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각신참鬼刻神劖
시인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마음 깊은 곳의 속삭임을 끄집어낸다. 화가는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도화지에 기록한다.
만균은 그저 이쁘기만 하던 비취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허!"
왕가장에서 만균의 물건을 경매한다는 말에 찾아온 사람들이 경악한 나머지 한 마디 감탄밖에 뱉어내지 못했다.
"이게 진정, 진정 사람의 솜씨인가?"
비취를 공개하기 전에 따른 차가 다 식고 나서야 누군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경매물 소개를 하겠습니다."
경 총관이 데려온 경매 진행자가 신나서 입을 열었다. 보통은 가격을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해 엄선한 단어를 이용해 일장 연설을 해야 하는데, 이번엔 그냥 헛기침 몇 번 하고 경매를 시작해도 될 지경이다.
"이 조각은 분재 형태를 취했습니다. 사시장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분재를 표현하기에 비취라는 존재는 참으로 적합하지 않습니까?"
경매 진행자는 말을 잠시 끊고 사람들 눈치를 봤다. 다들 비취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이 뭐라 하는지 관심이 전혀 없음을 확인한 진행자는 소개말을 최대한 생략했다.
"밑에 분재 모양은 글자 명皿입니다. 위에 글자는 고夃인데 이쪽에서 보시면 풍風 같고 저쪽에서 보시면 월月 같습니다. 합치면 영盈인데, 젊음이 넘치고 풍월도 넘치라는 좋은 뜻을 담았습니다."
만균의 솜씨는 진짜 대단했다. 잘 다듬은 비취는 받은 빛을 특정 부위에 모았는데, 빛 때문에 획이 흐려지면서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글자가 되었다.
"다들 마음이 급하신 듯하니 바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최초 경매가는 일단 백 냥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천 냥!"
경매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비취를 공개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진행할 건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비취에 정신이 빠져 다 까먹었는지 진행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천 냥을 부르는 자가 나타났다.
"저런 천박한 자는 경매에서 빼야 하는 거 아니오? 물건 가치도 모르는 놈이 어디서 감히. 난 이천 냥."
귀한 물건을 사려면 가격도 가격이지만, 주인의 환심을 사야 한다. 경매는 사실 주인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가격이 높은 자가 물건을 얻는 방식인데, 이천 냥을 부른 자는 습관적으로 천 냥을 부른 자를 깎아내려 주인한테 잘 보이려 애썼다.
다들 가면을 써서 서로 신분을 모르는 상황에 위험한 인물을 잘못 건드리는 걸지도 모르니, 비취를 갖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한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잠시만요. 두 분 일단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신분을 밝히는 분은 당장 경매에서 제외됩니다. 신변 보호를 위한 조치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라고, 경매는 가격을 높이 부른 사람이 이깁니다. 그러니 귀물을 얻으려면 상대보다 높은 가격을 부르면 됩니다."
"이천오백 냥."
가면을 쓴 둘이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딱 들어도 늙어 보이는 목소리가 오백 냥을 추가했다.
"삼천 냥 부르겠소."
관공 가면을 쓴 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가격을 올렸다.
"삼천이백 냥."
제일 처음 입을 열었던 자가 말했다.
"삼천삼백 냥."
이천 냥을 불렀던 자가 백 냥 올렸다.
"제길."
제일 먼저 입을 열었던 자가 화를 버럭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 총관의 눈치를 받은 작은 총관 중 하나가 황급히 달려가 화가 꼭두에 치민 손님을 방으로 안내했다.
경매가 끝나기 전엔 누구도 왕가장을 떠나선 안 된다.
"사천 냥."
쟁반 위를 구르던 옥구슬이 부끄러워 멈출 정도로 맑고 고운 소리였다. 다들 몸매를 가리는 펑퍼짐한 옷에 얼굴에 가면도 써서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 구분도 어려웠는데,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리자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됐다.
"자. 진경 가면을 쓴 분이 사천 냥을 불렀습니다. 사천 냥 이상 부르는 분이 안 계시면 만균 선생이 상상품의 비취를 조각해 탄생한 저 귀물은 진경 가면을 쓴 분께 갑니다."
"사천백 냥."
누군가가 힘겹게 가격을 올렸다.
"오천 냥."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오천 냥으로 가격을 올려버렸다. 진행자도 깜짝 놀란 바람에 왕가장이 임시로 꾸민 경매장 안엔 거친 숨소리와 눈동자들이 분주하게 굴러다니는 소리밖에 없었다.
"오, 오천백 냥."
사정없이 떨리는 늙은 목소리가 백 냥 더 불렀다.
"육천 냥."
여인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육천 냥을 부르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육천 냥 나왔습니다. 더 부르는 분 없으면 이대로 경매를 마치겠습니다."
경매 금액의 일 푼을 받기로 한 진행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가장의 부름을 받고 소주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은자 이십 냥을 벌어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남아도 너무 남는 장사였다.
게다가 일 년에 몇 번씩 이런 경매를 할 예정이라는 경 총관의 귀띔도 있어 날개 없이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다섯까지 세겠습니다. 하나."
벌써 절반 정도 사람이 낙심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둘. 셋. 넷."
숫자를 세는 중 몇몇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진행자의 기대와 달리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다섯! 경매가 끝났습니다. 상상품의 비취를 만균 선생이 조각해 창조한 이 귀물은 진경 가면을 쓴 분께 낙찰되었습니다. 낙찰하신 분 빼고 남은 분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낙찰하신 분이 지급 능력이 안 되면 경매가 새로 진행될 거니까 방에서 소식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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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 소협. 보석이 더 있다고 하지 않았소?"
만균은 석가장으로 안 돌아가고 왕가장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맨날 구후영의 장원에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만 선생. 지금 당장 조각한다면 앞선 비취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비취 조각품이 너무 잘 나왔다. 당장은 어떤 조각을 하더라도 비취의 아류밖에 더 안 될 것이다.
"그게 어때서. 중원에 유명한 옥조가가 열 명은 되는데 다들 비슷비슷한 것만 만드오. 한 가지 형식을 나 정도 깊이로 표현하는 것만도 힘든데 왜 굳이 다른 형식을 추구해야 하오?"
만균의 말은 구후영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맞는 말이다. 모든 초식을 높은 경지로 익히기보단 예전처럼 손에 맞는 초식만 수련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때 곁에서 듣던 왕제상이 끼어들었다.
"여러 형식이 존재한다는 건 각자 장점이 있다는 뜻 아니오? 하나만 잘해도 괜찮지만, 다 잘하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왕제상의 말에 구후영의 마음이 또 흔들렸다.
'대형 말도 맞다. 초식 하나하나는 낙화검법의 검의를 일부만 표현한 거다. 낙화검법의 검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모든 초식을 능숙하게 펼쳐야 한다.'
"그런데 조각의 최고 경지가 어떤 건지 아는 사람 있소? 모든 형식의 조각법을 다 익히면 궁극의 조각이 나온다는 보장은 있고? 내가 잘하는 걸 쭉 잘하면 되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굳이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까지 더 잘하려고 애쓰겠소."
만균의 말은 구후영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검의에서 수많은 초식이 나왔고, 그러한 초식들을 통해 검의가 더 명확해진다. 검의를 파악해 초식을 더 잘 익히고, 초식을 잘 익혀서 검의를 더 절실하게 느낀다. 그런데 만약 낙화검법의 검의가 틀렸다면? 틀리지 않더라도 불완전하다면?'
초식과 기본기에 관한 고민이 낙화검법 자체의 완전성으로까지 번졌다.
"사람이 왜 그리 진취심이 없소? 사내로서 천하제일의 옥조가가 되고픈 마음은 전혀 없는 거요?"
"그러는 왕 공자는 진취심이 얼마나 강하오? 사내로서 되고 싶은 게 뭐요?"
맨날 같이 와서 자기들끼리 다투는 게 일상이기에 어린 제자들은 애초부터 관심을 끊고 수련에 열중했다.
구후영 역시 마음이 복잡해서 평소와 달리 말리는 시늉도 안 하고 고민에 빠졌다.
'뭔가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허허벌판이구나. 뭐가 있는지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막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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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놈입니다. 공자께서 부디 잘 이끌어주십시오."
똑같은 부탁을 몇 번이나 한 경 총관이 걱정 많은 뒷모습으로 돌아갔다.
"열정과 책임감으로 소임을 다해 여러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구후영의 수중에 큰돈이 생기며 총관이 필요해졌고, 왕제상의 추천으로 경 총관의 셋째 아들을 총관으로 들였다.
"잘 부탁하오."
총관이 되어 신났는지 어린 경 총관은 열의가 넘쳐났다.
"공자. 일지봉과 주변 전답을 사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이 돈으로 그게 되오?"
"일지봉은 이백 냥이면 됩니다."
일지봉이 큰 산은 아니지만, 고작 이백 냥에 거래될 정도로 작은 언덕도 아니다.
"일지봉은 현재 문서로만 주인이 존재합니다. 뇌물로 이백 냥만 뿌리면 이름을 공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관아 입장에서도 쓸모도 없이 그저 놀리는 땅으로 이백 냥이나 벌면 좋은 거죠."
일지봉의 소유주는 후계자도 없이 죽었다. 규정대로는 해당 땅을 관아에서 회수해야 하지만, 관리하기 귀찮아서 계속 죽은 사람 이름 아래에 뒀다.
"문제가 되진 않소?"
"매매 계약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소유주의 이름을 공자로 바꿀 뿐입니다. 왕가장을 비롯해 부자 대부분이 하는 일입니다. 일지봉이야 딱히 탐날 게 없어서 여태껏 누구도 관심을 안 줬던 것뿐이지요."
'하긴. 다들 정당하다면 굳이 암기술이나 독공이 나오지 않았겠지.'
부자들의 삶도 생사가 오가는 강호처럼 치열한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건 비슷했다.
"좋소. 그리 진행하시오."
성현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 같긴 하지만, 구후영은 신임 총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다음엔?"
"제가 며칠 전에 일지봉을 둘러봤습니다. 산 중턱에 있는 예전 터는 그냥 연무장으로 개조하고 더 높은 곳에 건물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턱까지는 완만하지만, 그 위는 산세가 가파르고 길도 하나밖에 없어서 더는 누군가가 몰래 기어들어 와서 불을 지르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산 아래 전답을 최대한 웃돈을 줘서라도 사들이고 소작을 줘야 합니다. 돈은 한 번 쓰면 사라지지만, 땅은 해마다 돈을 만듭니다. 주인에게 평생 소작하게 해준다고 하면 대부분 돈에 눈이 멀어 땅을 팔 겁니다. 이미 소작을 주고 있는 자들은 훨씬 설득하기 쉽지요. 가진 땅을 비싸게 팔아서 다른 데서 싼 땅을 사면 이득이니깐요."
구후영과 나이가 비슷하건만, 세상 사는 법은 누구보다 빠삭한 신임 총관이었다.
"돈이 총 얼마 필요하겠소?"
"일지봉이 이백 냥, 연무장과 장원은 이천 냥 정도면 됩니다. 전답은 돈 되는 대로 최대한 많이 사면 좋습니다. 소작은 나라 규정이 반만 가져오는 건데, 웬만하면 지켜야 합니다. 대신 돈이 생기는 대로 계속 전답을 사들여야죠. 가을에 수확할 때만 지켜보면 되니 수련에 별 지장도 없습니다."
신임 총관의 말을 듣던 구후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난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어.'
자신이 꽤 특출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공에 관해서도 견해가 확고했는데 요즘 계속 흔들리고 있다.
"재량권을 줄 테니 그대로 진행하시오."
구후영은 당분간 마음공부에 힘쓰기로 했다.
- 작가의말
옥조가는 보석 세공사와 비슷한 직업으로, 최초의 옥조가는 다름 아닌 전진교 3대 장문인 구처기입니다. 이 양반도 참 열심히 살았네요.
귀각신참은 귀신과 같은 조각 솜씨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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