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심검絶對心劍
장삼풍이 구십 세 즈음에 갑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 검법을 시연했다. 제자들이 감탄하며 무슨 검법이냐고 물으니 장삼풍이 양의검법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제자 한 명이 '사부께선 검을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손에 잡은 적은 없지만, 마음속엔 늘 검이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심검은 어떤 경집니까?"
구후영이 질문했다.
"글쎄. 심검이란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니 그게 어떤 경지인지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경지 따위에 집착하지 말고 실속 있게 수련이나 하게나."
"경지를 나누는 게 무의미하다는 겁니까?"
"의미는 있지. 절정과 일류의 차이는 크니까. 그렇다고 절대적인 건 아니야."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구후영에겐 조금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절정은 내외의 조화가 이뤄진 경지를 말하네. 절정에 이르면 작은 움직임도 합리적이게 되지. 그렇기에 절정을 못 이룬 자의 수가 훤히 보이고, 틈이 훤히 보이네."
구후영은 풍불지의 말에 집중했다.
"더구나 내외의 조화가 이뤄져 기세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지. 하지만 말일세. 심지가 굳어 상대의 기세에 짓눌리지 않고 무공 이해까지 높다면 절정이 아닌 무인이 절정의 무인을 이기지 말란 법도 없다네. 마치 자네처럼 말이지."
"제가 절정의 무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검술 경지가 높고 괴이한 외공 덕분에 체력과 힘도 뛰어나잖은가. 심지가 굳어서 쉽게 위축되지 않으니 검이 잘리는 것만 조심하면 절정에 발 하나 걸친 정도의 무인에겐 승산이 반 넘네."
곁에서 듣던 약초꾼이 속으로 감탄했다.
'저리 대단한 자를 그저 의원으로 생각했다니. 진짜 눈이 삐었지.'
사실 구후영의 의술이 평범했다면 일행도 무인으로 의심했을 거다. 보기만 해도 가망이 없는 장방선생의 상세를 호전시키고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오기까지 했기에 무인은 아닐 거라고 선입견을 가졌을 뿐이다.
게다가 고약과 침통을 휴대했고 두꺼운 옷을 입은 탓에 자신들이 원하던 의원이 아니라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못했다.
'아들이 완치됐으니 이대로 죽어도 원이 없다. 남은 목숨도 의원이 살린 거니까 아끼지 말고 의원 동생을 찾는 데 바치자.'
약초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후영에게 받은 은혜를 꼭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절정의 고수와 대결할 때 뭘 조심해야 합니까?"
"끊김을 조심해야 하네. 어설픈 자들은 필살을 자신한 초식이 막히면 머리가 복잡해지며 뭘 해야 할지 망설이네. 절정에 이른 자들은 웬만해서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네."
어설픈 절정이 있을 순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고된 수련과 무수한 실전으로 절정의 경지를 밟았기에 잠깐의 머뭇거림으로 열세에 처하고 목숨까지 잃을 가능성이 크다.
구후영은 풍불지의 말을 곱씹으며 또 뭘 질문할지 고민했다.
[왔다. 숨어라.]
약초꾼이 황급히 모닥불을 끄고 그간 캔 약초와 달인 약을 들고 멀리 사라졌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품에 안은 채 풍불지의 뒤에 있는 웅덩이에 숨어서 숨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풍 대협. 인육이 입에 맞나 봐요. 그새 얼굴이 좋아졌어요."
한 번 들어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구후영은 대화 내용을 귓등으로 흘리며 정신을 한없이 집중한 채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질 텐데, 어떻게 오늘 끝장을 볼까?"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다리도 성치 않은 걸로 아는데."
"제일 중요한 다리는 멀쩡하거든. 궁금하면 가까이 와. 내가 보여줄게."
"흥."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비월부를 던졌다. 풍불지는 몸을 흔들어 비월부를 가볍게 피했다. 풍불지의 뒤로 갔던 비월부가 천천히 멈추더니 맹렬한 기세로 돌아왔다.
풍불지는 여전히 안 움직이고 제자리에서 상체만 흔들어 비월부를 피했다.
"어머. 다리가 불편하신가 봐요."
"맞아. 되게 불편해."
비월부가 다시 날아왔다. 풍불지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이다.'
구후영과 풍불지는 여인이 세 번째로 비월부를 던질 때 움직이기로 미리 약속했다.
"가랏!"
여인이 비월부를 전의 두 번보다 훨씬 강하게 던졌다. 비월부가 회전하며 내는 묵직한 소리에 구후영은 솜털이 곤두섰다.
'할 수 있을까?'
천공교검을 믿지만, 비월부가 어떤 무기이고 어디가 약점인지 몰라 자신은 없었다. 더구나 앞선 두 번과 달리 강한 힘으로 던졌기에 자신이 정확한 시점에 타격할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그러나 구후영에겐 망설일 틈조차 없었다.
'한다.'
마음을 다잡고 웅덩이에서 벌떡 일어난 구후영은 호흡을 멈추며 검을 추켜들었다.
한 쌍의 비월부가 반전하여 구후영을 향해 날아왔다. 현재 풍불지는 구후영을 믿고 회피를 포기한 채 여인과 단판 승부를 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구후영이 비월부를 막지 못하고 흘리면 풍불지의 목숨이 위태할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집중력을 끌어올린 구후영은 모든 잡념을 지운 채 천공교검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내공이 없으나 공청석유 덕분에 힘이 늘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한 베기를 펼쳐냈다.
서걱, 서걱.
두 번의 베기에 한 쌍의 비월부가 깔끔하게 잘렸다. 동시에 느려졌던 구후영의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지?'
자기 역할을 훌륭히 마친 구후영은 간절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풍불지의 등이 급속히 멀어졌다.
"걸렸다."
동시에 여인이 득의에 찬 얼굴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뱉어냈다. 구후영의 마음에 불안이 가득 차올랐다.
"헙!"
갑자기 여인 뒤에서 똑같은 차림에 얼굴도 똑같은 여인이 나왔다. 이게 길거리라면 재밌는 구경이었다고 엽전 한두 푼 던져줬을지도 모르지만, 생사를 다투는 대결이라 구후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함정이었어.'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두 여인이 구후영의 존재와 신검의 계획을 알고 꿍꿍이를 꾸민 게 틀림없다.
"조심!"
아직 몸도 채 못 돌린 구후영이 할 수 있는 건 큰소리로 경고하는 것뿐이었다.
"죽어!"
어깨 나란히 선 두 여인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는 풍불지를 향해 똑같은 초식을 펼쳤다.
이들이 펼친 초식은 다름 아닌 적혈장의 절초인 홍일추운紅日推雲이었다. 강맹한 힘을 품었지만 그저 구름 밀듯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보이는 게 특징이다.
상대가 여자고 초식이 흉험해 보이지 않아 방심하다가 홍일추운에 즉사한 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흥!"
대경실색한 구후영과 달리 풍불지는 코웃음을 치며 신형을 멈추더니 빈손을 살며시 말아 쥐고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악!"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고 두 여인이 아닌 허공에 휘둘렀다. 심지어 빠르지도 않고 맥없었다.
그런데 두 여인이 기절초풍해 비명을 지르더니 급기야 피를 토하고 도망쳤다.
"이게 바로 심검이네. 크큭. 아이고, 다리 아파."
벌러덩 바닥에 누운 풍불지가 얼굴을 찡그린 채 즐겁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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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정지를 하는 바람에 풍불지의 다리가 부러졌다. 어떻게 보면 괜히 부러뜨리는 수고를 던 셈이지만, 구후영은 언제 두 여인이 찾아올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약초의 효능을 제대로 몰라 장담하긴 힘듭니다. 그래도 한 달 안에는 완치할 것 같습니다."
뼈를 제대로 맞춘 다음 나뭇가지를 대고 옷을 찢어 꼰 끈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그간 만든 고약도 안 아끼고 덕지덕지 발랐다.
"내상을 입었으니 근 시일 내엔 못 찾아올 거야. 그러나 워낙 사이한 무공을 많이 아는 자매라 조심해야 하네."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말투 자체는 천하태평이었다.
"둘인 걸 알았습니까?"
"그럼. 엿들을 때를 골라 일부러 계획을 말해 함정을 판 것도 나지."
백화궁의 궁주는 두 명으로 쌍둥이 자매다. 둘은 번갈아 찾아와서 풍불지를 염탐하는 동시에 힘을 회복하지 못하게 소모했다.
게다가 평소에도 지청술地聽術로 틈틈이 엿들었다.
풍불지는 미세하게 다른 목소리와 품은 기운 등으로 두 사람인 걸 알았지만, 짐짓 모른 척 티를 내지 않았다.
"자네가 내 다리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모험한 거네."
여인도 풍불지도 서로를 상대함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력을 기울인다는 건 여력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고, 여력을 남기지 않은 공격은 실패하면 죽음으로 직결된다.
그렇게 몇 년이나 서로 소모하기만 했는데, 구후영의 존재가 전환점이 되었다.
우선 구후영은 의원이고 반송장이나 다름없던 약초꾼을 치료했다. 풍불지에게 현재 상황을 바꿀 희망을 주는 첫 번째 조건이었다.
다음으론 백화궁의 제자로 보이는 자와 눈을 감고도 비등하게 싸울 정도로 구후영의 무공이 대단했다. 시름 놓고 구후영에게 비월부를 맡길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자매가 구후영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다. 제자 한 명이 손을 잘렸다고 했으니 당연히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고, 풍불지에게 괜찮은 수준의 조력자가 생겼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세 조건이 모두 구비되었기에 풍불지는 과감히 함정을 팠다. 풍불지의 계획을 엿들은 자매는 이를 역이용해 힘을 합쳐 풍불지를 제압하려 했고, 그 탓에 풍불지의 진짜 함정에 빠져 심검에 당했다.
'좋은 사람과 정직한 사람은 다르다.'
평소 풍불지의 말을 들으면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두 여인을 상대하며 같은 편까지 속여서 함정을 판 수단을 보면 마냥 정직한 사람은 아니다.
'정직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 가끔은 모두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구후영이 자룡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기만이다. 그러나 이는 자룡을 위하고 구후영 자신도 위한 일로, 나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정직한 거랑 고루한 걸 헷갈렸던 거구나. 둘이 비슷하긴 하나 굳이 달리 부르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인데.'
검술뿐이 아니라 인생에 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풍불지가 너무 고마웠다.
"풍 대협. 아까 그건 무슨 검법입니까?"
마음에 고마움을 새기던 구후영은 치료에 집중하느라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다리가 아프니까 침 좀 더 놔주게."
구후영은 침 몇 개를 더 꽂아 통증을 적당히 줄여줬다. 이번 경우는 다리가 새로 부러졌기에 너무 안 아파도 문제다.
"이제야 살겠구먼. 방금 그건 솔직히 심검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어. 그저 흉내를 조금 낸 거라고 할까? 진정한 심검은 절대를 논하는 대단한 경지라네."
"혹시 저들을 토혈하게 한 건 기검氣劍입니까?"
"아니야. 그저 빈손이었어."
자매는 적혈장의 제일 어렵고 대단한 초식을 펼치며 더없이 집중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풍불지가 갑자기 어마어마한 경지의 검법을 펼쳤다.
비록 빈손이었지만, 자매도 경지가 낮지 않아 풍불지가 어떤 검법을 펼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았다.
그게 패착이었다. 차라리 경지가 낮아 무슨 헛짓거리냐고 코웃음으로 넘겼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자매의 경지는 빈손으로 펼친 검법을 알아보고 그 위력을 추정할 수준을 넘었다.
높은 경지와 집중력이 오히려 해가 된 셈이다.
"허공에 휘둘러 마음에 꽂았다고 할까?"
풍불지의 말에 구후영의 눈이 휑해졌다.
- 작가의말
풍불지의 심검은 약한 자에게 안 먹히는 불완전한 필살기입니다. 물론, 약한 자에겐 그냥 검을 휘두르면 되니까 큰 약점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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