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검보天下劍譜
발 없는 말은 천리 가는 사이에 뼈가 생기고 살도 붙는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양양에는 진짜 구후영이 구름을 타고 나타났고, 죽은 자를 호통 쳐 깨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천마가 홍엽산장을 노리는 바람에 일부러 가짜를 내세우고 진짜는 무당에서 무당일절의 가르침을 받으며 힘을 키웠다는 소문 역시 무성했다.
연무장에서 구후영이 '난 이미 용인데 어찌 연못에 몸을 담그랴'며 철혈방과 연을 끊기로 선언했다는 소문도 암암리에 돌았다.
그렇게 양양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구후영은.
"할머니. 혼자 씻을 수 있습니다."
정작 등 밀어주겠다는 대부인 때문에 곤경에 허덕였다.
"등만 밀어줄게. 손주 목욕시키는 게 평생소원이다."
평생소원이라는 말에 구후영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 그러시다면 옷 벗게 좀 돌아서 주십시오."
대부인이 돌아서자 구후영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옷을 벗고 꽃잎을 잔뜩 띄운 목욕탕에 쏙 들어갔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양손으로 소중한 부위를 필사적으로 엄호했다.
기척으로 구후영이 목욕탕에 들어간 걸 안 대부인이 돌아섰다.
'어깨가 율이를 닮았어.'
얼굴은 별로 안 닮았지만, 체형은 구후율을 방불케 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손주를 찾은 기쁨 때문인지 대부인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천천히 구후영의 뒤로 다가간 대부인은 손으로 물을 떠서 널찍한 등에 연신 끼얹었다. 그렇게 한참 등을 적신 후 거친 천으로 구후영의 등을 빡빡 밀었다.
그간 등 못 밀어준 한을 한꺼번에 풀려는 건지, 대부인은 구후영의 등이 방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새색시의 얼굴보다 더 빨개질 때까지 문질렀다.
"구석구석 깨끗이 씻고 나오거라."
대부인이 후련한 얼굴로 땀을 닦으며 밖으로 나가자 구후영은 그제야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처음엔 부끄러움에 힘이 들어갔지만, 할머니의 손길을 등으로 느낀 다음부턴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몸에 힘을 꽉 줬다.
'자룡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
구후영의 등을 한동안 때가 무서워 못 낄 정도로 밀어준 대부인은 바닥에 널린 옷들을 주워들고 밖으로 나왔다.
'빨래도 해야지.'
손주 기저귀 한 번 못 빨아준 한도 풀고 싶었다.
"대부인. 여기 책 한 권 있습니다."
대부인을 도와 구후영의 옷에 달린 주머니를 정리하던 하녀가 말했다.
"무슨 책이냐?"
"가죽으로 만든 귀한 책으로 보입니다."
귀한 책이란 말에 호기심이 동한 대부인이 하녀가 건네는 책을 받아 책장을 넘겼다.
그녀의 혀가 나의 가슴을.
한 문장만 읽은 대부인은 얼굴이 빨개지며 다급히 책장을 덮었다.
'아이가 되게 바르고 올곧게 보였는데 이런 책을 지참하고 다닐 줄이야.'
그러나 한창 혈기가 왕성한 나이임을 떠올리니 일견 이해도 됐다.
'얼마 뒤면 열아홉이니 혼기가 지나도 한참 지났구나. 빨리 적당한 혼처를 물색해 장가를 보내야겠다.'
증손주는 직접 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지. 작은 손주를 찾는 일이 더 급하다.'
오래 지켜본 건 아니지만, 구후영의 성정으로 자룡을 찾기 전엔 절대 혼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부인, 옷에 든 물건은 다 꺼냈습니다."
"그래. 그럼 먼저 가서 빨래를 물에 담그거라."
두 하녀는 대부인의 분부에 따라 구후영의 옷을 들고 목욕방 곁에 붙은 빨래방으로 갔다. 대부인은 두 하녀가 사라지자 음서를 목욕물을 끓이기 위해 불을 잔뜩 피운 아궁이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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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뜨거운 목욕물에 푹 퍼진 몸을 거친 천으로 쓱쓱 문지르고 보드라운 천에 물을 묻혀 때를 털어낸 뒤, 목욕탕 밖으로 나와 대야에 찬물을 떠서 두어 번 끼얹었다.
'때가 평소보다 많아.'
구후영은 연무쌍의 여의권을 상대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풍불지가 말했던 것처럼 몸이 깨달음에 맞춰 절로 변화했는데, 기간이 오래 걸리는 대부분 사람과 달리 구후영은 하루 사이에 변화하느라 때가 많이 생겼다.
깨달음을 얻은 사실조차 미처 몰랐던 구후영은 그저 더러웠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룡은 안 죽었어.'
목욕하면서 주변도 잊고 골똘히 고민한 결과, 자룡이 무사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자룡을 죽일 거였으면 그냥 칼 한 번 휘두르면 되었고, 납치 따위의 나쁜 목적이었다면 굳이 밧줄을 끊어주지 않았을 거다.
'빨리 태원부에 돌아가 처음부터 단서를 찾아야 한다.'
생각을 마친 구후영은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은 다음 대부인이 준비한 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구후영이 나타나자 하녀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할머니는 어디 계시오?"
"대부인께선 빨래하러 가셨습니다. 근데 새 옷은 잘 맞으시죠?"
나이가 쉰 정도 되어 보이는 하녀가 질문했다.
"몸에 딱 맞소."
"대부인께서 밤새 직접 마감하셨습니다."
구후영의 치수를 잰 적도 없는 재봉사가 꼭 맞는 옷을 만들 수 없다. 현재 구후영에게 꼭 알맞은 옷은 대부인이 밤새워 바느질해서 수선한 성과였다.
몸을 포근하게 감싼 옷에서 대부인의 정성이 느껴져 구후영은 콧등이 시큰했다.
그때, 빨래를 마친 대부인이 구슬땀을 닦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천공교검을 등에 메던 구후영이 반갑게 대부인을 맞이했다.
"할머니, 옷이 몸에 꼭 맞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네 체형이 율이랑 비슷해서 어렵지 않았다."
아들 생각이 났는지 대부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구후영은 대부인이 슬픈 게 싫어서 화제를 전환했다.
"할머니, 혹시 제 옷에서 가죽으로 된 책은 못 보셨습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대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무슨 책 말이냐?"
구후영은 그제야 책의 내용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무공서적인데. 심법과 검법이 적힌 책자입니다. 비유를 많이 사용해서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대부인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미안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아궁이에 던졌구나."
구후영은 바로 아궁이를 확인했다.
목욕과 빨래에 필요한 물을 끓이느라 불이 기세 좋게 활활 타고 있었다.
"귀한 책인데 내가 주책없었구나."
대부인이 발을 구르며 자책했다.
"아이고. 늙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원한다면 간이라고 꺼내 주고 싶은데, 정작엔 손주의 귀한 서적을 제멋대로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대부인은 미안한 마음에 대성통곡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검법도 다 익혔습니다. 향후 제가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때 직접 그리면 그만입니다."
구후영은 성격이 담백한 편이다. 비록 조건을 붙였으나 가짜 구후영과 자룡을 납치했던 네 대주도 용서했다.
이번 경우는 풍불지의 도움으로 초식도 다 익혔고 직접 본다고 선에서 뭐가 보이는 것도 아니기에 미련을 쉽게 지웠다.
'괜히 하인들이 보고 입방아를 찧으면 내 위신에 금이 간다고 걱정되셨던 거겠지.'
소문은 들불과 같아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왕가장처럼 돈이 많은진 모르나, 장원의 규모는 홍엽산장이 훨씬 크다. 이렇게 큰 장원을 이끄는 장주인 구후영이 못난 모습을 보이면 구설에 크게 오를 게 뻔하다.
미련을 떨친 구후영은 도리어 대부인을 위로했다.
"할머니, 별로 귀한 책은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마십시오."
구후영의 말에도 대부인은 미안한 마음에 아궁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불빛과 재를 뚫고 반짝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저기 뭔가 보이는구나."
대부인의 말에 구후영도 고개를 돌려 아궁이를 확인했다. 가죽이 타며 생긴 재 사이로 뭔가 특이한 게 보였다.
구후영은 아궁이로 가서 부지깽이로 재를 뒤졌다.
반짝인 건 돌돌 말린 족자를 닮은 물건이었다.
구후영은 의문의 물건을 살살 끄집어내 입으로 후후 불면서 식기를 기다렸다.
'금속 실로 천을 짜는 건 당나라 때 나온 기술로 아는데.'
"어서 마른 천을 가져오거라."
대부인의 지시에 하녀가 바로 마른 천을 대령했다. 구후영은 마른 천을 받아 금속 실로 짠 천을 살살 닦으며 천천히 펼쳤다.
"옛날 글자구나."
금속 실로 짠 천에 다른 색의 금속 실로 글자를 수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 옛날 글자여서 대부인은 내용까지 알아보지 못했다.
'진짜 귀한 책이었구나. 이거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다.'
대부인은 귀한 책을 태운 잘못을 조금이라도 만회한 것 같아서 살짝 안도했다.
"할머니 덕분에 검법을 더 쉽게 익힐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금속 천의 내용을 확인한 구후영이 기쁨에 젖어 외쳤다.
'아이가 참 바르고 크게 자랐구나.'
구후영은 아까운 서책이 타서 아쉬울 텐데도 대범한 모습을 보였고, 음차양착으로 잘못한 일이 잘되자 공로를 대부인에게 돌렸다.
대부인은 정말 훌륭히 자란 구후영이 정말 고마웠다.
"그래, 네가 바르니까 할머니가 주책없이 행동해도 복이 되는구나."
구후영은 금속 실로 짠 천을 들고 우상단의 네 글자를 거듭 확인했다.
천하검보.
유일검법만큼 광오한 이름이었고, 내용 역시 유일검법만큼 기초적이었다.
그러나 구후영은 더는 지하도시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난화검법에 필요한 기본 수련법이다.'
난화검법의 초식에 많이 들어가는 기본 동작의 수련 방법에 관해 적혀있었다. 난화검법을 초식으로밖에 수련할 수 없었던 구후영에겐 가뭄의 단비요 사막의 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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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인이 구후영을 데리고 술도 마시고 산책도 하면서 그간 쌓인 한을 푸는 사이, 어느새 밤이 되었다.
구후영은 대부인과 함께 식후 차를 마시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부인과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울수록 자룡 생각이 더 간절하다. 그런데 정작 떠나고 싶다고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착한 구후영이 갸륵했는지, 하늘이 구원병을 보냈다.
"고모, 조카는 당분간 숨어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연무쌍의 말에 대부인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그간 홍엽산장을 암해한 게 들켰으니 놈들도 이젠 자중할 거다. 철혈방과 연을 끊는다고 했으니 더 공격할 이유도 없고."
구후진과 구후율의 죽음은 홍엽산장의 피해망상으로 몰 수 있지만, 스물이 넘은 사람이 죽고 금검당 부당주도 연관이 되었기에 놈들도 홍엽산장을 더 건드리기엔 부담이 크다.
"다른 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도당이 철추당과 손잡고 금검당을 치려 합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육비나타 때문에 민심이 들끓습니다. 은도당은 고모와 조카 목에 칼을 대서라도 지지 발언을 얻어내려고 할 겁니다."
은도당 입장에선 대부인과 구후영을 납치해서라도 철혈방 소속과 호북 무림인들을 선동해 금검당을 치고 싶다.
"내가 철혈방과 관계를 끊는다고 그리도 확실히 말했거늘."
대부인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한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이게 강호입니다. 깊고 파도가 세서 어떤 자도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죠."
연무쌍의 말은 구후영에게 큰 울림을 줬다.
'강해져야 한다.'
그간 자신의 성취에 알게 모르게 도취했던 구후영이었다. 다행히 현재 성취로도 감당하기 힘든 큰 파도를 만난 덕에 작은 미망에서 쉽게 깨어나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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