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부동金剛不動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색은 꽉 참을 이름이고 공은 텅 빔을 이름이다.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니, 색은 공이 될 수 없고 공은 색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부처는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했을까.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텅 비었다고 함은 같음이다. 꽉 찼다고 함 역시 같음이다.
텅 비었을 때와 꽉 찼을 때 다름이 없다. 다름이 없으니 같음이고, 그러니 색과 공은 결국엔 같음이다.
금강부동의 전설은 여기서 시작됐다.
공간 어디에나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어디에도 없는 거다. 반대로 공간 어디에도 없다면, 어디에도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금강부동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어디에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원경은 타고나길 소림의 무공에 적합했다. 공유의 세세한 가르침을 받아 수련에 있어서 헤매지 않았고,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작은 결함이 있긴 했으나 대체로 심지도 굳었다.
덕분에 금강인을 얻긴 했으나, 금강부동은 얻지 못했다.
법여가 예상한 卍자가 아닌 十자가 새겨진 이유다.
사실 금강부동의 신법을 펼친 지금도 원경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그간 공유의 가르침과 오대산에서 불경 공부를 열심히 한 게 헛되지 않아 몸이 먼저 금강부동의 경지에 발을 담갔을 뿐이었다.
쿵!
원경의 몸이 사라졌다가 모용연 앞에 나타나 흑철의 장법을 대신 맞았다.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만, 구후영과 달랐다.
구후영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건 인간의 감각이 완벽하지 못한 탓이다.
누군가가 눈을 감으며 입을 벌리는 동시에 손을 입으로 가져가면, 그걸 본 사람은 그 누군가가 하품을 하련다고 판단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이어지는 동작을 예상하게 되고, 대체로 예상은 맞아떨어진다.
구후영의 경공은 아니다.
전혀 전조가 없기에 사람들은 구후영이 사라졌다고 판단한다. 그에 허둥거리며 두리번거리면 구후영은 이미 몇 장 밖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바짝 긴장해서 주시했다면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구후영의 모습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원경은 아니었다.
그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눈만 속이는 구후영과 달리, 감각까지 속인 것이다. 그 원리에 대해선 직접 펼친 원경도 모르니 구경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알 리가 만무하다.
그렇기에 흑철은 더없이 놀랐다.
그간 지켜본 바로 경공은 구후영과 단아가 가장 뛰어나기에 둘만 주시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을 아예 잊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원경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서 자신이 펼친 대수인을 받자 깜짝 놀랐다.
동시에 영문 모를 질투심이 끝없이 솟아올랐다.
'이 어린놈이 금강인을 얻었다고?'
흑철은 열여덟에 대수인을 소성했다.
본인은 자신의 재능이 거기까지임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대소궁의 큰스님들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대수인을 대성할 인재가 나타났다는 생각에 기뻤던 큰스님들은 자신들이 아는 이야기를 기꺼이 흑철에게 들려줬는데, 개중에 금강인에 관한 얘기도 있었다.
대수인을 대성하면 천하무적인데, 딱 하나 조심할 건 소림사의 금강인이다. 금강인을 얻은 자는 대수인을 맞아도 아무런 상해를 입지 않는다.
대수인을 대성한 자 역시 금강인을 얻은 자에게 아무리 맞아도 피해를 보지 않지만, 대수인은 공격적이고 금강인은 수비적임을 생각하면 대수인이 손해다.
흑철은 그때 이미 대수인을 포기하고 다른 무공을 익힐 궁리가 가득했기에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원경의 놀라운 경공에 그때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그게 문제였다.
평소의 흑철이라면 원경이 나타난 즉시 도망쳤을 것이다.
모용연을 꼭 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행의 목표가 유근이나 모용용이 아닌 상자에 든 책자라는 확신을 얻었으니까.
'황금 일만 냥.'
그러나 질투에 눈이 먼 흑철은 평소와 달리 움직였다. 이 자리에서 원경을 죽이고 상자로 구후영을 유인해서 죽이면 황금 만 냥을 얻는다는 생각으로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합리화하며, 원경을 향해 흑사장을 펼쳤다.
흑 장로의 흑사장이 아닌 대수인과 결합한 흑철의 흑사장을.
흑사장의 운기를 한 흑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했다.
흑면수라는 별호를 얻게 한, 마주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전설이 생기게 한, 그러나 사실은 대수인과 흑사장을 억지로 합치면서 생긴 부작용일 뿐인 흑면(검은 얼굴)이었다.
흡.
흑철이 거둔 손바닥을 다시 내밀자 원경은 호흡을 멈추며 양손의 손가락을 얽어 금강인을 맺었다.
그러나 철퇴의 머리를 닮은 단단한 금강인은 흑사장을 막지 못했다.
원경이 금강인을 대성하지 못한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소성에 이르렀으나 내공이 훨씬 깊은 흑철의 대수인에 작은 상해를 입었고, 바로 이어지는 흑사장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펑!
흑사장을 가슴 정중앙에 맞은 원경이 검은 피를 토하며 모용연의 품에 안겨 뒤로 훨훨 날아갔다.
"윽."
그러나 비명이 터진 건 흑철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구후영의 검이 흑철의 오른쪽 어깨를 벴다. 원래 노린 건 목이었는데, 원경의 반탄력에 흑철의 몸이 흔들리면서 오히려 목숨을 부지한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경의 반탄력에 저항하느라 몸속의 내공이 절로 움직이며 독을 가두느라 막아뒀던 왼팔의 혈도들이 열렸다.
절정의 고수도 몇 호흡 만에 죽게 만든 독이 날뛰며 흑철의 심맥으로 흐르려 했다.
'젠장.'
독이 몰려오는데 구후영의 검이 다시 번뜩인다. 흑철은 자신의 멍청한 결정을 후회할 틈도 없었다.
팟 소리와 함께 흑철의 왼쪽 팔이 몸과 분리됐다. 목을 노리는 구후영에게 왼팔을 내준 건데, 팔 하나를 잃긴 했으나 목숨을 구했으니 딱히 손해는 아니었다.
"소백산小白山에서 봄세."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갑작스러운 출혈로 느껴지는 어지러움, 그새 몸에 침투한 미량의 독으로 제정신이 아닌 가운데도 흑철은 황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그릇된 결정이 그저 잘못된 게 아님을 증명하고픈 오기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끝내지."
구후영의 검이 다시 흑철을 노렸다.
귀찮은 파리를 쫓으려는 듯한 무심한 휘두름이었지만, 흑철은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퉤!"
그래서 필살로 숨겨두었던 공격을 펼쳤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이 살기 위해서.
구후영의 검 끝이 잠깐 떨리더니 모용용에게 향하는 철침鐵針을 격추했다. 입에 물고 있던 걸 생각하면 독 같은 건 바르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입으로 발사했다고 해도 흑철 정도면 사람 목숨을 취할 수 있다.
고민할 겨를이 있었다면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모용용을 살리는 것과 원경의 목숨을 위협한 흑철을 죽이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겠지만,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여지자 구후영은 그저 본성대로 행동했다.
"잊지 말게. 소백산에서 기다리겠네."
단아와 장선 등이 막으려 했지만, 흑철의 경공은 천마가 왜 신검을 천하제일로 뽑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여기, 아직 살아 있어요."
그리고.
모용연의 외침이 흑철을 쫓으려던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게 했다.
"형님. 제 말이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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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건가?'
지혈하는 약초 가루를 잔뜩 뿌려 겨우 피를 멈춘 흑철이 자조했다.
잘린 게 하필이면 왼팔이어서 혈도를 짚어 지혈하는 건 어려웠다. 구후영처럼 의원 출신이라면 몰라도, 그저 무인인 흑철에게 심맥에 속한 혈도를 짚어 지혈하는 건 크나큰 모험이었다.
그래서 피를 많이 흘렸다.
'은퇴할까.'
명은 은자를 좋아하나 서역에선 황금을 은자보다 더 쳐준다.
흑철은 언젠간 서역에 가서 수백 명 노예를 거느리고 편한 말년을 보낼 생각으로 의뢰금을 웬만하면 황금으로 받았다.
그간 돈은 이미 넘치나 교주 자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여태껏 실행하지 못했는데, 팔 하나를 잃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 탓이었을까.
흑철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저질렀다.
"저놈이다."
우문강현은 도망가던 중에 여덟 명의 흑갑호위를 만났다.
'차라리 여기서 끝내자.'
지금 이 난리를 피운 건 불로장생의 비법에 진실성을 더하기 위함이다. 불로장생의 비법을 그저 우연히 얻는 것보다 고난을 이겨가며 어렵게 얻는 게 훨씬 그럴듯하단 이유였다.
고작 그런 이유로 벌써 수십 명이나 죽은 걸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지만.
우문강현은 안 그래도 께름직했던 세 번째 계책을 쓰는 대신 흑철한테서 책자를 뺏기로 했다.
"그냥 죽여."
왜 이 정도로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안 들켰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우문강현은 궁금을 푸는 대신 그저 흑철을 죽이기로 했다.
슉!
수십 개 암기가 흑철을 향해 날아갔다.
"후."
피하기엔 늦었다는 판단에 흑철은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동시에 얼굴뿐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손까지 시커메지더니, 흑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웬만한 갑옷도 뚫을 흑갑호위들의 암기가 흑철의 몸에 맞고 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졌다.
돌처럼 단단했다면 아예 튕겼을 텐데 힘없이 떨어지는 걸 보니 박히진 못해도 충격만큼은 전달한 듯했다.
과연.
흑철이 피를 울컥 토했다.
그에 흑갑호위 둘이 왼쪽으로 움직였다. 혹시 흑철이 경공으로 도망가면 귀찮으니 퇴로를 차단하려는 생각이었다.
그게 패착이었다.
손만 단단하게 하는 흑사장의 운기법을 전신으로 돌리면서 흑철도 큰 내상을 입었지만,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라 흑갑호위들의 예상보다 훨씬 기민하게 움직였다.
"물러나."
우문강현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으나, 늦었다.
흑철은 더 큰 내상을 입을 각오로 대수인을 펼쳤고, 앞을 막은 두 명의 흑갑호위를 해치우고 성공적으로 도주했다.
"폐하가 원하는 물건이 저 상자에 있다."
우문강현의 외침에 흑갑호위들이 고민도 없이 갑옷을 벗었다.
"넷만 쫓고, 둘은 남아서 유 태감을 찾아야지."
우문강현의 말에 두 명이 다시 흑갑을 입고 우문강현을 따라 골짜기로 가고, 남은 넷은 흑갑에서 암기들을 수거한 다음 어느새 새까만 점이 된 흑철을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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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오."
원경은 화산에서 이미 대수인에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는데, 고작 반나절 만에 완전히 회복했다. 원경이 백팔나한진을 상대하며 얻은 내상이 완치되지 않았던 상황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문제는 흑사장이었다.
흑철의 독문무공인 흑사장은 예전에 없었던 무공으로 흑 장로가 철사장을 기반으로 이것저것 섞다가 우연히 얻었다.
그걸 제자인 흑철이 더 강하게 만들었다. 만약 흑철이 마교가 아닌 중원의 무인이었다면 신장의 후계자 정도의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금강인 덕분에 가슴 정중앙에 맞고도 심장이 멀쩡했다.
심맥을 비롯해 간맥 등도 꽤 큰 상해를 입긴 했지만.
"침이 안 들어가오."
기절한 원경의 몸에 침이 박히지 않았다. 그냥 침은 물론 투기침도 박히지 않았고, 직접 명문혈에 손바닥을 대고 내공을 주입하려고 해도 원경의 몸이 완강히 거부했다.
원경의 목숨을 살린 금강인이 현재는 원경의 치료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현월궁으로 가죠."
단아가 말했다.
"현월궁에 내상에 좋은 영약이 많습니다."
- 작가의말
이번 편엔 금강부동에 관한 과학적 해석을 실었습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소싯적에 우주물리학 정도는 떼셨을 테니 간단한 설명에도 다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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