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초보은結草報恩
진나라의 위무자가 병으로 죽었다. 위무자는 죽기 전에 자신의 애첩을 다시 시집보내라는 말과 자신과 함께 순장하라는 말을 연이어 남겼다.
위무자의 아들 위과는 고민하다가 그나마 정신이 맑을 때 했던 말에 따라 위무자의 애첩을 다시 시집보냈다.
후에 진나라가 침략을 당했는데, 승전한 위과는 상대 장수인 두회의 뒤를 쫓았다. 그때, 잘 달리던 두회가 갑자기 무덤 위의 풀로 엮은 올가미에 걸려 넘어지며 생포 당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딸을 살려 준 은혜에 보답하는 거라고 했다.
은혜를 모르는 금수만도 못한 사람들 때문에 죽어서도 은혜를 갚은 노인의 미담이 크게 회자하고, 결초보은이란 말이 생겼다.
"오늘 입수한 소식인데, 은도당이 조만간 구후 대협과 대부인을 납치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현재 귀주에 있는 고수들이 양양에 도착하는 즉시 손을 쓸 것이고, 철추당이 은도당과 손을 잡았습니다."
온휴는 관의 표물 계약 건으로 먼저 떠나고, 배월교주가 남아서 홍엽산장 사건의 배후를 캐기로 했다. 배월교주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홍엽산장을 해치려고 한 배후가 철혈방 내부에 있는지 알려 했고, 그 과정에 의외의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온 표국주는 무엇을 걱정한 것입니까?"
배월교주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대들이 배후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말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구후영의 말에 배월교주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온 표국주의 말에 따르면, 홍엽산장의 사건은 관의 솜씨 같다고 합니다."
"관이요?"
의외의 말에 구후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확히는 동창 혹은 서창의 솜씨 같다고 합니다. 공격 시기가 제멋대로인 것도 그렇고, 실패한 후 공격을 이어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강호보단 관의 행태에 가깝다는 온 표국주의 판단입니다."
그제야 구후영을 괴롭히던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그래서 할머니가 배후가 누군지 혼자만 알고 계셨고, 이젠 다 끝났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씀하신 거구나.'
쉽게 움직이지 않고, 실패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게 딱 관의 행태다. 일개 장원이 관에 저항할 순 없으니 복수할 수도 없고, 철혈방과 관계를 끊었으니 관도 홍엽산장에 해코지할 이유가 사라졌다.
"온 표국주는 홍엽산장의 화가 자신한테 튀는 게 두려운 거군요."
"그렇습니다. 철추당의 네 대주가 산적과 결탁해 복장표국의 표물을 턴 것도 계획의 일환이니깐요. 동창이나 서창의 솜씨면 복장표국을 선택한 게 절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온휴의 뒤에 있는 게 누군지 모르지만, 어쩌면 동창이나 서창이 뽑으려는 가시일지도 모른다. 온휴로선 재빨리 썩은 줄을 끊고 싱싱한 동아줄을 잡아야 한다.
"철혈방의 내부 소행이 아니면 관이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으니, 철혈방의 동태를 주시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구후영이 받아들인 거로 보이자 배월교주는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정보를 접한 우리는 사람을 써서 해당 정보를 장 대주한테 전했고, 구후 대협이 어딘가로 숨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그러다가 구후 대협이 태원부에서 왔다는 걸 아는 게 우리뿐이 아니라 양양 하오문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아!"
그제야 구후영은 양양 하오문도 자신이 태원부에서 왔음을 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거기에 다른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삼형이 가짜 구후영을 만난 건 내 생일날이고, 태원부의 하오문이 비둘기를 받은 건 그 이튿날이었다. 이는 양양의 하오문이 삼형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안다는 뜻이고, 삼형이 태원부로 다녀온 걸 아는 건 칠살문밖에 없다.'
청빈과 구후영의 정보를 고작 나흘 만에 가짜 구후영과 네 대주가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양양의 하오문은 칠살문과 한몸이기에 청빈의 행적을 자세히 알았고, 철추당과 친분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빠르게 의뢰를 처리했다.
'배월교주하고 비교하면 난 그냥 생각 없는 멍청이구나.'
구후영은 배월교주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대협께 받은 은혜를 어찌 갚을지 고민하다가, 양양의 하오문을 치기로 했습니다. 칠살문은 언젠간 손보려 했기에 겸사겸사라고 할 수 있지요."
"칠살문과 원한이 있습니까?"
"칠살문의 자객한테 본교의 우호법이 크게 당했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묵은 원한이 있었고요."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런데 교주께서 말씀하지 않았으면 전 도움을 받은 사실도 몰랐겠군요."
"은혜라는 건 갚는 사람이 매기는 겁니다. 굳이 대협께 알릴 필요는 없지요."
배월교주의 담백한 대답에 구후영은 크게 탄복했다.
'무공만 강한 게 아니고 사람 자체가 훌륭하다.'
"대협은 태원부까지 어떻게 가려는 겁니까? 길치라고 아는데."
그제야 자신이 경로를 이탈한 걸 깨달은 구후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폐가 아니라면, 아까 우리가 만났던 곳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습니까?"
#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구후영은 길 안내를 자처한 배월교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교주가 없어야 교도들이 편하게 일하죠. 자리를 비울 핑계가 필요했는데 구후 대협이 도운 겁니다."
뒷짐을 지고 발로 허공을 차며 즐겁게 걷던 배월교주가 대답했다.
"제가 동생을 무사히 찾으면 다 교주 덕분입니다."
"교도를 구해주신 보답이라고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제 선행이 교주께 은혜로 여겨지듯이, 교주의 도움도 제겐 은혜입니다."
"은혜는 갚는 게 아니라 쌓는 거라고 배웠는데, 구후 대협도 같은 생각이네요."
배월교주의 말을 한참 고민한 구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생이 아둔하여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들꽃에 코를 대고 면사 건너 향을 맡던 배월교주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구후 대협이 절 돕습니다. 그러면 전 은혜를 입은 것이겠지요. 그러다 구후 대협에게 어려운 일이 생겨서 제가 구후 대협을 돕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하죠. 저는 조금 다르게 배웠습니다."
구후영은 배월교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구후 대협이 절 하나 도왔는데 제가 구후 대협을 다섯 도왔습니다. 그러면 제가 구후대협에게 은혜 넷을 입힌 걸까요?"
구후영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구후 대협은 여전히 저한테 은혜 하나를 입혔고, 저는 구후 대협에게 은혜 다섯을 입혔습니다. 하나든 다섯이든 평생 갚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건 돈거래처럼 서로 덜어내도 괜찮은 게 아니니깐요."
"훌륭한 말씀이군요. 교주의 흉금에 거듭 감탄합니다."
"사실 저도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저 부친의 가르침이라 최대한 따르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서로 대협과 교주로 호칭할 건가요?"
"저도 대협 소리가 낯간지럽던 차입니다."
"저는 단아端雅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구후 공자라고 부를 테니, 공자께선 단 소저라고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호칭을 바꾼 덕분에 둘 사이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졌다.
"단 소저는 태원부가 초행인가요?"
"태원부엔 자주 갔습니다. 거기에 작은 장원도 하나 있어요."
"산서 말투가 아닌데요?"
"배월교는 섬서에 뿌리를 뒀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자라서 섬서 말투도 아니지만요."
"단 소저는 권법만 익혔습니까?"
단아가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거렸다.
"구후 공자는 저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군요."
"오햅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왠지 자신이 단아한테 관심이 있다고 말한 것 같은 느낌이어서 가슴이 세게 뛰고 낯도 뜨거웠다.
"뭘 또 미안해하고 그래요. 저는 권장법과 더불어 암기술을 주력으로 익혔어요. 그날 육비나타를 죽인 것도 암기인데, 못 들으셨나 보군요."
육비나타와 대결한 경험이 있는 구후영이다. 독을 바른 암기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인 건 맞지만, 객관적 실력은 철추당 당주인 장선에게 못 미친다.
대결에서 장선을 이긴 단아고 육비나타가 암기도 다 소모한 것 같아서 굳이 캐묻지 않았는데, 암기의 고수를 암기로 죽였다고 하니 새삼 놀라웠다.
'암기술은 일반 무공과 달리 재능이 없으면 평생 수련해도 경지에 못 이른다던데.'
어느 무공이 재능이 필요 없겠냐만, 암기술이 유독 심하다. 독공은 위험해서 입문이 어려워 그렇지 성공만 하면 위력이 대단한 데 비해 암기술은 입문이 쉬운 대신 고수가 되기 어렵다.
"구후 공자는 검술만 익혔습니까?"
"네. 재능이 부족해 하나만 파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과공過恭(과한 공손)은 비례非禮(예가 아니)요, 과겸過謙(과한 겸손)은 오만이라.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구후 공자가 제일 오만합니다."
상대의 지적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구후영은 들썩이는 어깨에 농담임을 알아채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어디서 말로 밀리는 사람이 아닌데, 단 소저한테는 농락당하네요."
"싸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구후 공자는 한 우물만 파서 상대가 특이한 화법을 사용하면 대처가 어려운 겁니다. 무공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부께선 검술 수련이 마음에 안 들 때면 늘 육합권을 수련했어. 마냥 쉬기 싫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무공에서 수련 정체의 해결책을 찾는 건가?'
"신창 악불형은 십팔반 병기에 모두 능하고, 신장 홍기영도 다룰 줄 아는 무기가 열 개 넘는다고 하더군요."
"신검과 신도는요?"
"팽창회는 칼만 다루는데, 손권이 창안한 거로 알려진 오호단문도가 그만큼 익힐 게 많은 거겠죠. 풍불지는 검 외에 장법에도 일가견이 있고 경공과 보법이 천하에서 수위를 다툰다고 합니다."
"단 소저는 여러 무공을 익히는 게 하나만 파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까?"
"우물은 넓을수록 더 깊이 팔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무공도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내가 태극권을 정식으로 익혀도 될까?'
구후영은 무당의 무공을 깊이 익혀 대놓고 사용해도 되는지 망설임이 컸다.
'풍 대협처럼 무의만 남기고 초식이나 형을 다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학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 태극권의 무의를 한 달 정도 배운 구후영이 깨우치는 건 갓 걸음마를 뗀 아이가 장원급제하길 바라는 심보나 다름없다.
"구후 공자는 술과 무공 빼고 다른 관심사는 없나요?"
"네?"
"술 마실 때를 빼면 무공 얘기만 해서요."
구후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무슨 얘기를 합니까?"
"공통 관심사를 얘기하죠. 아무래도 저랑 구후 공자는 무공 얘기를 해야 할 거 같네요."
"단 소저의 주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배월교를 강하게 키우는 거요. 여인이 많아서 귀찮은 일이 잦거든요. 약하게 대응하면 쉽게 보고 계속 추근거리고, 강하게 대응하면 원한이 쌓이죠."
용호표국이 떠오른 구후영이 말을 받았다.
"저도 낙화문을 강한 문파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무공 말고 할 얘기가 더 있었네요."
새로운 화제를 찾은 둘은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구후영과 단아는 서로의 식견에 거듭 놀라고 감탄했다.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