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려풍행雷厲風行
손자병법에 이르길.
기질여풍其疾如風에 기서여림其徐如林이고 침략여화侵略如火에 부동여산不動如山이다.
행군할 땐 바람처럼 신속해야 하고 주둔할 때 숲처럼 조용해야 하며, 공격할 땐 불같이 거세야 하고 수비할 땐 산처럼 단단해야 한다.
구후영 등은 늘 공격하는 쪽이었기에 당연히 바람처럼 불처럼 움직였다.
"두 분은 빠지시오."
구후영은 소림과 무당을 배제했다. 소림은 스님이 아닌 척할 수 없기에 반드시 빼야 했고, 무당도 일반 강호 무인 차림을 하여 도사 티가 안 나긴 하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 열외로 했다.
거기에 이어 청의방주를 비롯해 실력이 부족한 자들 역시 제외했다.
그렇게 여러 기준으로 하나둘 배제하다 보니 결국 다섯이 남았다.
구후영, 위종, 막불손, 현월궁 막내 궁주, 귀연.
귀연은 진법으로 여러 가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고, 현월궁은 경공과 은신술에 능해 구후영과 함께 황궁에 침투할 수 있다.
막불손은 비록 침투에 적합하지 않으나 무력이 강하다. 무공을 모르는 귀연을 지키는 역할로 딱 좋다.
위종은 뭔가 아는 게 있는 눈치기도 하고, 본인이 적극적으로 동행을 자처했다.
구후영은 의심의 여지가 많은 위종을 당분간 곁에 둘 생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다섯이 된 일행은 두 무리로 나뉘었다.
막불손과 막내 궁주가 위종을 데리고 순천부로 가기로 하고, 구후영은 귀연을 데리고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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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
청총을 본 귀연이 달려가 부드러운 털을 마구 만졌다. 청총은 구후영과 며칠 떨어져 있은 것 때문에 심통이 났는지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굳이 귀연에게 화풀이하진 않았다.
'세상에 좋기만 한 건 없구나.'
예전에 은밀히 움직여야 하는 일 때문에 청총을 떼어 놓고 외출한 적 있다. 그런데 청총이 자신을 묶은 고삐를 끊고 구후영을 찾아왔다.
당연히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그 뒤에도 똑같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제야 구후영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내는 건진 모르지만, 청총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도 구후영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그 탓에 구후영은 늘 청총을 타고 다녀야 했고, 덕분에 청룡대협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은밀히 움직여야 할 땐 지금처럼 고소한 삶은 콩과 싱싱한 채소로 최대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순천부로 가야 한다. 근처에 우리 장원이 있지?"
"강이 말라서 마을 전체가 이주한 곳이 있는데, 근처의 장원 하나 사둔 게 있습니다."
"거기서 보자."
말을 마친 구후영이 안장을 얹고 고삐를 풀었다.
투레질로 흥분을 표출하던 청총은 구후영과 귀연이 등에 타기 무섭게 발굽을 놓아 달렸다.
'이러다 필마온 되는 게 아닌가?'
필마온은 말을 관리하는 관리로, 군마가 귀하던 옛날엔 꽤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병 수십만씩 양성하는 시대엔 그저 말똥 치우고 여물 주는 자들의 우두머리밖에 안 되어 다들 기피하는 관직이었다.
유종근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청총은 구후영과 귀연을 업고 질풍같이 달렸다.
일반 말과 달리 청총은 길을 가리지 않았다. 튼튼한 발목 덕분에 헛디뎌도 다치지 않았고, 큰 강을 만나면 사람 둘을 태운 채 헤엄쳐서 건넜다.
덕분에 이인일마는 고작 이틀 만에 순천부 근처에 도착했다.
"형님, 저깁니다."
보통 길치여도 지도를 보면 길을 곧잘 찾는데, 구후영은 비급은 잘 읽어도 지도는 전혀 보지 못했다.
낙화문의 장원으로 가는 길은 당연히 유종근에게서 지도를 받은 귀연이 안내했다.
낙화문의 장원은 꽤 지저분했다.
이 장원은 표국 사람들이 순천부를 지날 때 비싼 객잔에 묵는 돈을 아끼려는 목적에 싸게 구매한 것으로, 가끔만 사용했다.
표행에 지친 사람들이 떠나면서 깨끗하게 청소까지 해놓을 리 만무하고, 이미 더러워진 곳에 온 사람들이 굳이 그걸 깨끗이 치우려 하지 않았기에 계속 지저분해지기만 했다.
구후영은 청총을 고삐로 묶은 다음 귀연을 데리고 가서 윤기가 흐르는 콩을 잔뜩 사 왔다.
푸르륵.
콩 삶는 냄새에 기쁨에 차 투레질하는 청총을 보며 구후영이 속으로 한탄했다.
'말인지 사람인지.'
구후영은 청총이 분명 사람 말을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안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삶은 콩과 귀연이 근처에서 베온 싱싱한 풀을 섞어 구유에 놓아준 다음, 구후영은 방에 들어가 수련에 몰두했다.
태원현경.
왕중양이 만든 선천기공.
태극혜검이 무공을 수련하는 데 있어 전반적인 것에 관해 서술했다면 태원현경은 그저 내공에 관해서만 적었다.
그것도 현재 강호인들이 수련하는 후천기공이 아닌, 인간의 원신을 키우는 선천기공에 관한 것이었다.
도가에서 높은 경지로 치는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은 여기서 고작 선천기공에 입문하는 필수 관문일 뿐이었다.
구후영은 태원현경을 익히기 시작한 지 반년도 안 되어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뤄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태원현경을 읽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현 강호에서 경지만 보면 구후영보다 높다고 자부할 사람이 얼마 없다.
그런데 태원현경에선 겨우 입문에 불과했다.
게다가 대부분 무공은 대성하면 어떤 모습일 거란 대강의 기대가 있는데 태원현경은 그렇지 않았다. 대성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 대성한 다음 어떤 재주를 이룰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온갖 깨달음을 적은 태극혜검과 달리, 태원현경은 그저 수련 방법만 적혔다. 머리 아프게 구결을 해석할 필요도 없이 그저 현경에 적힌 방법대로 꾸준히 수련하기만 하면 되었다.
'중양 진인은 왜 이걸 만들었을까?'
황제는 태원현경을 익히는 것이 신선이 되는 길이라고 믿으며 현재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천마 역시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앞두고 종남파에 태원현경의 일독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정작 태원현경을 만든 중양 진인은 환갑이 갓 지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설마 만들기만 하고 익혀내지 못했던 것인가?'
어쩌면 왕중양은 무공을 만드는 재주만 있고 익혀내는 재주는 별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끝으로 구후영은 삽시간에 무아지경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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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 도착한 유종근에게 청총을 맡긴 구후영은 귀연과 함께 한밤중에 순천부의 성벽을 넘어 막불손 등과 합류했다.
"먼저 동창을 치는 게 좋겠소."
"지금?"
"밤이 길면 꿈이 어수선해지는 법이오. 오늘 안에 호 선생이 누군지 잡아내야겠소."
구후영이 귀연을 업고 막불손이 위종을 업었다. 일행은 경공과 은신술을 함께 펼치며 순식간에 동안문 근처의 동창 집무실에 도착했다.
"진법."
구후영의 지시에 귀연이 보따리를 풀고 순식간에 진법을 쳤다. 대단한 건 아니고 소리를 굴절시켜 멀리 퍼지지 않게 하는 용도였다.
"세 분은 근처에서 호응하시오."
말을 마친 구후영은 위종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엔 환관 한 명과 금의위 세 명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 저자는 아니오.
구후영의 등에 업힌 위종이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어떻게 아시오?]
구후영이 전음으로 질문했다.
- 칠살문의 역용술은 귀가 서고 눈에 빛이 고이오.
위종이 쓴 글씨를 읽은 다음 다시 환관을 보니 귀가 축 처지고 눈이 흐리멍덩했다.
[저게 본모습일지도 모르잖소.]
-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소.
어차피 귀검을 강호에 풀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몬 수괴 중 하나다. 동창 창주가 호 선생이 맞건 아니건, 기회가 닿은 김에 목숨은 반드시 취할 생각이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이 바로 움직였다.
세 금의위는 동시에 점혈 당해 잔을 든 웃는 얼굴로 그대로 굳어버렸고, 환관 역시 입은 멀쩡하나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반역이다!"
깜짝 놀란 환관이 목청이 터지라 고래고래 외쳤지만, 일차적으로 구후영이 친 내공의 벽에 막혔고, 이차적으로 귀연이 친 진법에 막혔다.
구후영은 예전에 황제를 치료할 때도 내공으로 소리를 가두는 재주를 보인 적 있었는데, 경지가 깊어지고 내공도 많아진 지금은 다른 사람의 소리마저 가둘 수 있게 되었다.
"묻는 말에 잘 대답하면 검을 뽑지 않겠다."
구후영이 육합전성으로 소리를 울렸다.
"사, 살려주시오. 저기 금궤에 전표가 있는데 다 가져가시오."
"넌 누구의 지시에 따르느냐?"
"당연히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
"그런 입에 발린 개소리 말고."
"난 황후의 사람이고 공 태감의 직속 부하요."
부전자전인지.
신선술에 빠진 황제에 이어 태자마저 장생불로에 빠져 하루에 모용건의 시체를 보관한 방을 십수 번씩 방문했는데, 시체가 갑자기 썩어버려서 장생불로의 꿈이 깨질까 봐 걱정이 태산인 탓이었다.
덕분에 황후만 신났다.
유근이 죽고 생긴 장인태감의 자리에 자기 사람인 공현을 꽂았고, 유근의 죽음으로 유명무실해진 서창을 없앤 대신 그간 공들여온 동창이 위세를 얻었다.
그렇게 황태후의 손발을 다 자른 것도 모자라 황제는 태원현경에 빠지고 태자는 장생불로에 심취했다.
눈치라면 갓 시집온 며느리 부럽지 않은 조정 대신들이 재빨리 황후 앞에 줄을 서서 충성 경쟁을 해댔다.
환관이 황후의 사람이라고 솔직히 밝힌 것도 상대가 현재 어떤 형세인지 알면 자기 목숨을 살려두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호 선생이 누군지 아나?"
"글쎄. 아는 사람 중에 호씨가 몇 명 있긴 한데,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소."
'아니구나.'
눈앞의 환관이 호 선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살짝 실망한 마음으로 구후영은 침을 꺼내 환관의 다섯 혈도에 차례로 꽂았다.
만약 상대가 역용술을 펼쳤다면 저 다섯 침으로 그걸 깨뜨릴 수 있다. '반드시'라고 할 순 없지만, 구후영이 그간 연구한 역용술을 간파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다.
"아, 아파."
침을 꽂고도 환관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구후영이 앞서 말한 대로 이게 호 선생의 본모습일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은 진짜 먼지 한 톨만큼밖에 안 되었다.
"이만 끝내지."
말을 마친 구후영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에 점혈 당한 세 금의위가 벌떡 일어서며 옆에 끌러 놓은 수춘도를 뽑아 들었고, 거의 동시에 환관의 몸에 칼을 박았다.
그 괴이한 모습에 환관은 놀란 나머지 미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곧이어 구후영이 또 한 번 손을 휘저었다.
세 금의위는 경악한 얼굴로 자기 오른손 편의 사람을 향해 수춘도를 휘둘렀다.
"잘 살피면 파탄이 보일 것이오."
위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정도 내공과 의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면 구후영이 뭘 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으론 격공섭물도 허공답보도 다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경지다.
내공으로 혈도를 짚인 상대의 몸을 제어하는 것 역시 이론상으로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구후영처럼 실제 해내는 사람은 여태까지 알려진 적이 없다.
"이 넷 모두 엮인 곳이 많아서 제대로 조사하진 않을 거요."
괜히 깊이 조사하면 많은 사람의 흠만 부각될 뿐이다.
구후영은 누가 조사를 맡든 최대한 연루되는 사람이 적은 쪽으로 대충 마무리할 거라는 데 자신이 지금까지 쌓은 내공 전부를 걸 자신이 있었다.
- 작가의말
뇌려풍행 - 우레처럼 기세차고 바람처럼 표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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