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명제자記名弟子
사부 한 명이 제자 여럿을 받는 일이 당연해지며, 제자도 구분이 생겼다.
적전嫡傳제자는 사부의 모든 재주 및 권리를 물려받는 제자를 말한다. 개문開門제자는 문파나 무관을 열며 받는 첫 제자를 말하고, 관문關門제자는 마지막 제자를 말하며, 재전再傳제자는 제자의 제자를 직접 가르치는 걸 말한다.
"나더러 무당의 기명제자가 되라는 말이오?"
기명제자는 실질적으로 사부한테서 뭘 배우는 것 없이, 그저 이름만 달아 놓은 제자를 말한다. 예전엔 같은 지역의 세력이 비등한 가문끼리 평화를 위해 상대 가문의 자식을 기명제자로 들이는 일이 잦았는데, 요즘은 보기 드문 편이다.
"그깟 진무관의 건축 계약을 따냈다고 끝이 아니란 건 알지 않소? 조정이 지시하면 무당은 거부할 수 없네."
조정이 철혈방을 치라고 지시하면, 무당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한다.
지금까지 철혈방이 한 일은 그저 무당을 곤란하게 한 것뿐이다. 철혈방이 진무관을 짓는 일을 맡은 것으로 무당의 명분이 약해지긴 하나, 그게 철혈방을 위기에서 건져줄 동아줄이 돼주진 못한다.
"철혈방 입장에선 이미 최선을 다한 거요. 그 이상은 무당이 도와야 하네."
진무관을 짓는 동안만큼은 누구라도 철혈방을 건드리기 조심스러우나, 진무관을 짓고 나면 위기는 다시 찾아온다.
구후영 역시 쇄악곡에서 정학과 대화하며 이러한 문제를 확실히 인지했고, 무당에 있을 때 태극혜검의 해석을 돕고 싶다는 티를 잔뜩 냈고, 무당 제자들이 태극권 배우러 오지 않자 뭔가 틀어졌음을 알고 바로 도망쳤었지만.
"철혈방 방주가 무당의 기명제자가 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현영자의 뜻대로 끌려가는 게 싫어서 어떻게든 반박하려 했다.
"자리는 당연히 적당한 자에게 물려줘야지 않겠소?"
현영자는 구후영이 철혈방 방주 자리를 내놓고 무당의 기명제자가 되길 원했다.
"작고한 현현자 대사형의 제자로 하면 구후 장주도 체면 상하는 일이 없을 거요."
태극혜검의 실질적 저자는 현현자다. 그렇기에 기명제자라고 해도 딱히 손색은 없다.
"태극혜검은 삼풍 진인의 것으로 세간에 전해졌소."
논어도 사실은 공자가 죽고 나서 제자들이 그간의 가르침을 모아 책으로 지은 거지만, 공자의 저서로 알려졌다.
태극혜검 역시 장삼풍의 유작으로 알려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현현자의 이름은 지워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혈방이 일방적으로 손해인 것 같소. 무당도 뭔가 실질적인 걸 내놔야지 않소?"
"현재 도움이 필요한 건 철혈방이고, 도움을 주는 건 무당이오. 당연히 철혈방 쪽에서 숙여야지 않겠소?"
현영자가 느긋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단 구후 장주가 방주 자리를 내놓고 무당의 기명제자가 돼야 하오. 이 첫걸음을 떼야 그 뒤의 일을 논의할 수 있소."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구후영은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첫걸음을 뗀 다음, 철혈방과 조정의 반응을 보고 유기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 일이 철혈방과 무당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무당에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데, 현재는 무당이 일방적으로 철혈방을 돕는 모양새다.
"대장로. 순진한 내 사제를 그만 괴롭히시오."
소금에 절인 호박씨를 까먹으며 듣기만 하던 옥무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장문은 좀 뒤로 빠지시오."
구후영이 거의 넘어온 것 같아 속으로 희희낙락하던 현영자는 갑자기 껴들어 재를 뿌리는 옥무영의 목을 조르고 혀를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안이 왔소? 내 사제가 그저 말로 구슬린다고 넘어올 사람으로 보이오?"
그에 현영자도 정신을 번뜩 차렸다.
'내가 방심하고 있었구나. 백옥봉에서 보여준 모습이 그저 우연은 아니었을 텐데.'
"옥 장문께 가르침을 청하오."
현영자의 뜻대로 하고 싶진 않으나 더 나은 방법이 없어 막막하던 차에 옥무영이 뭔가 물꼬를 틀어줄 것처럼 보이자 구후영은 바로 도움을 청했다.
"그냥 사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난 풍 대협과 사제의 연을 맺진 않았소."
"거참. 빡빡하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옥무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금검당과 은도당이 합치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성정이 너무 달라서가 아니겠소?"
"아니야. 서로 상대를 압도할 실력이 없어서야."
옥무영의 단정 지은 말에 구후영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무당과 철혈방도 그래. 싸우면 무당이 이기지만, 철혈방이 고개를 숙일 정도로 차이가 큰 게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대립하는 거지."
"철혈방의 성정상 무당이 강하다고 순순히 고개를 숙이진 않을 것 같소."
"그럼 아예 조정에도 반항하지 그랬어."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도 말문이 막혔다.
"사제뿐이 아니라 공형선과 왕경초도 무당의 기명제자로 이름을 올리는 게 좋아. 명교가 마교로 이름을 바꿨던 걸 모방해 철혈방도 다른 이름을 쓰는 게 좋겠다. 무당에 철혈대회의 의사결정권도 주고."
옥무영은 미리 생각을 마쳤는지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의결권을 총 다섯으로 하고, 방주가 하나, 금검당과 은도당이 각각 하나, 무당이 둘 가지면 딱히 철혈방에 불리하진 않겠지? 그 둘 중 하나를 무당 장문에게 주면 더 걱정할 일이 없고."
"철혈방을 감시하겠다는 거요?"
철혈방의 셋이 한마음이면 무당의 의사결정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대신 무당은 철혈방의 일거수일투족을 코밑에 두고 감시할 수 있다.
"그게 뭐가 나쁘지? 밖에 알리기 부끄러운 더러운 짓거리를 하려고? 그런 건 무당도 뒷구멍으로 다 몰래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저놈이 쭉 발톱을 숨기고 있었구나.'
둘의 대화를 듣던 현영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시린 기운을 몇 번이나 느꼈다.
'일찍 알았으면 중용했을 텐데.'
사람은 자기 허물을 잘 보지 못하는 법이다. 옥무영이 영민함을 일찍 드러냈으면 반드시 견제했을 현영자지만, 정작 본인은 절대 몰랐다.
"철혈방과 합치는 건 무당에도 좋은 일이오."
구후영이 고민에 빠진 듯하여 보이자 옥무영은 현영자한테 말을 걸었다.
"뭐라는지, 들어는 보겠소."
"자, 철혈방이 사라졌소. 그럼 무당은 어떻게 될 것 같소?"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삼풍 조사도 없는 마당에 철혈방까지 사라지면, 조정이 무당을 거들떠나 보겠소?"
"무당의 재정은 조정의 지원이 없어도 되는 수준이네."
"그러나 소림처럼 조정의 눈치를 보며 함부로 확장하지 못하겠지. 소림은 송나라 때부터 아미를 넘어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렸는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남 지역에 끼치는 영향은 철혈방이 호북에 끼치는 영향에도 못 미치오."
옥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대로면 천 년이 더 지나도 무당은 소림 아래일 거요."
현영자는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당이 철혈방을 품어야 하오. 그래야 조정이 무당을 홀대하지 않소. 게다가 소림도 무당도 못 하는 일을 철혈방이 하면 언젠간 소림을 뛰어넘지 않겠소?"
"소림이라고 보고만 있을까?"
겉으론 코웃음을 쳤지만, 현영자의 마음은 이미 옥무영 쪽으로 기울었다.
"철혈방을 그러안지 않으면 보고만 있을 거 같은데?"
그때, 고민을 마친 구후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옥 장문 말대로 하는 걸 철혈방 방도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겠소?"
"그러니까 하나하나 차례로 진행해야지. 제일 먼저 할 일은 사제가 무당의 기명제자가 돼서 태극혜검을 해석하는 거야."
태극혜검 덕분에 무당의 명성은 근래 가파르게 상승했다. 거기에 태극혜검을 해석해 실질적인 실력 향상까지 이루면 소림과 당당히 어깨를 견줄 바탕이 생긴다.
"그럼 나머지는 그냥 도랑에 물 대는 식 아니겠어? 더 강해진 무당과 싸우는 것보다 같은 편이 되는 게 훨씬 이득일 테니. 거기에 생사존망까지 걸렸는데 아무리 철혈방 방도들이 무식하기로서 절대 안 된다고 버틸까?"
'혼자 정할 일이 아니다.'
구후영이 방주긴 하나, 실질적으로 철혈방을 이끄는 건 공형선과 왕경초다.
"무당의 기명제자가 되는 건 내 사부의 허락이 필요하오."
구후영은 일단 핑계를 찾아 상의할 시간을 벌려 했다.
"사부가 있는데 장문이 된 거였어?"
옥무영은 풍불지한테서 구후영이 낙화문 장문임을 들었기에 당연히 사부가 죽었으려니 했고, 풍불지를 새 사부로 모신 줄로 알았다.
"그래서 날 사형으로 인정하지 않은 거군."
배첩의 이름을 보고 만나기로 한 것도, 계약을 체결해주기로 한 것도, 모두 구후영을 자신의 사제라고 여겨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상대가 지닌 은자가 부족했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괜히 섭섭해했군."
옥무영은 구후영이 자신의 노고도 몰라주고 사형으로 부르지 않아 꽤 섭섭했는데, 사정을 알고 나니 마음이 순식간에 풀렸다.
"그럼 이건 어때. 사제의 사부가 무당 장로가 되는 건."
무당과 비교하긴 미안하나, 구후영은 필경 홍엽산장의 장주고 철혈방의 방주다. 그런 구후영이 죽은 현현자의 명의상 제자가 되는 건 철혈방 방도들 입장에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낙화문의 태상장문이 무당의 장로가 되며 구후영이 무당의 기명제자가 되는 건 철혈방 방도들이 반대하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다.
"이것도 내가 정할 일이 아닌 것 같소."
"사제. 정신 차려."
옥무영이 정색했다.
"지금 당장 호북에서 소리깨나 친다는 자들 앞에서 확실히 발표해야 무당이든 철혈방이든 도로 무를 수 없다. 이 결정은 호북 무림의 평화와 백성의 안녕뿐이 아니라 무당의 흥성과 철혈방의 연속延續도 가름한다. 자잘한 예의범절 따위를 따질 계제가 절대 아니란 말이다."
곁에서 듣던 현영자는 옥무영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내가 죽은 다음에 믿고 무당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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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현영자와 옥무영에게 양해를 구하고 철혈방 사람들과 상의하러 갔다.
"장문은 어쩔 생각이오?"
"대장로가 장문 대접을 해준다면 무당에 남을 생각이오."
원하는 대답을 들었지만, 상대의 건방진 태도에 현영자는 이가 갈렸다.
"장문 대접?"
"소림을 보시오. 장문보다 높은 배분은 문파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소."
"곧 천 년이 되는 소림과 이제 백 년인 무당이 같을까."
"소림은 송나라 때 나한당 제자들이 강호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보고 들은 모든 무공을 글로 적어 보고하고, 그 무공을 어떻게 파훼할지 연구했다고 하오. 덕분에 소림의 칠십이절기가 만들어졌고."
옥무영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삼풍 조사가 남긴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건 다 무당이 무공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요. 강호에서 경험을 쌓아야 하는 제자를 절정에 이르기 전엔 문파도 못 벗어나게 하니 어느 세월에 고수가 되겠소."
무당은 장삼풍이란 기둥 하나로 세워진 건물이다. 그 기둥이 사라진 후, 장로들은 무당의 명예에 오점이 생길까 봐 무척이나 조심했다.
"내가 어떻게든 사제를 설득해 태극혜검의 해석을 돕도록 할 테니, 장로들은 그만 따뜻한 방구석에서 제자들 재롱이나 즐기시오."
- 작가의말
옥무영은 구후영에게 도움을 주고 현영자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동시에 자기 욕심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주인공으로 글을 써보고 싶은데, 개연성 챙기기 너무 힘들 거 같네요. 글의 흐름을 당연하게 만들려고 부연 설명이 많으면 글이 무거워지고, 설명을 생략하면 누군가는 조연들의 심리와 행동이 이상하다고 지적할 것 같고.
결국엔 필력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술력과 표현력이 좀 더 나아지면 그때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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