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신마天降神馬
천마내자월지굴天馬來自月支窟
하늘의 말은 월지굴이란 나라에서 왔는데,
배위호문용익골背爲虎文龍翼骨
등은 호문 같고 어깨뼈는 용 같다네.
시청운嘶靑雲 진녹발振綠髮
울면 하늘의 구름이 떨고 달리면 푸른 갈기 나부끼는데,
난근권기주멸몰蘭筋權奇走滅沒
난근이 단단하고 잘 달려 어느새 사라진다네.
등곤륜騰崑崙 역서극歷西極
곤륜을 오르고 서역 끝까지 달리는 동안,
사족무일궐四足無一蹶
발 한 번 헛디딘 적 없다네.
단아의 등에 손을 대고 운기하는 구후영의 얼굴엔 땀이 줄줄 흘렀다.
'이대로는 둘 다 위험하다.'
이젠 단아뿐이 아니라 원경도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그나마 몸이 강건하여 여태껏 버텨왔던 건데, 오랜 기간 물과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탓에 끝내 내상이 악화했다.
문제는 단아와 달리 원경은 구후영이 손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거였다.
'다들 지칠 대로 지쳤고.'
말을 전부 잃은 지금, 구후영이 원경을 업고 단아를 안은 채 달렸다. 다른 사람은 못 쉬고 못 먹고 못 마신 탓에 사람 둘을 짊어진 구후영을 쫓아가는 것조차도 벅찼다.
짐까지는 아니지만, 별 도움이 안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구후영이 일행을 버리고 먼저 갈 수 없는 게, 야효가 곁에서 시시각각 방향을 알려주지 않으면 언제 이상한 곳으로 샐지 모른다.
'그렇다고 한 명을 버릴 수도 없고.'
유일한 방법은 원경과 단아 중 한 명을 포기하고 대신 야효를 업고 뛰는 건데, 구후영은 그런 모진 결정을 차마 내릴 수 없었다.
"이만 출발할까요?"
물에 적신 천으로 원경의 몸을 문지르던 모용연이 말했다. 일행 중 체력이 가장 약한 사람을 뽑자면 당연히 모용연인데, 놀랍게도 구후영 다음으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때.
두두두 소리가 조금씩 커지며 땅이 울렸다.
"초원 부족인가?"
며칠 전에 마지막 말을 잃고 어떻게든 초원의 부족을 만나려고 애썼지만, 양들이 겨우내 남쪽의 풀을 다 먹어 치운 바람에 대부분 부족이 북으로 향했다.
그 탓에 상당히 고생한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부족에 위험하거나 성가시단 걱정보단 말을 구할 수 있단 생각에 오히려 기뻐했다.
그러나.
땅을 흔들며 나타난 건 어마어마한 규모의 야생마 무리였다.
"아니, 저, 저건."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말의 모습에 장선이 놀라움에 겨워 말을 맺지 못했다.
만 필이 넘은 야생마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보는 사람마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감탄하는 혈총과 비교해도 몇 뼘은 더 높은 체고에 몸길이도 반 정도 컸다.
어찌나 빠른지 갈기가 곧게 설 정도였고, 꼬리도 과장 조금 보태면 수평으로 빳빳이 펴진 수준이었다.
특히 맑고 깊은 가을 하늘이 생각날 정도로 푸른 털빛이 눈에 띄었다.
"말로만 듣던 청총인가?"
장선이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야효가 손뼉을 짝 쳤다.
"말 두 필만 얻어도 현월궁까진 걱정이 없겠습니다."
생포한다고 쳐도 안장이나 고삐가 없는 건 물론이고 조련을 거치지 않은 야생마가 일행의 생각대로 움직여줄지 등 커다란 문제점이 잔뜩 남았으나, 일행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근데 어떻게 잡지?"
구후영이라면 힘으로 한 마리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남은 일행은 지칠 대로 지쳤고, 설사 지치지 않았더라도 맨손으로 거친 야생마를 잡을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한 마리만 잡아도 됩니다. 우호법이 탈 말만 있으면 되니깐요."
모용연의 말에 다들 기뻐하며 야생마를 어떻게 잡을지에 관해 자신이 아는 바들을 토로했다.
그러나 일행의 야생마 포획 계획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푸르륵.
갑자기 질주를 멈춘 야생마 무리가 흩어져 한가하게 풀을 뜯었고, 무리를 이끌던 청총은 겁도 없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볍게 달려왔다.
일행은 굴러 들어온 청총이 갑자기 발길을 돌릴까 봐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킁킁.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다가온 청총이 한참 코를 씰룩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구후영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가볍게 비볐다.
"아는 말이야?"
그 모습에 장선이 멍청한 얼굴로 질문했다.
"어쩌면."
뜬금없는 호감 표시에 어리둥절해 있던 구후영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혈총이 청총과 대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야효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들어서 아는데, 임신한 대완마가 주인에게 돌아간 후 새끼를 낳았습니다. 사람도 아닌 말이 어떻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끼 냄새를 압니까."
단아의 지시로 구후영의 행적을 조사했던 야효기에 혈총의 이야기는 누구보다 자세히 알았다.
"그럼 이건 뭔데."
"하늘이 우리가 기특해서 말을 내려준 거겠죠."
장선의 트집에 말이 궁했던 야효가 아무 소리나 뱉었다.
"맞아요. 하늘이 내린 말이 틀림없어요."
그런데 그 말에 모용연이 혹했다.
"원경 대협과 단 소저를 살리라고 하늘이 돕는 게 분명해요."
#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청총이 구후영의 몸에서 혈총의 체취를 느꼈을 수도 있고, 모용연의 말대로 하늘이 돕는 걸 수도 있고, 우연히 구후영 몸에 말이 좋아하는 냄새가 배었을 수도 있고.
중요한 건 현실이다.
청총은 원경을 업고 단아를 안은 구후영을 등에 태우고도 작은 흔들림 하나 없이 달렸고, 사람을 태운 청총을 더는 따르지 않는 대부분 말과 달리 망아지 몇 마리가 쫓아왔다.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망아지들도 장선 등을 태우고 청총의 뒤를 따라 초원을 달렸다.
사실 마음 같아선 청총이 야효를 태우고 구후영이 달렸으면 싶었지만, 청총이 야효를 태우길 강력히 거부했다.
다행인 건 청총이 따라온 망아지들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원경과 단아가 아픈 걸 아는 건지 무작정 달리지 않았다.
"저기 어렴풋이 보이는 게 음산입니다."
"얼마나 더 가면 되겠소?"
구후영의 질문에 야효가 잠깐 말이 달리는 속도를 가늠했다.
"밤에 쉰다고 해도 내일 오시 전에 도착할 겁니다."
야효의 대답에 일행은 잠시 피로를 잊었다.
#
"네가 어떻게?"
청총을 타고 나타난 구후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현월궁의 무사들이 뒤늦게 야효를 발견했다.
"이분은 홍엽산장의 장주이자 대유방의 방주이자 낙화문의 문주이며, 무당 현현 진인의 기명제자이자 대명 황제를 치료한 신의 구후영 대협이시다."
야효가 얼마 안 남은 힘을 모두 끌어내 호통쳤다.
"어서 궁주와 장로들께 알리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야효가 나서자 시답잖은 표정이던 무사들이 구후영이란 이름에 깜짝 놀랐다.
"그대가 진짜 구후 대협이오?"
"그렇소."
구후영의 대답에 무사 세 명이 경공을 펼쳐 산 중턱으로 달렸다.
'저기가 현월궁인가.'
이름뿐이었던 대별산의 백화궁과 달리, 현월궁은 진짜 궁궐이 있었다.
그것도 가파른 절벽 중턱에 자리해 웬만한 경공으론 오르내리는 것조차 버거운, 음산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희고 검은 바위를 다듬어서 지은 멋진 궁궐이었다.
'서둘러라.'
나무로 짠 커다란 광주리에 앉아 도르래를 타고 올라가는 사내들의 모습을 보며 구후영은 조바심을 냈다.
원경과 단아의 상세가 당장 치료해야 할 정도로 다급한 정도는 아니지만, 내상은 늦게 치료할수록 후환이 무궁하다.
"온다."
구후영의 조급한 마음을 알았는지 십수 명의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과 네 명의 얼굴을 드러낸 여인이 발로 절벽을 차며 내려왔다.
'모두 청풍불의공을 익혔구나.'
아무한테나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으니 저들은 현월궁의 중진이 분명하다.
'최고 아니면 최악인데.'
손님 맞이하러 십수 명이나 나온다는 건 큰 호감이 있거나 크게 경계한다는 뜻이다. 호감이냐 경계냐에 따라서 구후영에겐 최고이거나 최악이 될 것이다.
"오, 구후영 맞네."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면사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인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목소리에 섞인 반가움을 감지한 구후영은 몰래 속을 쓸어내렸다.
"천산에서 뵈었던 분이군요. 별래무양하셨습니까."
구후영이 공손하게 인사하자 현월궁 일행이 하나같이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무양하지. 우린 구후 대협과 달리 조용히 살잖아."
마교에서 일면식이 있었던 셋째 궁주가 다가와 구후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면식이 있다곤 하나 면사로 얼굴을 가렸었고 대화 한 마디 나눈 적도 없었음을 생각하면 의심할 여지 없는 커다란 호의였다.
"난 현월궁의 대궁주요."
장로 중 일부는 한쪽에 우뚝하니 서 있는 청총의 모습에 눈길을 빼앗기기도 하고, 일부는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부산스러웠으나 대궁주가 나서자 곧 조용해졌다.
'단아의 모친이군.'
숨을 깊이 들이쉰 구후영이 최대한 평이한 말투로 대답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구후영입니다."
"강호의 기수 구후 대협께서 한미한 곳엔 무슨 일이시오?"
강호의 기수旗手.
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강호의 행방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심지어 장삼풍도 얻지 못했던 호칭으로, 가장 최근 이렇게 불렸던 사람은 다름 아닌 천강구절이었다.
"과분한 호칭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생이 귀궁을 찾은 건 다름이 아닌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구후영의 말에 대궁주가 흥 코웃음을 쳤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단오독의 처방을 배포한 목적이 뭔지 궁금했는데, 이러려고 그랬군."
'내게 호의를 보였다는 건 현월궁도 나한테 바라는 게 있단 말이다.'
예전이었으면 그저 측은지심에 지나치지 못했을 뿐 어떤 의도도 없었다고 변명부터 했겠지만, 그간의 역경으로 구후영도 많이 성숙했다.
"본의는 아니나 귀궁에 큰 폐를 끼쳤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장로들이 기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대궁주는 여전히 얼굴을 풀지 않았다.
"현월궁의 밥줄을 끊어놓은 걸 어떻게 보상한단 말이오?"
"이미 복안을 갖고 계신 듯한데, 그냥 말씀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 용건이 조금은 급한 거라서 말입니다."
구후영의 말에 대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 나도 내 생각을 기탄없이 밝히겠소."
대궁주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작게 탄식하고 말을 이었다.
"대협이 처방을 배포한 바람에 현월궁은 더 이상 음산에서 살아가기 힘들게 됐소. 그만 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구후 대협의 전폭적인 도움을 바라오."
구후영이 고개를 돌려 장선을 바라봤다.
"대유방과 홍엽산장의 재력이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요."
장선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홍엽산장이 보유한 산에 장원 하나 크게 지어주거나 일지봉을 내주면 그만이다.'
그에 대궁주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분은 본 궁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소. 구후 대협은 현월궁이 살아갈 터전을 내주는 건 물론이고 강호의 칼날도 대신 막아줘야 하오."
"저기 두 사람만 살리면 더한 요구라도 들어드리지요."
구후영은 급한 마음에 대궁주의 요구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본궁은 배신자를 치료하지 않소."
대궁주가 예상하지 못한 단호한 얼굴로 거절했다.
"이는 천 년 넘게 전해온 현월궁의 법이오. 아무리 내가 대궁주라고 해도 궁의 법은 어길 수 없소."
- 작가의말
월지굴 - 비단의 길 돈황 근처에 있었으나 흉노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까지 도주한 나라.
호문 - 한나라 무관 복장. 색이 화려함.
난근 - 말의 눈 위 힘줄. 난근이 발달하면 준마라는 설이 있음.
권기 - 잘 달린다는 뜻.
주멸몰 - 너무 빨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뜻.
글 서두의 시는 이태백의 천마가天馬歌의 일부였습니다. 당나라 황제가 듣자마자 막 말이 달리는 장면이 떠올라 좋아 죽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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