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의성形隨意成
권법의 최고 경지는 무엇일까?
권법은 형形에서 시작한다. 천하에 무공이 백 개 있다고 치면 최소 오십은 권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흔한 무공인데, 모든 권법은 예외 없이 형을 익히는 데서 출발한다.
형을 익힌 다음 할 일은 동작에 경勁을 싣는 것이다. 허나 인간의 힘은 한계가 명확해 순수한 근력으론 범이나 곰 같은 맹수는 말할 것도 없고, 소나 말은 물론이고 당나귀한테도 안 된다.
이에 무수한 노력과 탐구를 거쳐 무인들은 발경에 기를 실었다. 기가 실린 발경은 천 근 이상의 힘을 내기도 하여 맨손으로 범이나 곰도 때려잡았다.
이후 오랜 기간 내공으로 발경의 위력을 강화하는 게 권법의 최고 경지로 여겨졌다.
그러다 여의권이 나타났다. 기초로 익히는 형은 있지만, 경지에 이르면 마음먹은 대로 형이 달라지는 권법에 다들 형수의성을 권법의 최고 경지라고 칭송했다.
장삼풍이 태극권을 선보이기 전까지는.
"살인멸구냐?"
사내는 대부인의 오라비이자 전대 철추당 당주인 연남산의 아들 연무쌍이다. 대부인의 지시를 받고 괴성이 터진 곳을 찾았는데 하필이면 내공으로 상대 심맥을 끊는 구후영의 모습을 목격했다.
"고통을 덜어준 겁니다."
구후영이 해명하려 했지만, 연무쌍은 들을 생각도 없이 여의권을 펼쳐 공격했다.
구후영은 상대의 양 주먹이 활짝 펼친 손바닥에 닿는 순간, 상체를 고정하고 하체를 움직이며 막대한 힘이 실린 공격을 양쪽으로 부드럽게 흘렸다.
'절기를 숨겼구나.'
연무쌍은 오 할의 공력을 실은 연자쌍비燕子雙飛의 초식을 구후영이 손쉽게 흘리자 자신의 판단을 더욱더 확신했다.
'어떻게?'
엉겁결에 태극권으로 연무쌍의 주먹을 흘린 구후영도 자신이 해낸 일에 놀란 나머지 계속 해명하는 걸 잊었다.
'생포해야 한다.'
연무쌍은 처음엔 화를 주체하지 못해 강한 초식을 펼쳤으나, 상대를 생포해 배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강맹함을 버리고 변화 위주의 초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복잡한 초식도 효과가 전혀 없었다.
장선과 연무쌍이 사형제임을 모르는 사람 눈엔 완전히 다른 무공을 펼치는 거로 오해할 정도로 둘의 여의권은 같은 구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상대는 마치 연무쌍의 여의권을 잘 아는 사람처럼 모든 변화와 속임수에 정확히 대응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수비만 하고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게 웬 망신이냐.'
연무쌍은 초식을 그대로 펼치는 게 아니라 여러 초식에서 필요한 것만 가져다가 쓰는 수준에 오른 이후, 아버지 빼고는 권법 대결에서 이토록 힘들었던 경험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이지?'
배월교주가 구후영이 태원부 낙화문의 제자라는 사실을 밝혔기에 연무쌍은 상대가 펼치는 게 태극권이란 생각은 절대 못 떠올렸다.
'이게 무슨 조화지?'
완벽한 수비를 펼치는 구후영 본인 역시 당면한 상황에 의문투성이였다.
예전의 구후영은 검술 경지가 높으나 내공이 부족했다. 일류 수준에 이른 자와 싸우면 거의 필패고, 일류에 이르지 못해도 내공이 깊은 자와 싸우면 고전하기 일쑤다.
야효를 상대했을 땐 운이 좋았다. 야효는 속에 화가 가득했으나 청월의 연인이라는 구후영을 차마 죽일 순 없어서 진정한 살초를 꺼내지 않았고, 구후영이 목 앞에서 검을 멈추자 자존심 때문에 패배를 선언했다.
백화궁 자매를 죽인 건 말 그대로 운이었다. 둘이 내상을 입은 상태였고 풍불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 평소 기량의 반도 못 펼친 탓이고, 적혈장을 심장에 적중한 후 방심한 면도 있다.
천공교검의 예리함도 한 몫 크게 했다.
이렇듯, 과거의 구후영은 대단한 상대와 싸워 이기기도 했으나 운이 컸다. 무공 경지와 비교해 내공이 거의 없어서 자신보다 무공 이해가 낮은 자들과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자양단을 먹고 깨달음을 얻어 내공을 품은 뒤, 상황이 반전됐다.
이제는 구후영이 무공에 관한 이해가 부족해 막대한 양의 내공을 써먹지 못했다.
내공심법만 배우고 무공도 경공도 거의 절로 깨우친 두전은 말할 것도 없고, 임초현도 절정치고는 내공이 적은 편이어서 구후영에게 품은 내공을 충분히 활용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그 탓에 구후영은 품은 내공에 미안할 정도로 무공 위력이 약했으나, 공청석유로 힘과 체력이 좋아지고 눈과 귀는 물론 감각도 예민해져서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덕분에 부족함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중, 친위대 사내의 변심으로 죽음의 위기에 놓이면서 잠재력이 터졌고, 엉겁결에 일류의 경지에 들었다.
경지가 일류로 올라 내공이 예전보다 잘 움직여주는 덕분에 연무쌍의 대단한 여의권을 잘 막고 있는 건데, 정작 구후영 본인은 자신이 경지가 오른 것조차 몰라 갑자기 강해진 이유에 대해 오리무중이었다.
"네 배후가 도대체 누구냐?"
화가 잔뜩 난 연무쌍이 이를 갈며 외쳤으나 구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부께서 그러셨어. 태극권의 최고 경지는 망忘이다. 기운을 싣는 걸 잊고, 발경을 잊고, 형도 잊고, 나도 잊고. 그렇게 모든 걸 잊으면 자연이 몸에 깃든다.
구후영은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 정학이 해준 현재 상황에 꼭 알맞은 해답도 떠올리지 못한 채 대결에만 한없이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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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이오?"
연무쌍은 화가 잔뜩 치밀어서, 구후영은 아무 생각 없이 이백 합 정도는 대결하고서야 청빈이 등장했다.
딱 나이에 알맞은 내공을 품은 청빈은 먼저 출발한 배월교주의 종적은 진즉에 놓쳤고, 늦게 출발한 연무쌍에게도 추월당했다.
게다가 홍엽산장의 지리를 잘 몰라 얼추 비슷한 방향으로 달리긴 했으나 구후영이 있는 별채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히 구후영과 연무쌍이 싸우면서 기척을 낸 바람에 늦게나마 목적지를 찾아왔다.
"형님, 이분이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연무쌍과 벌이는 대결이 재밌어서 주변을 잊고 있던 구후영이 정신을 차렸다.
"오해? 네가 저자를 죽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상대가 둘이 되자 연무쌍도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내 동생이 사람을 죽였다면 죽일 이유가 최소 백 개는 있는 거요."
청빈의 당당한 말에 연무쌍은 기운이 쭉 빠졌다.
"백 개 말고 한 개만 얘기해 보시오."
"나는 대동부의 명의 신한천에게 침술을 배웠습니다. 신 명의께서 웬만해선 쓰지 말라고 알려준 침술이 있는데, 바로 죽은 자를 깨우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그러면 저자가 죽었다는 말이오?"
구후영은 육비나타와 친위대 사내의 대화 내용과 마지막에 변심해 자신을 공격한 사실을 알렸다.
그제야 벽과 천장에 잔뜩 박히고 바닥에도 가득 널린 암기에 주의를 돌린 연무쌍이 자신을 책망했다.
'눈에 보이는 거에 집착하여 여의권의 마지막 경지를 밟지 못한다고 부친께서 생전에 그리도 주의를 주셨는데, 또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구나.'
"저자는 내가 쳐낸 육비나타의 암기에 죽었으나 전부터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깨워서 궁금한 점을 질문하기로 했습니다."
"독으로 죽은 자만 깨울 수 있는 거요?"
"몸속의 기운을 일시로 끌어다가 뇌와 심장만 살리는 겁니다. 독도 인체에 해로울 뿐 기운은 맞으니 죽은 자를 깨우는 데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인간으로선 절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에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합니다."
구후영이 사내를 깨운 걸 진심으로 후회하는 듯하자 연무쌍은 자신의 경솔함을 다시 한번 책망했다.
'내 외종생질外從甥姪인지도 모르는 아인데, 하마터면 내 손으로 죽일 뻔했구나.'
그러나 진심을 다한 공격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막혔던 걸 떠올리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심맥을 울려 고통을 덜어줬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래. 뭘 알아낸 게 있소?"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인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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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연무장에 도착했을 땐 분위기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부인이 자리를 딱 잡고 온휴와 장선이 자제시킨 덕분에 실질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서로 노려보며 입 모양으로 욕하고 이를 가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배월교주가 육비나타를 죽였다. 세 증인 중 혈교룡을 뺀 남은 둘도 죽었고."
복장표국 진영과 가까운 곳에 구후영과 잠깐 겨뤘던 육비나타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고, 단청과 호능도 칠공이 피범벅이 되어 너부러져 있었다.
혈교룡도 겨우 목숨만 부지한 건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모. 여기 소협이 뭔가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을 알아냈는가?"
세 개의 대침이 머리에 꽂히며 강제로 죽음에서 돌아온 사내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전혀 꾸밈없이 구후영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네 대주가 자룡을 숨긴 곳을 안다는 말은 어떻게든 살려고 급히 지어낸 거짓이었다.
그러나 서신에 전후 사정과 자신이 아는 바를 모조리 적어뒀다는 건 진실이었고, 서신을 숨긴 장소는 다름 아닌 의사당 편액 뒤였다.
"잠시 주목해 주시오."
대부인이 일어나 말했다. 깊은 내공을 품지 못해 목소리가 크진 않았으나, 호북 무림에서 존경받는 홍엽산장을 수십 년 동안 이끈 기품이 실려 거역할 수 있는 위엄이 잔뜩 배었다.
"여기 소협이 홍엽산장의 진정한 주인이자 내 손주인 구후영이요."
대부인의 말에 깜짝 놀란 건 철혈방 쪽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온휴의 요청에 한 손 거들러 온 자들도 미리 철혈방과 홍엽산장에 관해 소문을 들었기에 구후영이 구척장신에 털보이고 내공과 외공이 일정 경지에 이른 대단한 무인임을 알았다.
구후영도 작은 키는 아니나 구척장신까지는 아니고, 수염 하나 없이 반반한 얼굴이다. 더구나 대단한 무공을 품었다고 보기엔 다소 문약한 체형이었다.
"그간 사연을 오늘 모두 얘기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을 마친 대부인이 연무쌍과 홍엽산장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으로 사라졌다.
"구후 대협. 일전에 장의행협하여 산적에게 납치된 배월교의 여제자를 구해주시고 직접 의술을 펼쳐 해독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구후 대협의 은혜는 배월교가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배월교주의 말에 대부인이 사라지며 험악해지던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당신이 구후영이면 원래 있던 부당주는 누구요?"
그러나 철혈방 쪽에서 누군가가 외치자 다시 난장판이 됐다.
"어느 새끼가 주둥이질한 거야!"
다행히 장선이 버럭 외치자 철혈방 쪽도 조용해졌다.
장선은 연남산의 대제자로 무공밖에 모르는 자였다. 연무쌍이 철추당 당주 자리를 고사하며 방주에게 임명권이 돌아가게 생겼는데, 그때 철추당 골간骨干(핵심 간부)들이 장선에게 당주 자리를 맡아달라고 거듭 사정했다.
같은 철혈방이란 이름 아래에 있지만, 삼당 모두 각자 노선을 걸었고, 오단도 적성에 따라 삼당 중 하나와 가깝게 지냈다.
방주가 자칫 엉뚱한 자를 당주로 지목하면 철추당이 다른 당에 먹힐 수 있기에 손이 발이 되도록 애원해서 장선의 허락을 얻었다.
빌고 빌어서 당주 자리에 앉힌 거기에 철추당 소속 대부분이 장선의 말에 쉽게 토를 달지 못했다.
- 작가의말
주인공이 이제 일류의 경지에 들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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