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천하博奕天下
운주유악지중運籌帷幄之中 결승천리지외決勝千里之外.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오는, 유방이 장량을 칭찬할 때 사용한 말이다.
장막 안에 앉아서 전략을 짜는 거로 천 리 밖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말로, 책사한텐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다.
"어제 황제가 일어났소."
적당히 크고 적당히 낡은 평범한 궁려穹廬(파오) 안에 사내 네 명이 모였다.
평소라면 손님을 맞이해 모닥불 위에 마유주馬乳酒(말젖으로 빚은 술)가 가득 담긴 주전자가 부글부글 끓고 꼬챙이에 꿴 말린 고기가 구워지고 있어야 하는데, 궁려 안은 불빛도 밝히지 않고 휑했다.
"계획한 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군."
구레나룻이 제멋대로 얽힌 사내가 말했다. 전혀 꾸미지 않아 추레한 외모와 달리, 황금 일족으로 불리는 북원의 황실 혈통이다.
"마지막 둘만 됐어도."
황제가 병상에서 건강히 일어났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한 사내가 말했다. 호 선생으로 불리는 자인데,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는 현재 궁려에 모인 남은 셋도 전혀 모른다.
"그러게 말이오."
마교에서 온 사내가 탄식했다.
"마교는 어쩔 생각이오?"
호 선생이 질문했다.
배산이 천산으로 중원의 무인들을 부른 기회에 어떻게든 싸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호북에서 철혈방을 없애고 양왕에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워 민심을 황황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황제가 죽으면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마저도 실패했다.
천하대란을 일으키기 위한 가장 큰 세 개의 계획 모두 철저히 망한 탓에 기존의 계획을 모조리 폐기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명교요."
"명교나 마교나."
구레나룻이 끼어들어 마교를 비웃었다.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오."
호 선생이 구레나룻을 제지한 후, 다시 질문했다.
"명교의 계획이 궁금하오."
마교를 대표하여 온 사내가 깊이 탄식했다.
"배산이 사라진 바람에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소. 우린 지금 내부를 단속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별로 견고하지 못했던 연맹에 바로 금이 갔다. 서로 다른 세력이 배산을 죽여 없앴다고 헐뜯기 바쁜 바람에, 마교는 어떤 일도 도모하기 힘든 상태다.
"초원은 어떻소?"
호 선생이 구레나룻에게 질문했다.
"일단 칠만의 병력을 모았소."
그에 마교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명이 장성에 두른 병력만 해도 백만이 되는데, 칠만으로 뭘 하겠다는 거요."
"백만은 옛날얘기고, 지금은 칠십만이오."
한 개 영은 기본 편제가 천 명인데, 현재는 대부분 육백에서 팔백 정도다. 이는 장수들이 군량을 몰래 빼돌리기 위해 일부러 정원을 꽉 채우지 않은 탓이다.
"칠십만이나 백만이나. 칠만 앞에선 똑같은 거 아니오?"
이번엔 구레나룻이 콧방귀를 뀌었다.
"칠만이 먼저 움직이면 한 달 뒤에 최소 오십만이 움직이는 게 초원의 군대요. 그간 그리 보고도 모르겠소?"
"내년으로 미룰 수 없소?"
잠깐 고민한 호 선생이 말했다.
"더 미루면 우리끼리 싸워야 하오."
그에 마교 사내가 또 비웃었다.
"오랑캐는 어쩔 수 없는 오랑캐구나."
"말조심하게."
구레나룻이 발끈하기 전에, 쭉 침묵을 지키던 흰머리 사내가 나섰다.
"천 년 넘게 지켜온 초원 나름의 생존방식이네. 저게 오랑캐면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불로 태우는 배화교 역시 야만인이네."
마교 사내를 꾸짖은 흰머리가 회의를 주관하던 호 선생한테 말했다.
"호 선생. 아무래도 초원의 친구들에게 숨통을 터줘야 할 거 같소."
"어떻게 말이오?"
호 선생이 반문했다.
"유근이 산해관으로 가려 한다고 들었소."
"그게 초원의 친구들과 무슨 상관이오?"
"유근은 좀 더 살려둬야 하잖소. 내가 구문구九門口에 문 하나 열겠소."
흰머리의 말에 호 선생이 손뼉을 짝 쳤다.
"초원 친구들은 식량을 얻어 좋고, 유근이 산해관에 가는 것도 방해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요?"
마교 사내가 질문했다.
"요동엔 원에 충성하는 기마부대가 이십만 있소."
호 선생의 말에 마교 사내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원이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충성하는 자들이 있다니.'
"고려의 유민과 원의 후손 그리고 일부 여진 부족으로 이뤄진 무리요. 이들은 원이 다시 중원을 차지하길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오."
고려의 유민은 명을 없애고 원을 일으킨 다음, 원의 힘으로 조선을 되찾으려 한다. 원의 후손은 명의 지원으로 날로 강성해지는 여러 여진 부족의 등쌀 때문에 생존이 위협받는 중이고, 여진 부족들은 복수나 생존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구문구가 열리면 이들도 움직일 것이고, 명도 군대를 움직일 수밖에 없소."
"결국 이대로 싸우자는 말 아니오?"
마교 사내의 말에 호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싸우는 거랑 완전히 다르오."
마교와 중원 무림이 분쟁하고, 호북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거기에 황제까지 죽으면 북원의 군대가 장성을 넘을 만도 하다.
그러나 셋 모두 실패한 지금 장성을 넘는 건 그저 목숨을 갖다 바치는 행동과 다름없다.
문제는 북원이 어떻게든 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란 거고, 명을 치지 못하면 자기들끼리 싸울 분위기다.
"구문구가 뚫리고 요동의 이십만 군대까지 움직이면 명도 다른 곳의 군대를 차출할 수밖에 없소. 그러면 다른 지역의 수비가 허술해지오. 그렇다고 초원의 군대가 장성을 넘는 건 여전히 힘드나, 명도 반격할 엄두가 나지 않을 테니 인명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소."
그에 마교 사내도 구문구의 문을 여는 거 하나로 얼마나 많은 이득이 생기는지 깨달았다.
유근이 죽으면 십중팔구 서창도 사라진다. 문제는 유근이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순천부를 떠난 유근의 목숨을 붙여두는 건 몹시 어렵다.
그런데 구문구가 뚫리면 군대 이동이 빈번하게 이뤄지게 되고, 그에 따른 군량을 비롯한 물자의 이동도 함께 이뤄진다. 당연히 옥새에 인장이 마를 새가 없고, 장인태감인 유근은 자금성을 떠날 수 없다.
거기에 구레나룻의 부족과 요동의 이십만 군대는 넉넉한 식량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인 게 바로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너무 많은 탓인데, 구문구로 들어와 며칠만 약탈해도 다음 해 가을까지 버틸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이 명의 군대를 유인한 덕분에 장성을 공격하는 다른 부족들이 인명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어느 정도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기들끼리 싸워 서로의 원한이 커지거나 그냥 싸워서 잔뜩 죽는 것보단 훨씬 나은 상황이다.
'인간의 탈을 쓴 여우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마교 사내는 흰머리의 심계에 더없이 탄복했다.
"그럼 구문구 쪽은 연 선생께 부탁하오."
말은 시원하게 했지만, 호 선생은 연 선생의 속내가 사뭇 궁금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분명히 있을 텐데, 그게 뭘까?'
속으로 의문이 가득한 것과 달리, 호 선생은 태연한 기색으로 안건을 이어갔다.
"이번엔 명교 일을 해결할 차례요."
"배산을 찾아내서 교주 자리를 확실히 내놓게 하고, 누군가가 정식 교주가 되지 않는 한 명교 문제는 해결할 길이 없소."
마교 사내가 말했다.
"내게 괜찮은 계책이 하나 있소."
호 선생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호 선생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마교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구레나룻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동의하오."
마교 사내의 말에 호 선생이 다음 안건을 꺼냈다.
"이번엔 황궁을 장악하는 문제요."
"거긴 호 선생에게 일임하지. 여태껏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잘하리라고 믿소."
"그럼 소림으로 넘어가겠소."
구문구부터 천산까지, 초원부터 중원까지, 황궁부터 강호까지.
이 모든 게 연관된 어마어마한 일을 네 명의 사내가 어두운 장막 안에서 상의하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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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구후 태의를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구나."
황제가 한탄했다.
"폐하의 마음공부를 도울 득도고인을 수소문하고 있으니 태의의 빈자리를 곧 채울 겁니다."
황후의 위로에도 황제의 이마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군."
"황송하옵니다."
공현과 구후영 역시 황후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게 어찌 그대들 탓인가. 황제로 태어난 내 잘못이지."
황제가 깨고도 구후영은 바로 떠나지 못했다.
미음만 섭취하며 가만히 누워 있던 황제가 산책도 하고 음식 가짓수도 늘렸다. 황제가 일상을 완전히 회복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없기에, 구후영은 여전히 문화전에 기거하며 매일 신한천을 도와 황제를 진맥했다.
다행히, 구후영이 황궁을 떠나길 바라는 세력이 참 많았다.
태후와 유근은 황후와 황태자의 사람인 구후영이 황제의 신임을 깊이 얻은 상황이 참으로 불쾌했다.
태의원에 속한 어의와 태의들 역시 굴러온 돌이 너무 커서 자신을 흔들까 봐 노심초사했다.
거기에 구후영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황후의 무리도 구후영이 황궁을 떠나길 바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이 맞은 덕분에, 구후영을 곁에 두면 황제의 완치가 거짓인 줄 알고 천하 백성이 불안해한다는 명분이 만들어졌고, 아무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귀찮은 게 딱 질색인 황제는 구후영을 곁에 두려고 쟁취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포기해버렸다.
"세상에 구후 태의만 한 자가 또 있을까."
황제의 이어지는 한탄에 황후도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황제의 마음공부를 도울 스승을 찾는 일은 황후에게도 큰 골칫거리였다.
황제의 스승으로 일단 선비는 안 된다. 유명한 선비 중 성격이 덜 막힌 놈은 이미 조정에서 관리 일을 하고 있다. 성격이 꽉 막힌 놈이 와서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모시는 자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다.
스님도 안 된다. 황제는 편하게 신선이 되기 위해 단약을 연구했다.
오욕칠정을 끊고 많은 걸 버리며 고단하게 수행해야 부처가 된다고 믿는 스님의 설교는 황제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도사 역시 어렵다. 유명한 도사 중엔 누런 종이에 요샌 쓰지도 않는 글자를 대충 그려서 은자 한 냥씩 받아먹는 놈이 대부분이다.
"폐하, 제게 괜찮은 인선이 있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황제는 반색했고, 공현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구후영에게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
황후와 공현이 원하는 자는 일단 영리해야 한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황후와 공현의 말귀를 알아듣고 원하는 말을 해줄 정도의 눈치가 있어야 한다.
또한, 유명해야 한다. 유명하지 않은 자를 황제의 스승으로 한다면 태후가 온갖 트집을 잡으며 훼방을 놓을 게 뻔하다.
마지막으로, 박학다식해야 한다. 황제는 책만 보고 단약술을 독학할 정도로 총명하다. 그저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자면 황제 곁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구후 태의의 안목이라면 믿을 만하겠군. 그자가 누군가?"
황제의 질문에 황후와 공현 역시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구후영을 주시했다.
"폐하께서도 아마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태극혜검을 쓴 현현 진인의 뒤를 이어 무당의 대장로가 된 현영 진인입니다."
- 작가의말
황제 : 구후 태의의 안목이라면 믿을 만하겠군. 그자가 누군가?
구후영 : 최우식이라고, 여동생은 박소담이고 아버지는 송강호며 어머니는 장혜진입니다. 참고로 저는 본명이 박서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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