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풍작랑興風作浪
가끔 더없이 얄미운 사람이 있다.
불타는 집에 부채질하고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안타깝게도 흑철이 바로 그런 자였다.
흑철은 원경과 강석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동시에 공격한 다음, 어마어마한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형님!"
구후영은 흑철을 쫓는 대신 입으로 선혈을 토하며 쓰러진 원경에게 달려갔다.
"제길."
마찬가지로 피를 한 바가지 토한 강석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했다.
"저놈 뭐지?"
흑철의 돌발행동에 양측 모두 싸움을 멈추며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물론, 반쯤 미쳐 날뛰는 자도 간간이 있었으나, 상대편 칼에 죽거나 같은 편 손에 이끌려 강제로 전장을 벗어났다.
'대단한 장법이다.'
원경도 그렇고 강석도 그렇고, 흑철의 장법에 맞은 부분의 옷이 바스러졌다.
이것만 보면 무당의 십단금 같은 부드러운 장법으로 여겨지나, 둘의 가슴에 남은 시커먼 자국이 그게 아님을 역설했다.
"대수인이다."
강석의 가슴에 垚 모양으로 음각된 자국을 본 원경이 쿨럭이며 말했다.
거기에 반응한 건 구후영이 아닌 강석이었다.
"흑면수가 대수인을 익혔다고?"
"저자가 흑면수요?"
구후영이 깜짝 놀랐다.
"마교에서 천마 다음으로 강하다는 그 흑면수?"
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저놈이 마교의 이인자다."
"그런데 같은 편 아니오? 왜 당신까지 공격한 거요?"
강석이 시커먼 피를 한 모금 토하고 구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흑철은 흑 장로의 관문제자다. 원래 다른 이름이었는데 흑 장로 제자가 되면서 이름을 흑철이라고 지었지."
강석은 코로 숨을 두 번 더 쉬고 마저 대화를 이어갔다.
"흑 장로와 마찬가지로 흑철도 백련교가 뿌리인 셈이지. 그런 자가 나를 공격했다. 어떻게 되겠느냐?"
구후영과 원경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혈포규찰대를 얻으면 단일 세력으로 남은 모든 세력과 비등할 수 있다. 그런데 백련교의 흑철이 날 공격했다."
구후영과 원경은 여전히 미망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용전향은 반드시 나를 죽여야 한다. 다른 세력들이 오기 전에."
용전향 입장에선 원래 목표였던 화산과 방해꾼인 구후영 일행은 물론이고, 흑철의 공격에 쓰러진 강석까지 죽여 입막음해야 한다.
혹시 이 일로 혈포규찰대가 다른 세력에 붙으면 백련교가 주도적 지위를 잃어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란 거요?"
다른 세력이란 말에 구후영이 깜짝 놀랐다.
"지금 온 자들은 모두 백련교 소속이다. 설마, 마교가 고작 이 정도 규모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냐?"
"흑철 저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게요?"
"낳은 제 어미도 모를 사내새끼의 속을 난들 알겠냐. 하나 확실한 건."
강석이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았다.
"이제부터 너희랑 같은 편이라는 거지."
"오시오."
구후영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 강석 역시 일말의 주저함 없이 구후영의 손을 잡아 몸을 일으킨 다음, 휘청이는 걸음으로 화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달라진 건 없다. 모두 죽인다."
그새 셈을 마친 용전향의 외침으로 전투가 재개됐다.
#
'내가 결단을 일찍 내렸다면.'
용전향을 죽이기로 결심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죽이려고 칼을 들이미는 자의 가슴에 검을 박는 건 쉬운 일이지만, 딱히 알지도 못하는 자를 의도적으로 죽이는 건 어렵다.
그런데 그 짧은 망설임으로 원경이 중상을 입었고, 자신은 물론 종남과 화산 제자들까지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다니.'
천산으로 쫓겨가기 전까지 중원 무림 전체와 싸웠던 마교다. 그런데 고작 수백 명 무인이 전부라고 생각한 건 구후영이 어리석은 탓이다.
'여기서 더 망설이는 건 군자보다 소인에 가까운 행동이다.'
결정을 마친 구후영이 검집과 봇짐을 던지고 가벼운 몸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악! 으악!
목숨을 건 살육의 흥분으로 웬만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프지 않아도 자신의 상처가 치명적인지 아닌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구후영의 검에 찔리고 베인 자들이 비명을 지른 이유였다.
"놈!"
숨 몇 번 쉴 사이에 다섯 명이나 되는 무인이 구후영의 검에 목숨을 잃자 원칠과 네 노인이 달려왔다.
"넌!"
눈 깜짝할 사이에 원칠의 심장에 검을 꽂은 구후영이 잇새로 말을 뱉었다.
"내 상대가 아냐."
그러는 사이, 네 노인의 무기가 구후영의 몸에 동시에 닿았다.
그런데 마치 무딘 작대기로 고래를 찌른 듯 쇠로 만든 무기들이 구후영의 옷을 따라 쭉 미끄러졌다.
"첨의질沾衣跌!"
이들이 맨몸으로 네 개의 방위에서 들어온 쇠붙이를 동시에 흘린 어마어마한 무공에 놀라는 사이.
"그만 가시오."
구후영이 네 노인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어림."
구후영의 오만함에 화가 치밀었던 노인은 생각한 말을 다 뱉기도 전에 간단한 베기에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
"어허."
죽음을 예감하고 탄식하던 노인 역시 구후영의 올려 베기에 가슴이 갈라졌다.
"친구분들이 적적하겠소."
나아갈지 물러날지 망설이는 두 노인에게 구후영이 말했다. 곁눈질로 죽은 친우들을 힐끗 본 둘이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구후영을 덮쳤다.
'흥.'
생사를 도외시한 대단한 공격에 구후영이 사선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단 반걸음으로 두 노인 중 한 명의 공격권을 벗어난 구후영이 그제야 검을 휘둘렀다.
"컥!"
구후영의 베기 하나에 동시에 당한 두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착한 청년이군."
구후영은 이제껏 가슴만 노렸다. 사실 가장 쉽고 확실하게 죽이는 건 목이나 머리를 노리는 건데, 일말의 자비로 최대한 온전한 시체를 남기기로 한 거였다.
"잘 가시오."
살기가 잔뜩 어린 시뻘건 눈을 껌뻑이며 구후영이 차갑고 딱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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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잘린 자들은 기어서라도 상대한테 다가가 검 한 번 더 휘두르고, 팔을 잘린 자들은 죽어가는 몸을 던져 입으로 적의 발목을 무는 처절한 전장.
머릿수가 많은 마교가 당연히 우세였다.
상대는 원경을 보호하느라 옥무영이 활약하지 못했고, 막불위 역시 화산 제자들을 지키는 일에 전념했다.
구후영이 양 무리에 뛰어든 범처럼 날뛰긴 했으나, 죽어가는 속도는 양측이 비등했다. 마교의 숫자는 처음부터 상대보다 배가 많았는데, 비슷하게 죽어가면서 이젠 네 배 정도로 차이가 났다.
승리가 손에 만져지는 듯했다.
그랬는데.
"우리가 왔다."
갑자기 나타난 육십여 명의 종남 제자들이 형세를 역전逆轉시켰다.
수적으론 여전히 화산 쪽이 열세지만, 종남에서 고르고 고른 생력군 육십 명은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지 수적으로 변화가 생긴 데 그친 게 아니었다. 구후영만 묶으면 결국 이긴다는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 서슴지 않던 마교 무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는 양측의 기세에 커다란 변화를 조성했다.
'이대로는 망한다.'
흑철이 강석을 공격한 일만 아니었으면 용전향은 전력을 수습해 소극적으로 싸우며 증원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과 비등한 상대를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한다.
다른 세력이라면 해석할 여지라도 있지만, 쌈박질에 미친 혈포규찰대의 무식쟁이들한테는 말이 안 통한다. 그간 마교 이인자의 후광을 이용하려고 흑철이 백련교 소속이라고 떠들고 다닌 탓에 이제 와서 무관한 사이라고 주장해봤자 놈들에게 먹힐 가능성이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둘러라."
화산과 종남 역시 느긋하게 대처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세력이 와서 백련교를 오해하든 말든, 그건 종남이나 화산이 알 바가 아니다. 내분이 일어나더라도 화산과 종남이 다 죽은 다음의 일일 테니까.
화산과 종남 역시 다른 세력이 도착하기 전에 백련교의 일당을 처리하고 재빨리 도주해야 한다.
덕분에.
"죽어!"
종남의 등장으로 잠깐 주춤했던 전장의 살기가 가파르게 짙어졌다.
'여긴 강호다.'
구후영은 울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자꾸 멈추려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강호에 있으면 강호의 법을 따라야 한다. 칼을 겨눈 상대는 살려두지 않는다.'
귀검동에 들어가기 전에 구후영이 한 맹세다. 귀검동과 태극혜검을 통해 강해지면서 슬며시 잊어갔는데, 이번에 다시 한번 확실히 상기했다.
'다 죽여서라도 내가 살아야 한다.'
잠깐 흔들린 마음을 다잡은 구후영이 살기를 키우며 용전향을 찾았다. 그러나 과한 흥분으로 감각이 좁아지고 시뻘겋게 물든 눈으로 시야도 흐릿했기에 일시에 용전향이 어딨는지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아직도 안 끝났어?"
팽영옥을 조사로 모시는 팽당彭黨의 무인들이 옥녀봉에 나타났다.
'젠장.'
용전향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맹렬하게 굴렸다. 그러나 긴장이 과했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칠이라도 있었으면.'
원칠은 심계가 얕은 대신 임기응변에 강했다. 하지만, 이미 구후영의 검에 죽은 사람을 아무리 떠올려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강석이 배신해서 화산에 붙었소."
다행히, 용전향이 누군지도 모를 백련교 교도가 적절히 나섰다.
"종남을 부른 것도 강석의 짓이오."
"내 이럴 줄 알았다."
팽당의 무리들이 콧김을 뿜으며 씩씩거렸다.
"천마를 따르던 새끼들은 다 숙청해야 한다니까."
용전향에겐 천만다행으로 무식하기로 따지면 일등 자리도 섭섭해할 팽당이 제일 먼저 옥녀봉에 왔다.
아직 기회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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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르시오."
빠르게 형세를 판단한 막불위가 화산 장로한테 말했다.
"뭐라고?"
"여길 태우고, 저들을 헤쳐 도주할 생각이오."
"꼭 태워야 하오?"
막불위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래야 불길을 본 마교 무리들이 곧장 옥녀봉으로 달려올 거고, 놈들이 따로 와야 그나마 살 가망이 있지 않겠소?"
장로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청년이 멀쩡한 제자 둘을 데리고 불 지르러 갔다.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소."
"염치 좀 차리시오."
막불위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부탁 운운하는 장로가 전혀 미덥지 않았다.
"저 아이가 내 손주요."
장로는 막불위의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 칠갑을 한 몰골로 불을 지르는 청년을 가리켰다.
"저 아이만큼은 꼭 살려주시오."
막불위가 잠깐 고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보겠소."
그때, 옥무영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요?"
여전히 팔다리가 잘리고 목숨이 스러지는 상황에 여유라고 하긴 그렇지만, 일행에겐 상황을 살피고 고민할 시간이 생겼다.
"불을 지르고 옥녀봉을 떠날 생각이오."
"각개격파?"
"그래야 하나라도 더 살지 않겠소?"
"선봉은 구후영, 죄측은 내가 맡지."
"종남이 우측을 맡겠소."
"화산이 후미를 맡지."
포위를 뚫을 때 가장 위험한 곳은 전방과 후미다. 전방은 자칫 멈칫거리다간 같은 편에 밀려 죽을 수 있고, 후미는 적을 등지고 달려야 하기에 언제 눈먼 칼을 맞을지 모른다.
이는 무인의 싸움이라고 다르지 않은데,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해 위험은 오히려 몇 배나 크다.
"몇 명이 살아날지 모르지만."
막불위의 눈동자에 파란 불길이 일었다.
"최선을 다해 구천에서 눈 감을 수 있었으면 좋겠소."
- 작가의말
- 흥풍작랑 -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다. 사건·사고를 만드는 행위를 뜻합니다.
막불위 - 유능한 공대 대장
원경 - 어그로 스킬 없는 탱커구후영 - 회피형 딜러옥무영 - 도주형 딜러종남칠검 - 근접 딜러화산 장로 - 무능한 길드 수뇌부강석 - 매혹 스킬에 걸린 상대 탱커흑철 - 시나리오 N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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