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장생不老長生
서불재진녀徐市載秦女 누선기시회樓船幾時回
서불이 동남동녀를 태우고 떠난 배는 언제 돌아올까.
단견삼천하但見三泉下 금관장한회金棺葬寒灰
저 땅 깊은 곳에 묻은 금관엔 차가운 뼛가루만 남았는데.
모용용은 눈앞의 참상에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무도한 놈들.'
갑자기 들이닥쳐 다짜고짜 오라를 받으라는 금의위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으나, 순식간에 십수 명의 장로와 수십 명의 가신 모두 핏물에 잠겨 절명했다.
단단한 느티나무로 짠 대문이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고, 이의삼광二儀三光의 글자를 적은 편액도 반으로 쪼개져 바닥을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천년 세가가 이렇게 내 손에서 끝나는 건가?'
모이의지도慕二儀之道 계삼광지용繼三光之容은 모용이란 성씨가 생긴 말로, 이의는 하늘과 땅을 삼광은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킨다.
무려 천삼백 년 전에 만든 편액으로, 연나라를 세운 모용외가 직접 쓴 글자다. 그간 수없이 약물에 담그고 글씨를 새로 칠하면서 소중히 지켜왔는데, 이리도 허무하게 훼손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 알고 왔으니까 기만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비대한 몸을 태사의에 묻은 유근이 모용용에게 뾰족하게 호통쳤다. 그런 유근의 주변을 신기영神機營의 흑갑호위黑鉀護衛들이 철통같이 지켰다.
'절정고수의 칼도 막아내는 갑옷이라니. 이대로 무림이 끝장나는 건가?'
갑옷과 투구는 물론, 신발과 장갑마저 시커먼 철로 만들었다. 그나마 노릴 만한 곳이 이음새인데, 그곳도 질긴 가죽으로 겹겹이 보호하여 내공과 초식 모두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흑갑호위 상대로 죽는 길밖에 없다.
만에 하나 황실이 마음먹고 무림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면 무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절정에 이르지 못한 무인들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모용의 씨를 말리길 바라는 게 아니면 고분고분 숙여."
"원하는 게 뭐요?"
모용용이 검 끝을 내리며 질문했다.
그에 유근이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말투를 친근하게 바꿨다.
"미리 약속 하나 하겠소. 나 말고 폐하의 명의로 말이오."
유근이 황제를 들먹이자 모용용은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이게 황제의 뜻이라고?'
모용가는 그저 무림의 세가가 아니라 선비족을 비롯해 관동 많은 부족의 존경을 받는 왕가의 후예다. 게다가 산해관이나 구문구를 비롯한 관동의 중요한 관문을 지키는 장수 대부분이 모용가의 은혜를 입었거나 뇌물을 먹어 명 황제보다 모용가를 더 따르는 사람이 다수다.
덕분에 산해관 인근에선 왕이나 다름없이 행동했고, 만 명이 모이면 천하에 적수가 드물다는 여진족도 고작 일 장도 안 되는 모용가의 담벼락을 넘기 저어했다.
갑자기 덮친 금의위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맞서 싸웠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일단 힘으로 제압하고 사정을 살펴 천천히 수습해도 문제없다는 자신감.
그런데 유근의 입에서 황제가 거론되자 모용용은 진짜 세가가 끝났음을 느끼고 절망에 빠졌다.
"폐하께서 원하는 바를 이루면 모용 가주를 선비왕鮮卑王으로 봉하고 요동 사군四郡(네 개의 군)을 봉토로 하사할 것이오. 이번 일로 입은 피해 역시 열 배의 재물로 보상하겠소."
유근의 회유에 모용용은 화를 억지로 눌렀다.
'죽음은 어떻게 보상할 건데?'
모용세가는 명의 신하를 자처하긴 했으나 지금의 지위를 쇠붙이와 피로 직접 쟁취했다. 유근의 말대로 되면 비록 지금보다 더 확고한 지위를 얻을 수 있지만, 명 황실이 변덕을 부릴 때마다 휘청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전혀 혹하지 않았고, 오히려 흑갑호위에게 죽은 수십 명의 목숨을 떠올리며 비분강개할 뿐이었다.
"반대로 가주가 협력하지 않을 시, 황명을 받은 몸으로 나도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소."
모용용은 애써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가주가 밖에 몰래 낳은 아들이 있더군. 올해로 다섯 살이던가."
그러나 심장을 찌르는 유근의 협박에 결국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요?"
유근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모용용은 망설임이 있었으나 얕보이기 싫어서 검을 바닥에 버리고 맨몸으로 태사의에 앉은 유근한테 다가갔다.
흑갑호위들이 양옆으로 비키며 모용용에게 길을 내줬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불로장생의 비법이오. 그게 모용가에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소."
이대로 유근의 목을 비틀어 죽여버릴까 고민하던 모용용은 너무도 어이없는 말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모용가에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는 개소리는 누구 입에서 나온 거요?"
불로장생은 사람이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걸 말한다. 그런데 그 있지도 않은 불로장생의 비법 때문에 모용가의 충성스러운 가신과 장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너무나 슬픈 모순이라고 생각하며 모용용은 차라리 유근의 목을 꺾고 동귀어진할 결의를 다시금 다졌다.
"당신 동생이 알려줬소."
그러나 유근의 말에 금세 생각을 바꿨다. 유근 하나만 죽이기엔 지금 피가 거꾸로 솟는 이 기분이 전혀 풀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삭초제근 하는 건데. 환관이 되었다고 해서 그냥 놔뒀더니.'
하인과 가신들 사이에서 소마귀로 불리던 이복동생을 떠올리자 모용용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삽시간에 이성을 회복했다.
"자. 이제 가주의 결정을 듣고 싶소."
모용용의 머리가 태어난 이래 가장 빠르게 치열하게 회전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아는 게 전혀 없으니 대책이 떠오를 리가 만무했다.
"불로장생의 비법이 뭔지 나는 모르오."
그에 유근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전대 가주가 모용가의 조상이 남긴 비밀을 풀고 어딘가로 갔다가 외상 하나 없는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고 들었소. 우린 당신 부친이 불로장생의 비법을 발견하고 확인하러 갔다가 사고가 생긴 거로 판단하오."
"난 모르는 일이오."
모용용이 단호하게 말하자 유근이 이마를 찌푸렸다.
"세가의 앞날은 물론이고, 남은 식솔들 목숨도 좀 생각해야지 않겠소?"
그때 모용용의 뇌리에 작은 벼락이 쳤다.
"나도 그러고 싶소. 그러나 협박당한다고 모르는 일을 알게 되는 건 아니잖소."
모용용은 불쑥 떠오른 생각을 망설임 없이 입 밖으로 뱉었다.
"차라리 내막을 하나라도 더 아는 사람한테 묻는 게 어떻소? 원하는 게 뭔지 알면 내가 앞장서서 그 물건을 찾아내 태감께 바치리다."
잠깐 고민한 유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가의 식솔을 인근 장원에 정중히 모셔라. 가주는 내가 따로 모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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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용 환관이 환갑 정도 나이로 보이는 노인을 향해 반갑게 외쳤다.
"어서 앉거라."
푸근한 웃음을 지은 노인이 자기 앞에 앉은 용 환관에게 차를 따라주며 질문했다.
"매번 얼굴을 바꿨는데 어찌 알아보는 것이냐?"
지난번엔 초 선생의 얼굴이었고 지지난번엔 한 선생의 얼굴이었다. 지금은 하오문 총타주였던 연 선생의 얼굴이고.
"미간이요. 얼굴과 체형을 어떻게 바꿔도 눈 사이 거리는 안 변하더라고요."
손주의 재치에 연 선생이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자식이라곤 딸 하나밖에 없어서 못내 서운했는데, 네가 이리도 재기가 넘치니 크나큰 위안이구나."
연 선생의 칭찬에 용 환관은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자, 그간 어찌 살았는지 얘기 좀 들어볼까?"
노인과 소년은 차를 마시며 즐겁게 대화했다.
그러던 가운데.
"할아버지, 제 환골탈태는 언제 도와주실 겁니까?"
용 환관이 불쑥 질문했다.
"멀지 않았다."
기습 질문에도 연 선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난 내년이면 준비가 끝난다. 오히려 네가 늦지 않을지 걱정이구나."
"소손도 필요한 약재를 다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용 환관이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환골탈태하면 그것이 다시 생기는 게 확실합니까?"
그에 연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고말고. 대신 너도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연 선생의 말에 용 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모용이란 성을 버리고 할아버지를 따라 제齊를 성씨로 삼아 대대손손 이어갈 겁니다."
용 환관의 말에 연 선생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초를 구해 영약을 만들고, 내가 내력으로 도우면 필시 환골탈태를 이룰 것이다. 너도 비급을 읽어봤으니 허황한 일이 아니란 건 알 거 아니냐."
"그럼요. 믿어요."
그때, 부리가 노란 매 한 마리가 창문으로 날아들어 연 선생의 어깨에 앉았다.
"가신들이 잠시도 쉬게 안 하는구나.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유근이 곧 죽을 거니까 당분간 몸 사리라고 알려주러 온 거다. 유근의 계파가 숙청될 때 괜히 함께 휩쓸리지 않도록 처신 잘하거라."
용 환관은 격동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짐짓 태연한 척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차피 환골탈태로 다시 사내가 되면 미련 없이 황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떠날 땐 떠나더라도 기왕 환관이 된 바에 최대한 이득을 챙길 생각이다.
연 선생의 계획에 동참한 그때부터 용 환관은 그간 유근이 모은 금은보화와 기물, 순천부 외곽의 수만 마지기 땅의 문서 등을 어디 숨겼는지 알아냈다.
유근의 죽음이 확실해졌기에 돌아가는 대로 땅문서부터 시작해서 티 안 나게 훔쳐 조정의 대신들한테 팔 생각이다. 정당하게 얻은 게 아니어서 반도 안 되는 헐값에 넘겨야겠지만, 유근이 수탈한 재물이 하도 많아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공손히 인사하는 용 환관과 작별한 연 선생은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죽통을 열었다.
"제길. 일이 꼬이네."
모용용은 불로장생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가신을 하나 매수해 유근에게 정보를 전달케 했는데, 그놈이 입을 떼기도 전에 흑갑호위의 손에 죽어버렸다.
"젠장. 또 망치는 건 아니겠지?"
소림의 일은 목적을 달성했으나 과정이 별로였다. 연 선생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 누군가가 알아채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예상 이상으로 많이 노출됐다.
음모에 끌어들인 무당은 물론이고, 봉문한 소림도 가만히 안 있을 게 뻔하다.
거기에 화산의 일도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말이어서 가슴 한구석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단 중요한 일부터 처리하고."
연 선생은 천과 세필을 꺼내 지시 사항을 자세히 적어 죽통에 넣었다.
"다른 매가 싸움 걸면 다투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매가 마치 연 선생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 선생은 매에게 고기를 배불리 먹인 다음 밀봉한 죽통을 다리에 묶었다.
잘 훈련된 매는 굳이 명령이 없어도 알아서 홰를 치고 동쪽으로 사라졌다.
"구후영과 원경. 이 두 놈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순식간에 점이 된 매를 바라보며 연 선생이 중얼거렸다.
"장삼풍이 죽고 천마도 숨었고. 이젠 다 내 뜻대로 되려니 했는데 골치 아픈 놈이 한꺼번에 둘이나 나타났구나."
한참 고민한 연 선생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지. 싫어도 놈한테 부탁할 수밖에."
연 선생은 근처의 포목점에 가서 검은 천을 사 삼각기를 만든 다음, 천산이 있는 서쪽으로 경공을 펼쳐 달렸다.
- 작가의말
이제쯤은 눈치챈 분이 계시겠지만, 연 선생은 속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계속 말을 중얼거리죠.
딱히 특별한 설정은 아니라서 여기에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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