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말살武林抹殺
이이원상초離離原上草
벌판의 무성한 풀은,
일세일고영一歲一枯榮
해마다 한 번씩 시들었다 피는구나.
야화소부진野火燒不盡
들불이 태워도 다 사라지지 않고,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
봄바람 불면 또 생겨나는구나.
초원의 풀이 아무리 태워도 사라지지 않는 건, 뿌리만 있어도 언제든 잎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 화마가 사라진 땅에 씩씩하게 싹을 틔워 초원은 어떤 역경을 겪어도 푸르름을 회복한다.
그렇기에 무림말살지계는 언뜻 허황하게 여겨졌다.
황궁서고에서 서창이 작성한 계획서를 모두 찾아내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람이 이리도 악독할 수 있구나."
신장 정도의 무인이면 마음의 수양이 얕지 않을 텐데, 계획서를 읽고 격동을 멈추지 못했다.
"용의가 불순하긴 하나, 효과적인 방법이란 건 부정할 수 없군요."
단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실행하기에 어려움이 꽤 크나, 저대로 된다면 정말 무림이 말살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구후영도 혀를 찼다. 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서창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면 수많은 무인이 죽었을 것이다.
"천강구절이 마교로 안 갔으면 이 계획서대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겠소."
홍기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무공을 익혀 강한 무력을 갖춘 무인은 말할 것도 없다.
서창이 사십 년 전에 시작해 십여 년에 걸쳐 작성한 무림말살지계는 문파 안에서 분열을 조성하고, 같은 지역에 있는 문파와 문파 사이를 이간질하고, 지역과 지역 사이에 분쟁을 유도하는 것으로 강호에 거대한 전쟁을 일으키는 방식인데, 그 수단이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목표가 된 무인을 직접 상대하는 대신, 무인의 부모나 형제나 자식을 해하는 거로 분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렇게 무수한 분란으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마교와 중원 무림의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재물을 탐하는 자에겐 돈을, 명예욕이 강한 자에겐 명성을, 출세에 눈먼 자에겐 벼슬을 약속하고, 힘이 부족해 복수하지 못하는 자에겐 마교와 싸워 공을 세우면 강한 무공을 준다고 하고, 복수의 대상이 된 자에게도 공을 세우면 상대를 제거해준다고 한다.
당시 마교는 이미 강노지말이지만, 중원의 무인들도 한마음이 될 수 없기에 최대한 처절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무인을 천산에 몰아넣어 최대한 많이 죽이는 게 무림말살지계의 최종 목표였다.
그런데 천강구절이 명교 교주가 되자 이 계획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강구절 아래 한마음 한뜻으로 합친 마교를 상대로 중원 무림이 지기라도 하면 천하에 대란이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는 이 계획이 현재도 충분히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성지화星星之火 가이요원可以燎原.
작은 불꽃이 초원을 휩쓰는 큰불을 일으킬 수 있다.
거기에 서창처럼 치밀한 세력이 기름을 뿌리고 부채질까지 한다면?
"아무리 서창이어도 동시에 이리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구후영의 말에 단아가 고개를 저었다.
"구후 공자는 세 개 세력을 잊고 있습니다."
"어떤 세력이오?"
홍기영이 궁금이 가득한 얼굴로 질문했다.
"첫 번째는 하오문입니다."
하오문은 무력이 강하지 않다. 그러나 무인이 아닌 그 가족을 노리는 거라면 하오문의 능력으로도 차고 넘친다.
더구나 하오문은 소문을 퍼뜨리는 솜씨가 대단하다. 돈만 넉넉히 주면 원하는 소문을 며칠 사이에 천 리 밖까지 널리 보낼 수 있다.
"두 번째는 개방입니다."
송나라 때의 개방은 금나라에 땅과 재산을 뺏긴 자들이 주축이었다. 이름만 거지의 무리지 학식이 풍부하고 강한 무공을 익힌 자가 꽤 많았다.
그러나 일부러 거지가 되고픈 사람이 없어 서서히 몰락했고, 명나라가 드는 과정에 뜻있는 자들이 홍건군에 가담하면서 개방의 이름은 강호에서 사라졌다.
현재 개방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떼가 꽤 있긴 하나, 송나라 때의 개방과는 거리가 먼, 오합지졸이라는 표현도 아까운 무리다.
"개방의 무공은 대부분 실전됐지만, 독으로 사람 죽이는 재주만큼은 여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뱀, 전갈, 거미 등 극독을 품은 독물은 웬만큼 깊은 숲에만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무공을 익히는 거야 힘들기도 하고 재능도 필요하지만, 독물을 다루는 건 필요한 지식과 어느 정도 담력만 있으면 된다.
"하오문조차 안 받아준 바람에 말 그대로 의지할 데 없는 놈들이죠. 게으른 데다가 배우지 못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줄 모르는 무리라 적당한 이득만 주면 시키는 대로 생각 없이 따를 게 분명합니다."
거지가 없는 곳은 없지만, 세력 자체는 하오문보다 약하다. 그러나 악독하기를 따지면 하오문을 몇 배 능가하는 작자들이다.
"이 둘 외에 또 있습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단아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마지막은 칠살문입니다."
이들은 하오문이나 개방보다 비싸지만, 그만큼 쓸모가 많다. 게다가 들켜도 계획에 전혀 차질이 없다. 누군가가 자객을 보내 자기 주변의 사람을 해치려 하면, 당연히 평소 불화가 있던 자를 의심하게 된다.
"서창과 칠살문 사이에 연계가 있습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단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서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의심스럽습니다."
목적을 위해 어떤 비열한 수단도 불사不辭하는 서창이 칠살문과 아무런 연계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제가 찾은 문서들을 보여드릴게요."
단아는 자신이 찾은 문서들을 펼쳐 그간 서창이 하오문이나 개방을 이용해 여러 지역에 분쟁을 일으킨 사건들을 둘에게 보여줬다.
"놈들은 연습한 겁니다. 여러 시도로 무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사태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일일이 기록하여 분석했습니다."
"누굴 해치기 위해 이리도 노력하는 자들이 있다니."
홍기영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탄했다.
"어쩌면 저들에겐 이게 하나의 놀이일지도 모릅니다."
단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세당해 오욕칠정이 온전치 못한 놈들이라, 권력욕이 강하고 가학적입니다."
'태극을 이루지 못하여 원만치 않으나 파괴력은 오히려 강하다.'
단아의 말에 문득 태극혜검의 깨달음을 떠올리던 구후영의 생각은 황제에 미쳤다.
'황제는 뭐가 부족해서 신선이 되려 했을까? 말 그대로 천하의 주인이나 다름없는데.'
구후영은 생각이 깊어질수록 세게 흔들렸다. 석 달 기간 수십 명의 무당 장로와 매일 설전을 벌이면서도 꿋꿋이 견지했던 태극에 관한 견해에 미세한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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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의 복잡한 사정과 심정과 별개로, 황제의 치료는 이렇게 우여곡절이 없어도 되나 싶은 정도로 순조로웠다.
덕분에 황후와 태자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공현이 구후영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갈수록 친근해졌다.
"태의, 긴히 할 말이 있소."
건청궁을 벗어나기 전에, 공현이 사람을 모두 물리고 구후영과 독대했다.
"무슨 얘긴데 이리도 비밀스럽소."
무림말살지계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웠던 구후영은 공현의 독대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면사금패 이야기는 내가 이미 마마께 말씀드렸소. 태자 전하도 나랑 같은 뜻을 황후 마마께 전했으니, 폐하께서 건강하게 깨시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거요."
"정말 그리되면 태감의 도움을 평생 잊지 않겠소."
단아와 우호법은 홍기영의 도움을 받아 이미 자금성을 떠났다. 그러나 뒤탈 없이 유근을 죽일 생각에 면사금패를 얻으려는 생각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청을 미리 얘기하겠소."
"엿듣는 사람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말씀해도 되오."
공현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유근을 죽여주시오."
구후영은 크게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태의와 서창이 마찰한 일은 따지고 보면 역모에 준하는 죄인데 관련자 모두 무사하오. 현재 유근의 힘이 이 정도요. 제거하지 않으면 태의도 편히 발 뻗고 자기 힘드오."
'유근을 죽이는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이익이 엮였을까?'
구후영은 불쑥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지웠다. 다른 사람의 이익과 목적은 구후영과 상관없다. 어차피 누구에게 득이 되고 누구한테 실이 되든, 구후영은 유근을 반드시 죽일 생각이다.
"유근은 폐하의 총애를 받는 자라고 들었는데."
구후영은 본심을 숨기기 위해 거절하려는 척했다.
"내가 서창에 이목이 꽤 있는데, 유근이 순천부를 떠날 거란 정보를 들었소. 유근이 자금성을 떠나기만 하면 태의한텐 낭중취물囊中取物이 아니오? 내가 그간 들은 소문이 일 할만 진짜여도 절대 어려운 부탁이 아닐 거요."
"장인태감이 순천부를 떠날 수 있소?"
장인태감은 옥새를 관리하는 중책을 맡은 자로, 순천부는커녕 자금성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다.
"유근은 태후의 심복이기도 하니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 되오."
공현이 작게 탄식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유근이란 자보다 못한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폐하에 대한 충정이오."
'충정을 아는 것과 훌륭한 사람인 건 별 상관이 없는 얘기인 모양이구나.'
"놈이 기를 쓰고 순천부를 떠나려고 하면 무조건 폐하의 마음에 쏙 드는 일이오. 혹여 그놈이 큰 공을 세우면 서창을 제거하는 일이 요원하여 천하가 태평하기 어렵소."
'유근이 아니라 서창이 목적이구나.'
여기에 엮인 복잡한 사정은 모르지만, 공현이 하려는 일은 서창을 없애는 거고, 그 목적을 위해선 유근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부탁했소?"
"난 태의한테만 했는데, 다른 자들은 모르겠소."
"만약 유근이 다른 자의 손에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유근이 어떻게 죽든 면사금패는 태의 거요. 만에 하나 면사금패를 수여하지 못하면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께서 그에 상응한 보상을 반드시 하실 거요."
"좋소. 태감을 믿고 일을 진행하겠소. 그런데, 그게 언제요?"
"우선은 폐하께서 깨셔야 하오. 아무리 유근이 서창의 창공에 장인태감에 태후의 심복이라고 해도, 폐하의 윤허 없이는 함부로 자금성을 비울 수 없소."
유근을 어떻게 죽일지 속으로 상상하던 구후영은 새로운 걱정이 떠올랐다.
"만약 폐하께서 재발을 우려해 날 잡아두면 어떡하오?"
그에 공현이 하하 웃었다.
"태의는 궁에 묶이는 게 싫은 것 같소."
구후영은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 성정과 전혀 안 맞는 것 같소."
"폐하께서 신선과 단약술에 심취한 건 태의도 아실 테고.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시오?"
"태감의 고명한 가르침을 청하오."
공현이 작게 웃었다.
"태의는 어떨 때 보면 세상 누구보다 영민한데, 이런 쪽으론 궁에 들어온 지 반년 되는 궁녀나 환관보다 못하오."
"내가 일부 방면에서 뛰어난 건, 수많은 방면에서 남들보다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소."
"태의가 그렇게 말하니 나 같은 건 어디 가서 목매달아야겠소."
"그래서 방법이 뭐요?"
"강한 흐름은 거스르는 게 아니라 따르는 거요."
공현은 뒷짐을 쥐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구후영에게 황제의 집착을 벗어나는 방법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 작가의말
개지스 님이 글을 추천해 주셨네요.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라는 격려의 의미로 알겠습니다.
이번 편에 사족을 좀 달자면.
이 글은 구상 단계에서 현재 모습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처음 구상할 땐, 천마가 죽고 마교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 수많은 무인이 천산으로 가서 천마의 비급을 얻어 마교 교주가 되려 하는 시대 배경인데, 주인공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두 친구와 함께 천산으로 향합니다.
수많은 중원 무인이 마교로 향한 건 이번 편에 언급한 서창의 무림말살지계 때문이었고요. 온갖 세력이 모여든 데다 마교 역시 여러 세력이 교주 자리를 두고 각축해서 정말 난장판인 상황이죠.
속고 속이고, 뺏고 뺏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연합하고 배신하고. 온갖 강호의 밑바닥을 다 보여주는 과정에 주인공이 이 모든 일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을 그리려는 게 원래 구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 몇 개 설정 충돌로 포기했고, 오랜 기간 구상했던 노력이 아까워 지금 형태로 순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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