인이 구후영을 가리켜 물었다.
"구후영이오."
"낙화문 장문에 대유방 방주에 신검의 제자에 무당의 기명제자에."
여인이 중얼거렸다.
"천마의 제자라는 소문도 있고.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펼쳐 비겼고, 소림에서 원철의 여래신장을 이겼고, 백팔나한진도 파했다는 그 구후 대협인가요?"
"천마의 제자 빼고 다 맞는 말이오."
"그럼 믿어도 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아서 대화하지요."
여인이 상석을 차지하고 막불손이 동쪽에 앉고 옥무영과 구후영이 서쪽의 객석에 앉았다.
"내일부터 서안부에 소문이 퍼질 겁니다."
내내 태평스러웠던 것과 달리, 여인은 착석하기 바쁘게 본론에 들어갔다.
"화산이 마교한테 멸문당했고, 화산을 도우러 갔던 종남도 큰 피해를 보았다고. 종남 장문과 종남칠검은 물론 고수로 불릴 만한 자들이 다 죽었다고 말이죠."
"그게 무슨!"
조정은 종남이 강하든 약하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없앨 작정이다. 그런 상황에 약하게 보이면 상대가 바로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불손이 화내는 이유였다.
"그렇게 모든 이목이 화산에 집중될 거고, 사람들은 기종에 물을 겁니다. 마교를 어떻게 할 거냐고."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지?"
"목소리 낮추시지요."
여인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내 뜻이 아니라 장문의 유언입니다."
유언이란 말에 막불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종남을 버리고 청성으로 갑니다."
막불손이 조용해지자 여인이 말을 이었다.
"청성?"
옥무영이 중얼거렸다.
"부군은 장문이 되고부터 종남의 재물을 청성으로 이전했습니다. 전답은 물론이고 도관과 장원도 다수 사들였죠. 무당과 달리 청성은 쭉 전진교와 같은 계파였고, 명에 들어서 세가 약해진 탓에 우리의 결정을 두 손 들어 환영했습니다."
"확실하게 얘기하시오."
여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한 건 아니지만, 막불손은 확답을 원했다.
"우린 청성에 가서 청성파로 거듭날 겁니다. 물론, 우린 조정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지내야겠고,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어린 제자들만 청성의 이름으로 살겠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종남산을 버린단 말이오?"
막불손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전진교가 세워진 건 산동이죠. 중양 진인께서 우화한 곳은 곤륜이고요. 종남은 그저 장춘 진인의 용문파가 자리 잡은 곳이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종남산이 아니라 용문산에서 시작했죠."
"그래도."
"금선이 탈각할 땐 늘 허물을 남기는 법이죠. 부군을 따라 동창에 머리를 숙인 자들이 종남에 남아서 종남파의 명맥을 유지할 겁니다."
"그럼."
"맞습니다. 옥석을 가리기 위함이죠. 동창과 손잡은 건."
자세히 설명한 건 아니지만, 구후영도 옥무영도 대화의 맥락을 알아채고 더없이 놀랐다.
'막 장문은 실로 어마어마한 그림을 그렸구나.'
막불위는 동창에 고개를 숙였다. 그에 저촉해 반발하는 자도 있고 적극적으로 따르는 자도 있었다.
'화산에 데려간 제자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분부하신 일을 처리했습니다."
문을 두드린 자가 문밖에서 말했다.
"시신들을 화산까지 운반해라. 기종한테 안 걸리게 서둘러야 한다."
"무슨 시신을 말하는 거요?"
옥무영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화산에서 죽어야 할 자들의 시신입니다."
여인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약으로 재워서 고통 없이 죽였으니 너무 가슴 아파하진 마십시오. 옥 장문."
대화를 듣던 구후영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말렸다.
'내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
마음 같아선 벌떡 일어나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며 손가락질하고 싶지만, 구후영은 꾹 참아냈고.
"아무리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동문인데."
도리어 옥무영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교의 손을 빌려 검종을 제거하고, 거기에 자신을 도운 마교를 조정에 팔아넘긴 기종만 하겠습니까."
여인도 살짝 화났는지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계획을 세운 장문이 목숨으로 사죄했으니 할 도리는 다했다고 봅니다."
"사형. 얘기를 마저 들어보시죠."
의외로 구후영이 침착하자 옥무영도 마음을 수습했다.
"그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부군은 청성으로 이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동창에 고개를 숙인 건 옥석을 가리기 위함이었고요."
분위기가 수습되자 여인이 설명을 재개했다.
"원래는 반대파를 숙청하는 척하면서 야금야금 청성으로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약 칠 년을 생각하고 계획을 짰는데, 얼마 전에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상대가 어떻게든 안 들키려고 모진 애를 썼지만, 정보의 출처가 기종임을 결국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칠 년의 기간을 확 줄이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안물도 같은 편이오?"
구후영이 질문했다.
"세 분이 고루관으로 간 사실을 알린 사람이 안물인 건 맞는데, 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안물이 소식을 전한 일이나 세 분의 출현은 우리한테도 의외였습니다."
'대단하군.'
그 짧은 사이에 계획을 바꾸고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하자, 막불위에 대한 감탄이 한결 커졌다.
- 작가의말
메이저리그를 보면 팀들이 가끔 연고지를 이전하는 일이 있습니다. 최강의 쓰리 피치를 자랑하는 종남 역시 강타자가 즐비한 중원 리그를 떠나 사천 리그에 안착하려 합니다.
사천 리그엔 마찬가지로 투고타저인 당문이 있고, 타격에 일가견이 있으나 투수는 평범한 아미가 있죠.
지구 우승 정도는 노려볼 만한 괜찮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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