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종인산曲終人散
남북조 북위 효문제 시절.
이표와 원지가 탄 마차가 길에서 마주쳤다. 관직은 이표가 높지만, 원지는 부친이 효문제의 목숨을 구한 적 있다. 성격이 드센 둘은 서로 길을 비키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효문제한테 시비를 가리러 찾아갔는데, 효문제는 둘 다 아끼는 신하라 누구 편을 들기 좀 그랬다.
효문제는 결국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반씩 나눠서 써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분도양표分道揚鑣(길을 나눠 재갈을 날리다)라는 말이 나와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상황에 쓰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홍엽산장은 철혈방과 연을 끊으려 한다."
대부인의 선언에 연무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복장표국을 도우러 온 자들은 예상을 너무 벗어나는 전개에 어안이 벙벙했고, 철혈방에 속하거나 한 손 거들러 온 자들은 홍엽산장이 철혈방에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당황하여 굳어버렸다.
"장 당주. 뭐라고 좀 말씀해 보시오."
철추당의 골간들이 장선에게 사정했다.
"방금 다 듣지 않았소? 나도 조만간 당주 자리를 내놓겠소."
철혈방과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하기 전에 대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이 일의 발단은 대부인의 남편이자 전전대 홍엽산장의 주인인 구후진 때로 거스른다.
당시 철추당 부당주였던 구후진은 당주인 연남산의 여동생 연추상과 혼인했다. 둘은 혼인 후 구후율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얼마 안 지나 구후진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그때부터 연남산은 철추당의 일을 네 대주와 수하들에게 맡기고 홍엽산장에 살다시피 하며 여동생과 조카를 보호했다.
지금 대부인이 된 연추상에겐 별 위협이 없었지만, 정체불명의 무리로부터 구후율의 목숨을 구한 일은 거의 해마다 한 번은 있었다.
몇몇 경우는 연남산의 대처가 과한 면이 있었으나, 몇 번은 진짜 연남산이 아니었으면 구후율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보이지 않는 손이 점점 더 강하게 숨통을 조여왔다. 연남산은 결국 철추당의 당주 자리를 내놓고 구후율을 보호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기로 했다.
당시 철추당은 실력이나 재력이나 금검당과 은도당에 형편없이 밀렸다. 믿을 거라곤 홍엽산장의 주인이 대대로 철추당의 부당주를 맡아왔다는 것과 연남산의 여동생이 홍엽산장의 안주인이라는 건데, 연남산은 그만둔다 그러고 구후율도 철추당 부당주를 맡기 싫다고 하여 커다란 위기에 놓였다.
홍엽산장의 후광이 사라지면 철추당은 일 년도 안 걸려 금검당이나 은도당에 흡수될 게 뻔하기에, 이들은 연무쌍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연무쌍은 권법 수련에 한참 재미를 느낄 때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주 자리를 거절했다.
이들은 궁여지책으로 연남산의 대제자 장선에게 사정했고, 장선은 사부와 홍엽산장에 철추당이 필요하다는 설득에 넘어가 당주 자리를 수락했다. 구후율도 철추당의 일에 관여를 안 하는 조건으로 부당주 자리를 맡았다.
이때부터 한동안 구후율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정체불명의 무리가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느 해 가을에 구후율이 태어나기 전부터 홍엽산장에서 일했던 하녀가 음식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연남산이 심후한 내공으로 서안부까지 목숨을 붙여뒀고, 안물이 구후율을 저승에서 끌어왔다.
이 사실은 홍엽산장이 극비에 부쳤기에 장선마저도 모르던 일이었다.
경각심을 크게 키운 대부인과 연남산은 기존에 말이 오가던 혼처를 전부 거절하고 구후율의 이름과 신분을 숨긴 채 다른 혼처를 찾았다.
결국 양양과 천구백 리나 되는 머나먼 연안부에서 괜찮은 집안을 찾았고, 구후율이 아닌 가짜 이름으로 혼인했다.
혼인도 비밀리에 한 마당에 당연히 며느리는 물론이고 손주도 홍엽산장에 데려올 엄두를 못 냈다. 그 탓에 대부인은 손주를 낳아준 며느리를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연남산이 내상이 도져 비명횡사했다. 구후율이 중독됐을 때 무리하여 내공을 운용한 탓에 내상을 입었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몇 해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연남산이 죽고 채 석 달도 안 되어 구후율 역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구후진 때와 마찬가지로 외상이나 내상은 물론 중독 증세도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구후진이 죽을 때도 약관이 갓 넘었고, 구후율 역시 이십 대 중반이었다. 명확한 사인이 없는데 무공을 익힌 서른도 안 된 건장한 사내가 갑자기 죽는 건 누구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구후율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는지는 차지하고, 표면적으로 홍엽산장의 대가 끊긴 바람에 철혈방은 해체 위기에 놓였다.
함께 양양을 수비했던 자들의 후손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철혈방이란 이름을 같이 쓰긴 했지만, 철혈방은 시작부터 여러 무리였다.
철혈방을 구성한 삼당과 오단은 원래 각자 무관한 세력이었으나 몸통을 키우다 보니 접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서로 싸우기보단 화합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에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큰 장애가 있었다.
당시 호북에는 두 개의 강한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귀주의 약초를 서안과 낙양에 가져다 파는 거로 거대한 이문을 남기는 은도문이고, 하나는 호남의 철을 절강과 강소에 파는 금검문이었다.
이 둘은 서로 방주 자리를 맡겠다고 다퉜고, 이대로는 십 년이 지나도 철혈방이 만들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철추방이 나섰다.
야장과 나무꾼 위주로 뭉친 철추방은 돈도 많지 않고 무력도 금검문이나 은도문에 못 미쳤으나 홍엽산장의 장주를 설득해 철추방 부방주 자리에 앉혔고, 홍엽산장의 후광을 빌어 철추방 방주가 철혈방 방주가 되었다.
억지로 이룬 삼강 체제에 철혈방이 겨우 만들어졌고, 홍엽산장은 철혈방이란 커다랗고 조잡한 건물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두고두고 철혈방의 화근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서로 융합했으면 홍엽산장이 없어도 괜찮았을 텐데, 철추당은 양양에 있고 금검당은 호남의 승덕부에 있고, 은도당은 형주부에 뿌리를 뒀다곤 하나 대부분 제자가 귀주의 동인부에 있었다.
다섯 단도 다섯 지역에 나뉘어 있어 같은 철혈방의 이름을 쓰지만, 실질적으론 여덟 개의 세력이 상당히 긴 기간 그대로 유지됐다.
당금에 와선 다섯 단이 세력을 유지하기 어려워 금검당과 은도당 밑으로 들어갔고, 철추당은 처음에 철혈방을 만들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금검당과 은도당과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홍엽산장의 대가 끊기면서 철추당의 후광이 사라졌기에 금검당과 은도당의 다툼이 더 치열해질 게 뻔하고, 결국 철혈방은 둘로 찢어질 운명에 놓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부인이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슬픔을 딛고 꿋꿋이 버티며 홍엽산장을 잘 운영한 덕분에 잠깐의 소란을 끝으로 철혈방은 일시적인 평정을 찾았다.
물론, 대부인도 확실한 속셈이 있었다.
아이의 존재를 당분간 비밀로 하고, 구후율의 아이에게 여의권을 가르치고 영약을 먹여 내공도 키워서 연남산 정도의 고수로 만든 다음에야 진실을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연안부로 간 연무쌍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바로 구후율의 회임한 부인과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북원 기병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다른 지역으로 피난 갔을 가능성이 두 번째였다.
구후진과 구후율을 해친 자들의 소행이 아닐지 걱정된 대부인은 장선에게 구후율의 아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장선은 믿을 만한 자들과 어린 제자들을 데리고 연안부 근처에서 수소문했다.
아무런 수확도 없이 일 년 넘게 헤매던 중, 대동부에서 철혈방의 암호가 발견되었다. 장선은 바로 대동부로 갔고, 거기에서 네 제자가 서신을 든 아이 한 명을 찾아냈다.
여섯 살이라곤 하나 덩치는 열 살도 넘은 것 같은 아이는 자신이 구후영이고 자기 아버지가 구후율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남긴 글이라며 손에 든 서신을 장선에게 건넸는데, 거기엔 두 아이의 이름과 생신팔자 그리고 그간의 사연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장선은 비밀리에 아이를 데리고 홍엽산장으로 돌아갔고, 대부인은 고심 끝에 아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구후영은 고작 여섯 살에 철추당 부당주 자리에 앉았고,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내공과 외공 모두 꽤 높은 경지를 이뤄 주변 사람을 기껍게 했다.
그러던 중, 복장표국과 배월교가 표물 문제로 홍엽산장을 찾았다.
그 과정에 금검당 부당주 육비나타가 구후영을 죽였고, 육비나타의 추천으로 장선의 친위대가 된 자가 네 대주와 복장표국의 증인들을 죽여 입막음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진짜 구후영이 따로 있었고, 더는 철혈방의 일로 홍엽산장의 주인을 위험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대부인이 철혈방과 의절義絶할 것을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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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곡불종無曲不終 무연불산無宴不散.
끝나지 않는 연주가 없고 파하지 않는 잔치도 없다.
어차피 좋은 일로 온 게 아닌 복장표국 측 사람들은 찝찝한 마음으로 홍엽산장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찝찝해도 철추당과 철혈방을 도우러 온 자들의 마음만큼 무겁진 않았다.
"대부인, 제발 좀 더 고민해 보심이."
"철추당을 위해, 철혈방을 위해 진정 홍엽산장의 씨를 말릴 생각이더냐!"
대부인이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게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내 부군 때는 미처 몰랐고, 아들 때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오늘 육비나타가 영이를 죽인 걸 보고 확신했다. 철혈방과 관계를 끊지 않으면 홍엽산장에 영원히 안녕할 날이 없다는 걸."
"철추당만 홍엽산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홍엽산장도 철추당의 무력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구후영이 앞으로 세 걸음 나섰다.
"그건 아닌 듯하오. 사십 년에 걸쳐 홍엽산장을 위협한 세력이 있는데 철추당은 그림자도 찾지 못했소. 철추당이 무능한 건 아닐 테니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오."
아까 들린 어마어마한 괴성이 구후영이 지른 것임이 알음알음 알려진 탓에 철추당 골간들은 구후영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젠 대놓고 홍엽산장에서 사람을 죽였소. 네 대주와 부당주, 여덟 명의 친위대에 여덟 명의 복장표국이 데려온 증인까지 스물한 명이나 죽었소. 게다가 금검당 부당주인 육비나타가 정체를 들키고 도주하다가 배월교주 손에 죽었소."
구후영의 말에 숨은 뜻을 못 알아차린 철추당 사람들은 눈알만 분주하게 굴렸다.
"누군가가 가장 적은 힘을 들여 철혈방을 와해하려고 수십 년 전부터 음모를 꾸몄고, 해당 세력은 금검당 부당주를 매수하거나 자기 사람을 금검당 부당주 자리에 올릴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이오."
그제야 가장 굵은 줄이 끊어진다는 생각으로 편협했던 철추당 골간들의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놈들이 대놓고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소. 이대로는 철추당과 홍엽산장이 함께 죽소. 차라리 관계를 청산하는 게 홍엽산장도 살고 철추당도 사는 길이오. 함께 하면 백해무익하고 갈라서면 백익무해한데, 그대들은 왜 이리도 집착하는 것이오."
말을 마친 구후영은 홀로 남겨져서 신음하는 혈교룡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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