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구등三流九等
인간은 상지지류上智之流와 중지지류中知之流와 하우지류下愚之流로 나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류와 중류는 똑똑하고 하류는 우매하다.
상중하 삼류는 또 아홉 등급으로 나뉜다.
상류에서 일등은 석가여래와 옥황상제고 이등은 부처와 신선이며 삼등은 황제다.
중류는 선비와 의원과 스님과 도사를 망라한다.
하류는 기생과 거지를 비롯한 천한 인생이다. 머리를 자르는 이발사도 여기에 포함되고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광대도 하류에 속한다.
"하오문은 하류 인생들이 조금이라도 잘살아 보려고 힘을 뭉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출현했습니다."
약장수나 극단이나 곡예단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돌아다닌다. 그러나 기생이나 거지를 비롯한 대부분 하류 인생은 평생 같은 곳에 산다.
홀아비 어려움은 과부가 잘 안다고, 하찮게 여겨지는 자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았다.
하류 인생은 재해가 일거나 흉년이 들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부류라 세상의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여 늘 귀를 세우고 살았고, 들은 걸 공유했다.
어느 순간, 이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모아 뭔가를 유추하기 시작했고, 그걸 이용해 이득을 얻으며 조직을 이뤘다.
그렇게 하류 인생들이 정보를 팔아 돈을 벌어 더 나은 삶을 영위하자 곳곳에서 따라 하기 시작했고, 어느샌가 이들에겐 하오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오下五는 마부와 사공, 객점의 점소이, 가마를 드는 가마꾼, 짐을 나르는 각부脚夫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외에도 기녀와 시종들이 엿들은 것까지 합치면 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손금 보듯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이 흐르는 곳이면 사람이 모이고 다툼이 생긴다. 하오문에 돈이 흐르기 시작하자 힘을 갖춘 자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며 그런 자들에게 장악된 하오문은 서서히 변해갔다.
하류 인생들을 위한 무리가 아니라 이익만 좇는 집단으로 변질한 것이다.
"재작년 가을에 어떤 협객이 하오문주인 이홍루 루주를 죽였습니다. 태원부의 하오문이라도 이젠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동생인 추영주점의 루주가 문주 자리를 차지하고 예전과 똑같이 행세했습니다."
천한 신분은 바꿀 수 없으니 최소한 춥고 배곯는 삶이라도 면하는 게 하류 인생의 목표다. 그런데 하오문 자체는 돈을 잘 벌지만, 하오문에 속한 대부분 문도는 여전히 헐벗고 굶주렸다.
"다들 불만이 극에 달했으나, 문주를 따르는 자들이 무공이 강해서 꾹 참고 있었습니다."
구후영은 어렵지 않게 전후 사정을 알아챘다.
'삼형이 하오문주를 죽였구나. 그것 때문에 현 하오문주가 복수하려 했고, 무당에 있는 삼형을 어쩔 수 없으니 내가 있는 낙화문에 불을 지른 거구나.'
이들이 자룡의 실종과 별 연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구후영은 힘이 탁 풀렸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문주와 그 앞잡이들을 쫓아내서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하오문을 도울 힘이 없는 건 둘째 치고, 구후영도 할 일이 태산이다.
"어떻게 날 이리 빨리 찾았소?"
게다가 상대의 저의가 여전히 의심스럽다.
"추영주점에 불이 났습니다. 아는 점소이가 정신 나간 얼굴로 도망가기에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루주라는 자를 찾는지도 알겠군."
"그럼요. 놈이 지금 어딨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사공은 잠깐 고민하고 말을 이었다.
"동생을 찾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작년에 총타總舵의 장로님들이 와서 조사한 적 있는데, 그때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공의 말에 구후영은 귀가 번쩍 뜨였다.
"혹시 장로라는 사람들이 길잡이를 하는 형제요?"
"맞습니다. 두 분 다 진심으로 우리를 위하는 분들인데, 총타의 영향력이 별로 없다 보니 마음만큼 우릴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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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은 사공의 도움으로 임초현을 금방 찾았다.
"사부. 일은 이렇게 된 겁니다."
구후영은 술김에 청빈 등과 결의형제를 맺은 사실을 털어놓고, 청빈이 장의행협하여 이홍루의 루주이자 당시 하오문주였던 자를 죽였음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자기 형이 죽었다고 의형제를 맺은 네가 몸담은 낙화문의 건물을 태웠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토막 내서 온전히 땅에 못 묻히게 만들어야 할 놈이구나. 그래, 그놈이 어디 있느냐?"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사공이 앞장서고 구후영과 임초현이 뒤를 따랐다. 셋은 불이 난 추영주점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헤치며 반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여긴 이홍루 아닌가?"
"맞습니다. 저기 오층에 현 하오문주가 있습니다. 늘 무인을 여럿 데리고 다니는데, 하나같이 암기술을 익힌 비열한 놈들입니다."
"사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니다. 사부가 어찌 제자를 위험에 앞세우겠느냐."
둘이 서로 앞장서겠다고 우기던 그때, 오층의 나무 창문이 박살 나며 회색 장삼을 입은 자가 밖으로 추락했다.
"저자가 하오문의 재정을 책임진 장방입니다."
바닥에 가로 떨어진 장방은 몸을 몇 번 꿈틀거리다가 혀를 빼물었다.
"두 호법 아닐까요?"
두전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후영과 임초현은 실랑이를 멈추고 함께 이홍루의 오층으로 달려갔다.
"합!"
둘이 오층에 이르렀을 때, 두전은 세 명의 무인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실력 자체는 두전이 훨씬 강하지만, 상대의 암기를 염두에 두다 보니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호법, 우리가 왔네."
임초현의 외침에 당황했는지 놈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하!"
사기가 오른 두전이 연속으로 장법을 내지르자 상대하던 셋 중 두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남은 한 명이 잽싸게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낙화문에 불을 질렀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다치신 건 은자 백 냥으로 보상 드리겠습니다."
"참. 치료비로만 삼백 냥이나 썼는데 백 냥으로 때우겠다고?"
하오문이 돈을 잘 버는 건 맞다. 그러나 그것도 하류 인생 기준에서다. 사실 은자 백 냥도 큰마음 먹고 부른 액수기에, 하오문주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홍루가 태원부 최고의 청루고 추영주점이 태원부 최고의 주루인데, 고작 백 냥밖에 없어?"
임초현은 하오문주를 죽이기 전에 하나라도 뽑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그게, 지부대인을 비롯해 상납할 곳도 많고, 또 대부분 돈은 전답이나 장원으로 묶여 있어서. 시일을 조금만 주시면 가진 걸 다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느새 사공이 오층까지 올라왔다.
"이자의 재산이 얼마고 집과 전답 문서가 어디 있는지는 제가 압니다. 이자를 굳이 살려두실 필요가 없습니다."
구후영의 검이 번쩍이더니 하오문주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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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중양절 이후였습니다. 양양의 하오문이 비둘기를 날려 구후영이라는 자의 정보가 급히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공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당시 태원부 하오문은 문주가 죽은 탓에 엉망이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문주가 되어야 한다며 손찌검이 안 난 게 이상할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자가 제안했습니다. 은자 스무 냥짜리 의뢰가 들어왔는데, 이를 해결하는 자가 다음 문주가 되는 게 어떠냐고."
구후영은 실소가 나왔다.
"사람들이 날 구후영이 아닌 유저로 알고 있었으니. 그 의뢰를 해결할 사람은 추영주점의 주인밖에 없었겠군."
"맞습니다. 주점의 점소이 중 그림 솜씨가 좋은 놈이 있어 구후 소협과 청빈이라는 분의 초상화를 그려서 양양에 보냈습니다. 양양에선 결과에 만족한다며 은자 이십 냥을 보내왔고요."
"잠깐. 그들이 궁금해한 게 나요 아니면 내 삼형이오?"
"구후 소협으로 압니다."
"설마."
구후영의 얼굴이 굳어지자 임초현이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유저야. 무슨 일이냐?"
"제 옷을 자룡이 욕심내서 가지라고 했습니다. 자룡이 사라진 날도 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허!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나 이건 네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아라."
'날 노린 이유가 뭐지? 내가 딱히 원한을 산 일도 없고, 그땐 천공교검을 얻기도 전이었는데. 그것도 삼천 리나 먼 양양에서. 잠깐. 양양이면 모용세가나 현월궁은 아닌데.'
저들이 노린 게 자룡이 아닌 자신이었다는 걸 안 덕분에 복잡하던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날 궁금해 한 자가 누군지는 아시오?"
구후영이 간절한 얼굴로 사공에게 질문했다.
"제가 적당한 사람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양양까지 뱃길을 섞으면 가는 데 보름 정도 걸리고 돌아올 때 열흘 정도 걸리니 한 달 안에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비둘기를 날리면 안 되오?"
"비둘기를 날린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괜히 저쪽에서 경각심을 갖게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사공의 말에 구후영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돈은 얼마 필요하오?"
사공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글 하나 못 깨우친 부족한 놈의 생각이지만, 하오문은 무력과 거리를 둬야 합니다. 그러나 워낙 하찮은 인생들이라 무력마저 없으면 아무나 업신여기고 갈취하려 듭니다. 그러니 낙화문에서 태원부 하오문을 지켜주십시오. 대신 저희는 정보로 낙화문을 돕겠습니다."
구후영은 사부 눈치를 봤다. 책이야 구후영이 많이 읽었지만, 이런 일은 임초현이 훨씬 적격이다.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거냐?"
"어느 마을의 어느 아이가 머리가 똑똑하다거나, 싸움을 잘한다거나. 이러한 소문이 제자를 들일 때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임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과 무림은 영원히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관부의 소식도 영통하니 낙화문에 불리한 얘기가 나오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용호표국과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 동향도 주시하겠습니다."
임초현은 두전과 눈빛으로 교류했다.
"이렇게 하지. 여기 낙화문의 장문제자가 의술도 뛰어나다. 하오문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태원부에 있는 낙화문의 장원으로 보내라. 공짜로 진료하고 약값도 웬만하면 안 받겠다."
임초현의 말에 사공이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부터 세 분을 절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라 생각하겠습니다. 낙화문에 해가 되는 일이 절대 없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하찮은 자들이 억울하지 않게만 보살펴 주십시오."
두전 역시 천한 사냥꾼 집안 출신이어서 하류 인생의 서글픔을 잘 안다. 사냥뿐이 아니라 약초를 캐는 재주도 있어 약관도 전에 부자가 됐지만, 돈이 많다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거나 하진 않았다.
천하게 태어난 자는 평생 천하게 살아야 했다.
두전이 아들을 데리고 봉양부에서 이천삼백 리나 떨어진 태원부로 온 이유다. 여기선 누구도 부자인 두전이 천한 출신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서로 어떻게 도울지는 천천히 상의해서 결정하자. 당장 급한 건 자룡의 행방이니 속히 알아 오거라."
이홍루를 떠난 셋은 고심 끝에 왕가장으로 향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을 너무 크게 벌여서 왕가장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 작가의말
글 올리는 시점 기준으로 선호작이 200이네요. 그저 우연이겠지만,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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