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사귀有錢使鬼
진晋나라의 노포魯褒가 전신논錢神論에서.
유전가사귀有錢可使鬼 이황인호而況人乎라고 하였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저자는 진심일까?'
그간 경 총관을 지켜보며 돈 쓰는 법을 꽤 배운 구후영이다. 그러나 철혈방의 생사존망이 달린 중차대한 일마저 돈으로 쉽게 될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저녁까지 시간을 드리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
말을 마친 옥무영이 주인 자리로 갔고, 마침 무당 제자들이 차를 올렸다. 옥무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기색으로 손님들에게 차를 권했다.
"철혈방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모두 말없이 차를 마시던 중에 배불뚝이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로께 인사드립니다."
"장문 사질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 여긴 내게 맡기고 어서 일 보시오."
"그럼 사질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옥무영은 구후영 일행에게 만나서 반가웠다는 상투적인 작별 인사를 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철혈방 방주 구후영이 무당 대장로께 인사드리오. 별래무양하셨소?"
"무당 현영자요. 백옥봉에서 일별一別한 후 많은 일이 있었소."
"현현 진인의 소식은 들었소. 참으로 애석한 일이고 중원 무림의 손실이 아닌가 싶소."
"구후 장문의 말을 들으면 사형도 기뻐할 거요. 그런데, 낙화문이 철혈방 소속이었소?"
현영자의 추궁에 구후영이 빙그레 웃었다.
"소생은 낙화문 장문이지만, 홍엽산장의 장주이기도 하오. 홍엽산장과 철혈방의 관계는 대장로께서도 아실 테니 부연 설명하지 않겠소."
"그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정이라는 게 어디 그리 쉽게 끊어지겠소. 더구나 기만일지 기십만일지 모를 무고한 사람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면 더욱더 외면하기 힘들지 않겠소?"
"찾은 용건이 무엇이오?"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낸 현영자가 단도직입으로 질문했다. 원래대로라면 좀 더 쓸데없는 얘기로 인내심을 시험하며 상대가 먼저 입 열기를 기다렸겠지만, 태극혜검을 한시라도 빨리 해독하고픈 마음에 평소와 달리 서둘렀다.
"배첩에 적은 그대로요."
"진무관 건축을 맡겠다는 게 진짜 용건이었소?"
옥무영과 마찬가지로, 현영자 역시 배첩에 적은 내용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진심이오."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오. 다섯 분에겐 객방을 내드릴 테니, 기다리는 동안 편히 쉬시기 바라오."
"좋은 소식 기대하겠소."
현영자는 사람을 불러 구후영 일행을 객방까지 모시라고 지시한 후, 다소 급한 모습으로 태청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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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현영자 쪽은 아무 소식도 없었다.
"거절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단아가 입을 열어 정적을 깨뜨렸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바로 거절하는 건 모양새가 안 좋으니 시간을 끄는 거겠지."
공형선이 단아의 의견에 동조했다.
"문제는 무당 장로들을 도통 만날 수 없다는 건데."
왕경초가 탄식했다. 무당의 실권자들을 설득 혹은 매수하려면 얼굴을 봐야 하는데, 대부분이 옥청전에서 태극혜검을 해석하는 일에 몰두하여 전혀 기회가 없었다.
"옥 장문의 제안은 어찌 생각하오?"
연무쌍이 질문했다.
"다들 돈이 얼마 있습니까? 제 몸에 전표로 만 냥이 있습니다."
단아가 말했다.
"내겐 삼천 냥이 있소."
왕경초 역시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홍엽산장은 만 냥을 준비했소."
연무쌍의 말에 은자를 준비한 사실을 처음 안 구후영이 깜짝 놀랐다.
"내게도 오천 냥이 있긴 한데."
공형선이 말끝을 흐렸다. 일이 안 풀리면 무당의 실권자들을 회유하려고 최대한 준비했는데도 옥무영이 요구한 액수보다 이만 이천 냥이나 부족했다.
그때, 구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문밖에는 옥무영이 살짝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경공에 꽤 자신이 있었는데 구후영이 기척을 듣고 미리 마중한 게 의외인 모양이었다.
"내 제안은 고민해 봤소?"
"좀 더 시간을 주시오."
"혹시 장로들이 당신의 요청을 진지하게 고민할 거로 여기는 거면 내 제안은 없던 일로 하겠소. 이런 지저분한 일은 길게 끌면 반드시 탈이 생기오."
옥무영의 단호한 말투에 구후영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옥 장문의 제안이 구미가 당기긴 하는데, 은자가 부족하오. 절반 정도를 계약 후에 받아도 괜찮다면 바로 일을 진행하겠소."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은자는 믿는데 사람은 잘 안 믿는 편이라."
"모자란 액수만큼 물건을 저당할까 하는데, 받으시겠소?"
저당이란 말에 옥무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물건인지 들어보고 결정하겠소."
"진나라 이후로 제작법이 사라진 관은고검이오. 최소로 잡아도 은자 이만 냥은 될 거요."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눈을 번쩍였다.
"일검사만검一劍似萬劍의 그 관은고검 말이오? 그거 어딨소?"
검 하나를 만 개의 검처럼 쓸 수 있다는 말로, 천공교검에 꼭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해검지에 두고 왔소."
"좋소. 계약을 진행하겠소."
옥무영이 미리 준비한 계약서 두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방주. 진짜 보검을 저당 잡힐 생각이오?"
무인에게 있어 병장기는 분신과 같다. 더구나 구후영의 천공교검은 일 척 두께의 철판을 깨뜨리고도 이 하나 안 나갈 정도로 대단한 보검이다.
"검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결국엔 신외지물이오. 돈이 준비될 때까지 잠시 맡기는 건데 망설일 이유가 없소."
구후영의 말에 왕경초가 크게 감동했다.
"방주가 우릴 위하는 마음을 이 왕 모는 평생 잊지 않겠소."
대화하는 사이, 옥무영이 계약서에 서명을 완성하고 지장까지 찍었다.
"여기에 서명하고, 날짜 부분에 나랑 안 겹치게 지장을 찍고, 먹이 마르면 본인 이름 위에 인장을 찍으면 되오."
구후영은 먼저 자신의 이름을 적은 다음, 엄지로 인주를 묻혀 날짜 부분에 지장을 찍었다. 그러는 사이 옥무영이 무당 장문의 직인을 꺼내 자기 서명 위에 인장을 찍었다.
"다 마른 것 같으니 방주도 어서 인장을 찍으시오."
구후영은 짐에서 정의철혈正義鐵血 네 글자를 새긴 철혈방 방주의 인장을 꺼낸 다음, 인주를 살짝 찍어 자신의 서명 위에 가볍게 눌렀다.
"좋소. 밑에 가서 검을 내게 넘기면 계약서를 드리겠소."
잘 만 계약서를 죽통 안에 넣으며 옥무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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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이지?'
벅찬 마음을 안고 해검지에 도착한 일행은 눈앞의 참상에 아연실색했다.
누군지 모를 사내 여럿이 입으로 선혈을 토한 채 미동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양달은 피가 철철 흐르는 왼팔을 부여잡고 샛노래진 얼굴로 말뚝에 기대 기절해 있었다.
"난 양 단주를 치료할 테니 여러분은 주변을 살피시오."
당부를 마친 구후영이 양달의 혈도를 여럿 찍어 유혈을 멈춘 다음, 옷을 찢고 상처 주변에 침을 몇 개 꽂았다.
그러곤 양달의 머리카락을 뽑았다.
"뭐 하는 짓이오?"
구후영의 이상한 행동에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맴돌던 왕경초가 추궁했다.
"상처를 기우려고 하오."
구후영은 술로 상처를 씻고 양달의 머리카락을 침에 감았다. 그러곤 침으로 양달의 상처를 기웠다.
익숙한 솜씨로 침을 꽂았다 뺀 다음, 머리카락만 남겨 매듭을 짓는 구후영의 모습에 왕경초가 입을 딱 벌렸다.
약초를 다루는 방파답게 왕경초 역시 의술을 조금 아는데, 구후영이 보여준 모습은 태어나서 들은 적도 없었다.
"삶은 실이나 양의 심줄로 하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지금처럼 사정이 여의찮을 땐 본인 모발이 그나마 낫소."
"오해해서 미안하오."
왕경초는 딱히 구후영을 나무랄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친하게 지내던 양달이 위태해 보이자 마음이 조급했을 뿐이다.
그걸 알기에 구후영도 왕경초의 사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피 냄새가 비린 걸 보니 중독이오. 중독 경로를 알아야 하니 부득이하게 양 단주를 깨우겠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가장 굵은 대침을 꺼내 양달의 목에 쑥 꽂았다.
"컥."
구후영이 대침을 뽑자 양달이 입으로 피거품을 토하며 눈을 번쩍 떴다.
"양달, 괜찮아?"
왕경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열 명이 넘은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했습니다. 방주의 보검을 어떻게든 지키려 했는데, 독이 묻은 비수에 베여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양달은 흐릿한 눈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곧바로 다시 기절했다.
"검. 방주의 검이 있는지 보시오."
왕경초의 외침에 연무쌍이 무기를 보관한 방의 문을 열고 횃불로 구석구석 비춰 확인했다.
"없소."
병장기를 보관하는 방엔 일행이 맡긴 병장기뿐이었다. 덕분에 굳이 오래 살피지 않아도 검이 사라진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옥무영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철혈방이 약속을 지키리라 믿겠소."
말을 마친 옥무영이 죽통을 단아에게 건넸다.
"자, 계약서요. 일단 가진 돈이라도 내게 주시오."
단아는 죽통을 열어 안에 든 계약서를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연무쌍과 왕경초와 공형선에게서 전표를 받아 자신의 것까지 합쳐 옥무영에게 건넸다.
"난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 이만 떠나겠소. 남은 돈을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홍엽산장으로 오시오."
연무쌍의 대답에 옥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에서 방금 작성한 계약을 가짜라고 우길 거요. 이게 진짜임을 증명할 사람은 나뿐이니, 딴마음 먹지 마시오. 남은 이만 이천 냥을 난 꼭 받아야겠고, 일이 끝나고 받을 오만 냥도 꿀꺽할 생각을 절대 마시오."
옥무영이 으름장을 놓고 훌쩍 사라지자 일행의 주의력은 양달을 치료하는 구후영에게 집중됐다.
"구후 공자. 치료가 오래 걸립니까?"
단아의 질문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강한 독인데다가 출혈이 심해서 치료가 끝나도 바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때, 공형선이 질문했다.
"우린 옥 장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오?"
공형선의 질문에 단아가 대답했다.
"계약서를 손에 넣었으니 옥 장문이 꿍꿍이가 있는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무당 장로들이 닥쳐서 계약서를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그에 구후영이 결단했다.
"네 분은 계약서를 들고 당장 떠나는 게 좋겠소. 난 양 단주를 치료한 다음 상황을 봐가며 움직이겠소."
공형선은 구후영의 말에 따르고 싶었지만, 왕경초의 눈치가 보여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남겠소."
과연, 왕경초는 다친 양달을 두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검을 노린 자들의 목적을 우린 알지 못하오. 단지 보검을 탐낸 거라면 오히려 다행이오. 만에 하나 계약이 성사되는 걸 방해하려고 검을 훔친 거라면, 돌아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거요."
구후영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
"가능성이 미약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아무리 대단한 놈들이어도 일행이 나눈 대화를 듣고 바로 십수 명을 동원해 해검지를 공격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현재 벌어진 일 역시 말이 되는 건 아니어서, 조심해 나쁠 건 없었다.
"양 단주는 내가 반드시 살릴 테니, 믿고 떠나시오."
"방주, 양달을 꼭 살리셔야 하오."
왕경초는 구후영에게 거듭 당부하고서야 해검지를 떠났다.
- 작가의말
징징거림은 과학이란 말을 들었는데, 진짜네요. 어제 저녁까지 접속이 불안했는데 오늘은 잘되네요.
그럼 오늘부터 비축분 마련에 박차를 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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