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법太極拳法
장자庄子·대종사大宗師에서 이르길.
대도大道(진리)는 태극 위에 놓아도 높아 보이지 않고 육극六極 밑에 두어도 깊어 보이지 않는다. 천지天地보다 먼저 있었고 상고上古보다 오래다.
비록 대도를 찬양하는 말이긴 하지만, 동서남북과 상하로 세상의 끝인 육극과 함께 대도의 위대함을 논설하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 태극을 얼마나 높이 치는지 알 수 있다.
백 세에 권법을 창안한 장삼풍도 오랜 고민 끝에 태극권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태극이라고 부르기엔 한참 부족하나 후대에 정진하여 완성하길 바라는 마음에 감히 거룩한 이름을 빌리노라.
천하제일의 장법으로 불리는 대수인도 창안한 사람이 끝까지 익히지 못하고 후대에 대성한 자가 나왔다. 세상 사람은 장삼풍의 태극권을 두고 드디어 토번의 대수인에 대항할 중원의 무공이 나왔다고 입 모아 칭송했다.
"형님. 중심을 잡으셔야 합니다."
"중심? 부평초에도 중심이 있을까?"
부평초浮萍艸는 물에 떠 있는 잎 모양의 풀로 뿌리가 없어 물결에 따라 정처 없이 떠다닌다.
"형님. 부평초는 약재로 마진과 풍진에 쓰이고 몸이 붓고 오줌이 적을 때 약으로 씁니다. 인간에겐 네 가지 기운이 있는데 각각 원기元氣·종기宗氣·영기營氣·위기衛氣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원기인데, 원기는 신장에 깃들었습니다. 몸이 붓고 오줌이 적은 게 바로 원기에 문제가 생겨선데, 말린 부평초를 달여 마시면 원기를 조절합니다."
구후영의 말에도 청빈의 눈은 여전히 휑했다. 자신의 설득이 효과가 전혀 없어 보이자 구후영은 책략을 바꿨다.
"맹자께서 하늘이 사람에게 중임을 맡기기 전에 마음을 괴롭히고 몸을 고달피 하고 배를 허기지게 하고 힘을 쏙 빼놓아 하는 일마다 어렵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참을성을 키우고 마음을 단단히 하여 태어날 때는 없던 능력을 깨우치길 바라는 거라고 했습니다."
"안 죽여도 되는 거였어. 내가 자객 짓 하기 싫다고 말했으면 놓아줬을 거라고 했어. 아무리 그래도 십여 년을 동고동락했는데, 난 망설임도 없이 다 죽였어. 나 같은 놈한테 하늘이 무슨 중임을 맡기겠어? 사람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놈인데."
그제야 구후영은 청빈의 심결心結이 무엇인지 알았다. 청빈은 구후영처럼 단단하지 못해 악인을 죽인 거로 고통받고 있다.
'일단 돌을 던져서 파문이라도 일으켜야 한다.'
"형님이 몸담은 곳이 칠살문의 무당 분파라는 사실은 알았습니까?"
"응? 칠살문?"
구후영은 자신이 아는 칠살문에 관한 정보와 유추한 내용까지 청빈에게 들려줬다.
"칠살문은 중원 전역에 넓게 퍼진 자객 조직입니다. 그런데 형님을 곱게 놔줬을 거라고 믿습니까? 형님을 방심케 해서 죽이려는 시커먼 속셈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형님을 찾는다는 말에 칠살문 소속들이 미혼향으로 절 쓰러뜨려 납치하려 했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청빈의 눈이 조금씩 생기를 찾아갔다.
"칠살문은 억울한 자의 한을 풀어주는 조직이 아닙니다.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조직입니다. 당연히 돈 많은 자들의 뜻에 따라 사람이 죽어 나가지요. 그걸 막는 일을 형님이 해야 합니다."
청빈은 순수한 물이어서 쉽게 물든다. 처음 만난 구후영의 말에 쉽게 설득됐던 것도 타고난 성격 때문인데, 지금 역시 구후영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깊이 감화했다.
"아우. 내가 아우처럼 현명하면 얼마나 좋을까?"
구후영에게 좋은 말을 듣고 결심을 내렸지만, 뭔가 구체적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막연히 같이 일하던 자객들을 죽이고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죽이고 나니 다른 때보다 기분이 훨씬 더러웠다. 거기에 정학에게 쇄악곡에 잡혀 와서 장삼풍의 두 제자의 옳은 말씀만 듣다 보니 자신이 천하에 둘도 없을 오물처럼 느껴졌다.
"형님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늦지 않게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고 한 형님이 대단한 겁니다. 다른 사람은 흐르는 대로 살려 하지만, 형님은 어려움을 알면서도 잘못된 흐름을 역행하려 했잖습니까. 어서 강이 시작하는 곳으로 돌아간 다음 옳은 흐름을 타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청빈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고 눈에도 생기가 넘쳐났다.
'애막대어심사哀莫大於心死(마음이 죽은 만큼 슬픈 일이 없다)라더니, 여길 오길 참 잘했어.'
구후영 덕분에 기운을 차린 청빈은 태극권의 수련에 몰두했다.
"협객 아이도 배우고 싶지 않아?"
청빈의 수련을 지켜보던 정학이 불쑥 얘기했다.
"저는 다른 문파 소속인데 어찌 감히 무당의 절기를 탐하겠습니까."
"대수인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면 아무나 배울 수 있다. 태극권도 마찬가지다. 굳이 시험도 필요 없다."
"왜 그런 겁니까?"
"태극은 음양의 균형이다. 음양이 태극을 이루면 극선과 극악이 사라지고 세상도 평화로워진다."
'성현들이 세상이 좋아지길 바라면서 훌륭한 가르침을 많이 남긴 것과 같은 마음이시구나. 그러나 세상은 성현들의 말씀대로 흐르지 않았지.'
구후영은 장삼풍의 큰마음에 탄복했으나, 그 뜻엔 공감하지 않았다.
"나도 알아. 사부 생각대로 되기 힘들다는 걸."
구후영은 마음이 읽혔다는 생각에 살짝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와 노력으로 세상이 좀 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어린아이 같은 정학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큰 울림이 있었다.
"성현들도 세상이 좋아지길 바라면서 훌륭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걸 따르는 사람이 있고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니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좋아진 거겠지요. 크게 배웁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은 정학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사부가 아닌데 큰 가르침을 내린 사람에게 올리는 예다.
"협객 아이는 착하게 살아서 세상 사람의 본보기가 돼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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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태극은 음양입니다. 상체를 움직일 땐 중심을 오히려 낮춰야 합니다. 하체를 움직일 땐 몸을 가벼이 해야 합니다. 발이 빠를 땐 몸이 오히려 느려야 하고, 주먹을 내지를 땐 중심을 뒤로 해야 합니다."
"타격할 땐 주먹에 체중을 실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건 누구와 싸우는 무공이 아닙니다. 자신과 싸워 음양의 균형을 찾아 태극을 이루는 무공이지요. 태극권은 상승常勝(늘 이기는)이 아니라 불패不敗의 무공입니다."
"내가 아직도 살심을 다 못 버렸구나. 널 보기 부끄럽다."
정학이나 두 도사의 가르침은 너무 어려웠다. 다행히 구후영이 쉽게 말해준 덕분에 청빈의 태극권 성취는 점점 높아졌다.
게다가 구후영과 청빈을 따라 태극권을 열심히 수련하는 자가 계속 늘어서 정학과 두 도인의 마음을 흡족게 했다.
"으허허헝."
어느 사내가 태극권을 수련하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어찌나 슬피 우는지 구후영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따라서 다른 사내들도 울기 시작했고, 청빈 역시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그때, 정학이 기척 없이 다가와 질문했다.
"협객 아이야. 태극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구후영은 자신이 아는 태극에 관한 글귀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거기에 답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태극은 완전한 균형이다. 넌 상하의 균형에 너무 집착하는구나. 대부분 무공과 다른 부분이니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좌우의 균형과 전후의 균형은 아예 잊고 있구나."
정학은 평소 어린아이 같지만, 태극권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만 내용도 말투도 어른스러웠다.
'기본!'
유일검법을 꼬박꼬박 수련하면서 기본기의 중요함을 잊지 말자고 그토록 다짐했는데, 태극권을 익히면서 또 까먹었다.
'기본을 하고 거기에 특이한 걸 얹어야지. 특이한 거에 정신이 팔려 광대춤을 췄구나.'
청빈의 부족함을 지적할 땐 그렇게 말이 술술 나왔는데, 정작 자신도 허점투성이였다.
"협객 아이야. 욕심을 버려라. 태극권은 그냥 무공이 아니다. 안에 사람이 있고 세상이 있다."
구후영은 눈을 감고 생각을 지웠다. 하나둘 차례대로 지우고 태극 하나만 남긴 다음, 며칠 동안 익숙해진 태극권의 투로套路(정해진 동작)를 펼쳐나갔다.
태극권을 수십 번 반복해 펼친 구후영이 눈을 뜨고 정학에게 질문했다.
"어떻습니까?"
"네가 보이는구나. 참으로 어질게 살았더구나. 계속 그리 살아라."
정학의 말에 구후영의 눈에서 눈물이 샘처럼 솟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치려 했으나 속에 무슨 서글픔이 그리도 많았던지 눈물 줄기가 오히려 더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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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름을 태극권이라고 지은 겁니까? 제가 보기엔 장법이나 지법도 섞인 거 같은데."
"원래 명칭은 태극추수太極推手였다. 그런데 사부가 오행을 섞으면서 이름을 태극권으로 바꿨다."
"오행이요?"
"주먹은 권심拳心·권배拳背·권면拳面·권안拳眼·권륜拳輪으로 나뉜다. 이를 오행이라고 하니 태극권 전체의 음양 중에 주먹에만 오행을 심은 것이다. 무공이 아니면 전해지지 않고 익히는 자가 없을 테니까."
구후영은 애석함을 느꼈다.
'높은 이치와 숭고한 마음으로 만든 건데 무공이 아니라서 익히는 사람이 없을까 봐 무공으로 바꿨다니.'
"그나저나 협객 아이 덕분에 내가 호사구나."
구후영이 쇄악곡으로 온 지 달포밖에 안 됐는데 벌써 태극권을 익힌 자가 셋이나 생겼다.
지난 이십 년 넘은 기간에 태극권을 익혀낸 자가 고작 셋인 걸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가 뭘 한 게 있습니까?"
"네가 올바르게 단단하니까 기운이 약한 자들이 절로 감화한 거 아니냐. 네 태극권이 바르고 또 바르니까 저 삐뚤어진 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세운 거 아니냐."
한편.
둘과 불과 스무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른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소인은 다시 돌아오고 싶습니다."
태극권을 익혀 쇠사슬을 제거하고 피파골도 치료받은 자가 말했다.
"잘못을 빌어 용서를 받은 다음 여기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밖으로 나간 다음 마음이 바뀌어도 책망하지 않으마. 단, 악행을 다시 저지를 경우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을 내릴 것이다."
도인의 말에 사내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젠 소인이 한 짓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만에 하나 불측한 생각이 생기면 신선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제 손으로 명줄을 끊겠습니다."
"그럼 어서 떠나려무나. 그리고 이 말을 명심하여라. 아무도 모르게 저지르는 악행은 없다. 적어도 네가 알고 하늘이 보고 있다."
세 번째 사내는 노잣돈을 받아 품에 챙긴 후 두 도인과 정학 그리고 구후영에게 큰절 하나씩 올리고 떠났다.
"저도 심사받겠습니다."
드디어 청빈이 마음을 굳혔다. 구후영은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청빈이 태극권을 펼치는 모습을 봤다.
청빈은 열과 성을 다했으나 동작이 몇 군데나 틀렸고 중간에 비칠거리기까지 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드는데.
"합격."
도인이 인정했다.
"동작 말고 마음을 봐. 저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태극권을 펼쳤는지."
'세 분은 진심으로 세상을 위하고 계시는데, 난 여전히 형식에 얽매여 있었구나.'
"형을 제대로 익히는 건 최저 기준이야. 자객 아이는 그걸 훌쩍 넘었어."
- 작가의말
이 말을 명심하여라. 아무도 모르게 저지르는 악행은 없다. 적어도 네가 알고 CCTV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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