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관동행出關東行
경사난해일驚沙亂海日
말발굽에 날린 모래알이 모래 바다에 잠긴 해를 가리고,
비설미호천飛雪迷胡天
흩날리는 눈송이가 변방의 하늘을 흐리누나.
구후영 일행이 안문관에 도착한 건 기러기가 돌아오는 따스한 봄이라 이태백이 묘사한 일 장 밖도 안 보이는 열악한 날씨는 없었다.
"어려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줘서 정말 고맙소."
구후영이 안문관의 문을 열어준 초무량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우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건 도움 축에도 못 끼지."
지난겨울의 침공 및 최근 북원의 심상찮은 움직임 때문에 조정은 모든 관문에 출입 금지를 지시했다.
다행히 안문관에선 초무량이 황제나 다름없고, 왕제상과의 친분에 부친의 병을 치료한 은혜까지 있어 선뜻 관문을 열어줬다.
"십 년 넘게 고생하던 지병을 단숨에 치료하다니. 아우의 고명한 침술이 참으로 경탄스럽소."
초무량의 부친은 강남 출신으로 따뜻한 곳에서 나고 자랐는데 안문도에서 찬바람을 자주 맞으며 병들었다. 몸 자체는 튼튼하기에 굳이 보약을 쓰지 않고 침술만으로도 완치에 가까운 효과를 봤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종종 신세를 지겠소."
구후영은 낙화문이 표국을 열 생각인데 거래 상대와 이동 경로를 미리 확보한다는 핑계를 댔고, 초무량은 구후영과 이어진 끈이 두꺼워진다는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흔쾌히 편의를 봐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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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필의 말이 초원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구후영과 장선과 원경이 일지봉에 도착한 이틀 뒤에 단아가 야효를 데리고 합류했다. 거기에 양달까지 해서 총 여섯 명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산해관 밖의 모용세가.
그 대단한 공현도 유근의 출행 목적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저 유근을 죽이면 되는 일행으로선 딱히 궁금한 사항도 아니었다.
"상쾌하구나."
다들 거침없이 말을 달리며 시원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특히 최연장자인 장선이 복수가 코앞이란 생각 때문인지 누구보다 흥분한 모습이었다.
유독 구후영만 깊은 생각에 빠져 질주를 오롯이 즐기지 못했다.
'같은 무공도 익히는 자에 따라 초식의 형태는 물론 쓰임새도 다르다.'
어려서부터 탄탄한 기초를 쌓아온 게 아닌 구후영은 남들이 당연히 여기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 많았다.
거기에 소림과 화산에서 다른 사람은 평생 겪기 힘든 경험을 한 덕분에 강호에 은퇴하기로 한 결심과 달리 머릿속은 무공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찼다.
'우장산은 팔이 하나여서 상대한테 얕보였을 테니 난화검법이 적합했겠지. 지금의 내겐 효용이 떨어진다.'
실력이 부족했던 예전의 구후영은 낙화검법보다 난화검법이 훨씬 어울렸다. 그러나 명성이 강호를 진동하는 지금은 난화검법으로 상대가 공격게 유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구후영이 수비적으로 나온다고 상대가 섣불리 공격하는 일은 잘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난화검법처럼 대단한 무공을 버릴 수도 없고.'
생각이 길어질수록 무언지 모를 깨달음이 구후영의 뇌리를 간질이며 화를 돋웠다. 구후영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주변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은 극도의 짜증을 애써 참으며 뇌리를 간질이는 깨달음의 정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
덕분에.
'그렇지. 공격 따로 수비 따로 말고, 하나의 휘두름에 공격과 수비의 의도를 모두 실으면 되겠구나.'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정작 떠올리지 못했던, 임초현이 한때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한번 물꼬를 틀자 연관된 깨달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고, 종국엔 태극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태극은 구분 없는 하나가 아니다.'
음양은 대립과 구분을 뜻한다. 태극은 그러한 음양을 조화해 대립을 없애 똑같이 만드는 게 아니다.
음은 음대로, 양은 양대로. 단지, 시각을 바꿔 대립과 구분이 아니라 섞임과 같음으로 음양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게 진짜 태극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렇기에 태극에 대한 인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진정한 태극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흔들지 못하는, 절대적인 진리 혹은 그것에 가까운 대단한 것이다.
지금 구후영이 깨달은 건 구후영만의 태극이다. 이게 태극의 한 조각이 옳은지는 세상 누구도 모른다. 구후영이 할 일은 일단 자신이 어렵게 찾아낸 태극이 맞는다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다 모순을 발견했을 때 더 치열하게 고민해 더 나은 태극을 찾아내는 게 구도자의 길이고 삶이다.
구후영이 난화검법의 효용이 사라진 것에 대한 사소한 고민으로 시작한 일에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어 깊은 환희에 빠져있던 그때.
슉 소리와 함께 화살 몇 대가 날아왔다.
"제게 맡기세요."
담담하게 말한 단아가 손으로 말 등을 짚으며 훌쩍 뛰었고, 일행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방금 화살은 조준하는 용도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야효가 말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덜 빠져나온 구후영은 야효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비 오기 전과 비 온 후에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과 거리가 다릅니다. 바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그래서 미리 촉 없는 살을 몇 개 날려 감을 잡습니다."
야효가 말하는 사이, 말 등에서 뛰어 오 장 거리를 움직인 단아가 가볍게 착지했고, 착지하자마자 다시 땅을 걷어차고 높이 뛰었다.
슈슝.
거의 동시에 오십 대가 넘은 화살이 날아왔다.
파르르.
허공에 솟구친 단아의 옷이 부풀어 오르면서 찢긴 창호지가 거센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를 냈다.
탁, 타닥.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일행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들이 단아의 근처에서 단단한 성벽에 부딪힌 것처럼 힘을 잃고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완숙의 경지에 이른 청풍불의공입니다."
야효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현 강호에서 내기외방內氣外放의 수법은 청풍불의공 빼고 가능한 심법이 없을 겁니다."
누가 진지하게 확인해본 건 아니지만, 내기외방은 내공의 양이 최소 두 갑자는 되어야 가능하다는 게 강호의 정설이다.
'청월도 비슷하게 했으니, 단아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영약으로 내공만 키운 청월도 청풍불의공 덕분에 황무지를 걸으면서 옷과 머리에 먼지 하나 안 묻었으니, 고된 수련을 겪은 단아라면 내공을 외부에 방출해 작고 가벼운 화살을 막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라면 어떻게 막았을까?'
고민하는 사이, 수십 개의 화살을 모두 막은 단아의 몸이 천천히 하강했다.
그 모습을 보며 구후영의 생각은 청풍불의공 자체로 옮겨갔다.
'대단하긴 하나, 약점이 확실한 심법이다.'
마찬가지로 청풍불의공을 익힌 배월교의 전대 교주는 막대한 내공을 품고도 옥면비룡을 십 년이나 쫓아만 다녔다.
옥면비룡의 경공 자질이 뛰어난 건 맞으나, 품은 내공의 차이나 익힌 경공의 수준 차이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는 내공을 대부분 외부로 돌리기에 내실이 부족한 탓이었다.
'내공을 밖으로 돌리니 다른 무인이 어려워하는 걸 쉽게 이뤄내는 대신, 남이 쉽게 하는 건 오히려 어려워한다.'
청풍불의공은 비유하자면 고슴도치다. 밖에 뾰족한 가시가 있어 누구도 쉽게 못 건드리지만, 뒤집어 배를 드러내는 순간 단번에 위기에 몰린다.
'장법 고수를 만나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어려움에 처한다. 그래서 사목권을 익힌 거겠지.'
단아가 사목권을 익힌 건 청풍불의공이 근접 전투에 약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갑자기 멀리 언덕 뒤에서 세 필의 말이 나타나 이쪽으로 달려오자 일행이 맞서려 했다. 그에 야효가 태연한 얼굴로 말렸다.
"저들도 눈이 있으면 청풍불의공을 알아봤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약 십오 장 거리부터 속도를 늦추던 세 사내가 오 장 거리에 이르자 말 등에서 뛰어내려 단아를 향해 부복했다.
"현월궁의 귀인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선두의 사내는 말이 유창하고 단어 선택에도 격식이 있었다.
"단오제端午祭에 가는 길인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왜 우릴 공격했느냐?"
"용서해 주십시오. 재물이 모자라서 급한 마음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세 사내가 바닥에 머리를 푹 박고 양손을 싹싹 비볐다.
그에 단아는 무슨 영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들은 현월궁이 주최하는 단오제에 참석했으나 재물이 부족해 약을 얻지 못한 자들이 분명했다. 일행을 공격한 것도 혹시나 부족한 재물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화살부터 날리는가?"
매서운 질책에 세 사내가 몸을 한껏 움츠릴 때.
단아가 태도를 바꿨다.
"모르고 저지른 짓이니 일단 용서하겠다. 대신 요즘 관동에 어떤 큰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얘기하거라."
단아의 말투가 온화해지자 세 사내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앞다투어 자신이 아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북방의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열 살 전에 죽습니다."
그러는 중에, 야효가 궁금한 표정을 한 구후영에게 설명했다.
"봄과 여름에 아이들이 많이 걸리는 병이 있는데, 현월궁이 단오제 전후에 재물을 받고 약을 줍니다. 약을 먹으면 그 해는 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원나라가 세상을 휩쓸 때도 현월궁엔 뭐라 못 했습니다."
'약 만드는 법을 알려주면 많은 목숨을 구할 텐데.'
야효가 마치 구후영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 약이라는 게 사실 희석한 독입니다. 조제 과정에 실수하면 오히려 목숨을 뺏는 물건이지요. 약을 팔아 얻는 재물이 현월궁의 주 수입인 것도 있고요."
구후영은 안력을 돋워 멀리 모습을 드러낸 아이들을 바라봤다. 한창 힘이 남아돌 나인데 하나같이 기운이 없었다.
"저 중에 최소 반은 올가을을 못 넘길 겁니다."
야효의 탄식 섞인 말에 구후영의 눈이 아련해졌다.
'가엽구나.'
사람이면 측은지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돕고 싶은데.'
그러나 망설임 역시 컸다.
유근을 죽이는 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공현과의 거래기도 하다. 저들을 돕느라 시간을 지체한 바람에 유근이 살아 돌아가면 태자와 황후가 허허 웃고 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 때문에 아픈 아이들을 외면하는 게 옳은 일일까?'
한 명의 의원으로서 그저 보고 지나치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유근을 꼭 내가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공현은 분명히 구후영 외에도 유근을 노리는 자가 있을 거라고 했다. 직접 복수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긴 하나, 구후영은 수십의 목숨을 구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황궁에 침입해 죽여도 되고.
황후나 태자한테 밉보일 가능성이 크지만, 수십의 생명을 외면하는 것보단 차라리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내가 의원이오. 위급한 아이부터 내게 보여주시오."
치열한 갈등 끝에 뱉은 구후영의 결정에 사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약을 주시면 내년에 꼭 두 배의 재물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구후영을 현월궁의 의원으로 오해한 듯한 모습이지만, 단아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야효와 양달을 불러 조용히 지시했다.
"우호법은 여기 양 호위와 함께 먼저 산해관에 가서 소식을 탐문해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유근의 행적을 알아내는 데 주력해라."
- 작가의말
미리 양해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댓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생겨 글의 방향을 트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읽으라고 쓰는 글이니 읽는 분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함이 마땅하나, 이 글은 끝까지 제가 의도한 대로 마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완결까지 댓글을 읽지 않을 생각입니다. 완결을 마친 다음 몰아 읽고 오타나 잘못된 부분을 일괄 수정할 생각입니다.
정성스레 단 댓글이 무시당했다고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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