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제홍엽雁啼紅葉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묵직하게 누르는 사념思念은 붉게 물든 단풍을 닮았다.
단풍은 가지와 이별해 바람에 쓸려가기 전에 사무치게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인다. 그 아름다움의 끝에 기다리는 게 서리와 눈의 차가운 계절이더라도 단풍은 붉어짐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단풍은 눈에 묻히고 나무는 새로운 잎을 피우기 위해 봄을 기다리지만.
마음에 진 단풍은 영원하다. 서리를 맞아 가지와 이별하기 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오래도록 머물며 헤어짐의 아픔을 거듭 되새긴다.
그리하여 가을마다 강남으로 가는 기러기들이 붉은 단풍만 보면 반복되나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을 떠올리며 슬피 우는 것이리라.
"동생, 난 이만 무당에 가겠다."
청빈이 불쑥 말했다. 침으로 복장표국 무리가 버리고 간 혈교룡을 치료하던 구후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형님, 조금만 더 도와주시죠."
"아니다. 난 너한테 짐만 될 뿐이다."
청빈은 홍엽산장에 온 다음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제대로 깨달았다. 강호는 사부의 지시로 사람을 죽이며 괴로워하던 청빈의 삶보다 훨씬 처절했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얼마나 큰 배려를 받았는지도 알았다.
구후영은 쇄악곡에 있을 때 동생에 관한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무당 근처에 온 김에 청빈을 수소문하다가 칠살문의 촉각에 걸렸고, 미혼향을 쓰는 자들을 잡아 신문하는 과정에 정학을 만났다고만 했다.
이는 청빈이 잡념 없이 태극권을 익혀 마음의 속박을 풀길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다. 동생에 관해 물어볼 것도 많았을 텐데 꾹 참으며 청빈을 믿고 기다려줬다.
그렇게 큰 배려를 했음에도 청빈의 작은 도움에도 늘 고마워했다.
"제가 예전에 들은 말이 있는데, 험한 길을 걸을 땐 곁에 누구라도 있으면 힘이 된답니다."
"그래. 나도 너한테 힘이 되려고 이러는 거다. 내 미약한 힘으론 이게 최선인 것 같구나."
말을 마친 청빈이 대부인과 장선 및 철추당의 골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빈도가 조금은 과분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장선이 말했다.
"저기 혈교룡이란 자를 저한테 넘겨주십시오."
뜻밖의 말에 장선은 대답을 아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혈교룡과 친분도 원한도 없습니다. 다만, 저와 동생한테 태극권을 가르친 정학 사조께서 악인을 잡으면 자기한테 데려오라고 하셔서, 그 분부를 이행하려 함입니다."
"무당일절!"
곁에서 듣던 철추당 골간들이 경악에 찬 외침을 터뜨렸다.
"제길. 그랬구나. 어쩐지 아까 이백 합이나 공격하고도 한 대를 못 때렸어."
연무쌍이 이를 갈았다. 장삼풍이 태극권을 창안한 이후 여의권이 천하에서 제일 훌륭한 권법의 자리를 내준 바람에 무당과 태극권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사제가 왜 저 아이와 싸워?"
장선의 질문에 연무쌍은 구후영이 죽은 자를 깨워 심문한 사실과 고통을 덜어주려고 죽이는 장면을 살인멸구로 오해하여 공격한 사실을 말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철추당 사내들의 눈이 동그래지고 목젖의 형태도 점점 완연하게 드러나는 걸 확인한 청빈은 속으로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무력이 별로고 진짜 무당 제자도 아닌 청빈으로선 구후영을 가장 크게 도울 방법이 무당일절과의 인연을 널리 알리는 거였는데, 연무쌍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나은 반응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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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은 혈도를 짚고 사슬로 묶은 혈교룡을 당나귀 등에 태우고 무당으로 떠났다. 구후영은 이별이 너무 아쉬웠지만, 쇄악곡에 돌아가서 태극권을 제대로 익히고 싶다는 청빈을 말릴 수 없었다.
청빈에 이어 철추당 사내들이 떠나고 호원 무사들까지 집에 보내고 나니 커다란 장원에 대부인과 연무쌍 그리고 장선까지 넷만 남았다.
"저기에 앉지."
넷은 연무장 바로 곁에 있는 객당에 자리를 마련했다.
"한때는 여기도 수백 명 사람이 살았다. 남편이 죽고 절반이 나가고, 아이가 죽고 남은 절반이 나갔다."
구후영은 차를 우리며 대부인의 넋두리에 귀를 기울였다.
"근래에 조금씩 발길이 잦아지나 싶었는데, 결국 사단이 터졌구나."
춘추전국 시절 큰 부자들은 식객을 거뒀다. 재주가 뛰어난 자들을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유사시 힘을 빌리는 관계였는데, 방이 무한정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쫓겨나지 않으려고 식객들끼리 겨룸이 잦았다.
당시 식객들의 언쟁과 겨룸을 통해 수많은 인재가 발굴되었고, 백가쟁명의 멋진 시대를 열기도 했다.
홍엽산장도 식객이 많았으나, 이유는 달랐다.
철혈방의 총단을 양양으로 정했기에 삼당과 오단의 사람들이 양양에 왔을 때 묵는 장소로 쓰였고, 철혈방뿐이 아니라 철혈방의 손님으로 온 자들도 홍엽산장이 접대하며 늘 사람이 붐볐다.
그러나 큰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구후진과 구후율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면서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왕가장도 손님이 자주 오는 걸 중요히 생각하더니, 내가 모르는 영문이 있는 모양이구나.'
사태 파악은 뛰어나나 강호는커녕 세상도 잘 모르는 구후영이기에 왜 부자들이 손님이 자주 찾는 걸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 넋두리를 늘어놓던 대부인이 갑자기 구후영에게 질문했다.
"아이야. 마지막으로 하나 묻겠다. 너와 네 동생의 아명이 무엇이냐?"
구후영은 우린 차를 잔에 따르다 말고 대답했다.
"저는 사준思俊이고 동생은 사혁思赫입니다."
구후영의 대답에 대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연신 찍었다.
"차를 올리겠습니다."
구후영은 마저 따른 차를 대부인과 연무쌍 그리고 장선에게 순서대로 올린 다음 가만히 서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대부인은 구후영이 올린 차를 한 모금 마셔 마음을 진정한 후 입을 열어 대답했다.
"율이가 장가갈 때 쓴 가짜 이름이 후준혁이었다."
"불효한 자손이 이제야 할머니와 내종숙 그리고 장 선배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구후영은 바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대부인은 그런 구후영을 바라보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고모."
슬픔에 젖어있던 대부인은 연무쌍의 부름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어서 일어나 자리에 앉아라."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구후영은 따스한 찻잔을 손에 잡고 돌리면서 떨리는 마음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대부인과 연무쌍도 마음에 태풍이 불고 벼락이 치는 터라 쉬이 입을 열지 못해 객당에는 짙은 정적이 흘렀다.
"대부인께선 아이가 가짜임을 예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적막을 깬 건 장선이었다.
대부인은 힘없이 웃으며 연무장에서 숨겼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대부인은 서신이 며느리의 필체임을 확신했다. 얼굴을 볼 수 없어 구후율과 며느리 사이에서 오간 연서戀書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기에 틀릴 리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섯 살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컸고, 서신에 적힌 내용 빼고는 아는 게 없었다.
"이젠 무슨 일인지 알겠다만."
이 일은 후일 철추당의 대주가 된 장선의 네 제자가 일 년 넘게 수련도 제대로 못 하고 돌아만 다니자 불만이 크던 차에 때마침 서신을 주운 아이를 만났고, 아이에게 서신의 내용을 알려줘서 구후영으로 꾸미며 생긴 사달이었다.
"그땐 내가 오판했다."
당시 대부인은 스물도 안 된 네 아이가 꾸민 짓이라곤 상상도 못 하고 홍엽산장을 노리는 세력의 음모라고만 생각했다. 당연히 진짜 구후영은 이미 죽고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고, 대부인의 머릿속엔 복수할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구후율의 아이를 찾았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아이를 통해 배후를 캐려 했으나.
아이는 글과 무공을 익힘에 있어 매우 성실했고, 대부인을 진심으로 공경했다. 원한에 사무치고 복수에 눈이 멀었던 대부인도 별로 영특하지 않은 아이를 음모의 일환으로 홍엽산장에 투입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을 떠올렸다.
"시간이 흐르며 차차 아이한테 정이 들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도 먼저 보낸 대부인은 살갑게 구는 가짜를 매몰차게 밀어내지 못했다. 이대로 홍엽산장의 대가 끊기는 것보다 가짜라도 있는 게 낫다는 생각에 대부인도 아이한테 정을 주기 시작했고.
진짜 손주처럼 생각하며 키웠다.
'세상을 바르게 사는 게 이래서 중요하구나.'
대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구후영은 느끼는 바가 컸다.
구후영이 잃어버린 서신을 주운 아이는 넷의 도움으로 구후영이 되어 글과 무공을 익혔으며 철추당의 부당주가 되고 홍엽산장의 주인도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오롯이 행운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가짜인 게 들켜서 협박당했겠지.'
철추당의 네 대주가 복장표국의 표물을 턴 건 아무래도 배후 세력의 음모 같았다. 용호표국이나 진원표국이 더 비싼 표물을 취급하기에 재물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처리가 어려운 쌀과 소금을 털진 않았을 거다.
배후 세력의 목표가 철혈방의 와해 내지는 몰락일 테니, 관과 철혈방의 마찰을 일으키려고 일부러 관의 표물을 털라고 지시한 게 분명하다.
"넌 네 자리를 십여 년이나 뺏은 아이가 밉지 않으냐?"
대부인의 질문에 구후영의 상념이 끊어졌다.
"지름길은 빠르지만, 바른길은 멀리 갑니다. 겨울은 춥고 삭막하지만, 겨우내 내린 눈이 녹아 땅을 비옥하게 적셔 봄이 더 푸르다고 합니다. 단."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고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을 납치하여 현재까지 행방불명인 일은 밉습니다. 동생을 무사히 찾으면 그땐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생각이나, 당장은 아닙니다."
진짜 혈육이 십 년 넘게 봐오며 정이 깊이 든 아이 때문에 행방불명의 상태가 되었다. 대부인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리도 기구한 삶을 내렸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죽은 아이를 홍엽산장의 선산에 묻고 싶으신가 봅니다."
연무쌍이 말했다. 대부인은 그에 긍정도 부정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께서 원하시면 그리하셔도 좋습니다."
대부인의 마음을 헤아린 구후영이 말했다.
"홍엽산장의 주인은 너다.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다."
대부인의 단호한 태도에 구후영은 신중히 고민했다.
'어쩌면 나 대신 죽은 건지도 모른다.'
자룡을 납치하고 자신도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건 벌 받을 일이지만, 가짜 구후영이 죽은 건 구후영이란 이름 때문이지 자룡을 납치한 악행 때문은 아니다.
'이미 죽은 사람인데 용서하는 것도 무방하다. 살아있다면 다른 얘기지만.'
다섯 모두 죽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구후영이 직접 검으로 목을 벴을 것이다.
'풍 대협이 말씀하셨지. 인생을 살면서 거칠 게 없어야 한다고. 괜히 지난 일과 죽은 사람에 집착하여 응어리를 남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죽은 자를 선산에 묻죠. 대신 자룡을 찾을 때까진 묘비를 세우지 않겠습니다. 장 당주의 네 제자도 홍엽산장에서 후장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릇이 크구나. 거친 땅에 거목이 자란다더니, 죽은 아이보다 훨씬 훌륭하게 자랐구나.'
연무쌍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구후진의 죽음은 어릴 때 일이어서 별 감흥이 없지만, 부친과 구후율의 죽음은 마음에 큰 응어리로 남았는데, 잘 성장한 구후영의 모습에 서러움이 녹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안제홍엽 - 기러기가 단풍을 보고 슬피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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