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강호終末江湖
빙설림중저차신氷雪林中著此身
매화는 눈과 얼음이 덮인 숲에 기거하여,
부동도이혼방진不同桃李混芳塵
복숭아나 자두처럼 세속의 티끌이 묻지 않는다네.
홀연일야청향발忽然一夜淸香發
어느 밤 문득 맑은 향을 발하더니,
산작건곤만리춘散作乾坤萬里春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세상의 봄이 되었더라.
버들가지가 물오르기 시작하는 삼월의 어느 날.
백 명이 넘은 스님과 백 명이 넘은 도사가 인적이 드문 황야에서 만났다.
도사들은 검푸른 학창의 밑에 오색의 하피를 입고 머리엔 검은색 양의건을 썼다. 갈색 천으로 짠 끝이 둥그런 신발을 신었고, 절반 정도가 검을, 절반 정도가 판관필을 들었다.
스님들은 하나같이 노란색 무복을 입고 가죽 신발을 신었는데, 몇몇은 전田자 모양의 무늬를 새긴 붉은 가사를 몸에 걸쳤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소림에 계셔야 할 귀한 분들이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신 건가."
선두에 선 도사는 도관을 안 썼고, 옥비녀로 머리를 대충 묶었다.
사대신협이 자취를 감추고 구후영이 은퇴한 뒤, 옥무영의 아성을 흔들 몇 안 되는 고수 중 하나인 무당의 장문제자 허문성이었다.
"어떤 허접한 문파가 무림의 기둥을 자처하면서 강호의 물을 더럽혀서 말이지."
허문성의 말을 받아친 자는 소림 방장 오정의 사제인 오훈이었다. 현재 소림 최고의 고수로 불리는 오훈은 칠십이절기의 다섯을 익혔는데, 예전처럼 숫자만 채우는 게 아닌 역근경과 세수경에 뿌리를 둔 진정한 절기였다.
"약속을 어기고 봉문을 깬 주제에 무림의 기둥을 운운하는 건가?"
소림은 당일 삼십 년 봉문을 선포했었다. 그런데 사대신협이 사라지고 구후영과 원경마저 종적을 감춘 지 십 년이 훌쩍 넘자 슬그머니 봉인을 깨고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이 봉문을 깬 지 삼 년인데.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닌가?"
소림이 봉문을 깰 당시 무당은 침묵했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지켜보면서 소림이 생각한 만큼 강하지 않음을 깨닫고 슬슬 건드린 결과, 오늘의 대규모 충돌까지 오게 되었다.
"소림이 봉문을 깬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지. 그런데 봉문을 깨고 그저 자기 잇속만 챙기는 모습에 분개하여 이제라도 나서게 된 것이오."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싸움 방식을 정하는 게 어떻소?"
더 말해봤자 입이 아프다.
소림이 약속을 어긴 건 사실이고 비난받을 일이긴 하나, 이를 빌미로 무당이 소림을 어떻게 할 순 없다.
마찬가지로 무당이 사사건건 소림의 일을 방해하긴 했으나, 대놓고 한 적은 없었다. 소림 역시 무당을 어떻게 할 명분이 없다.
그럼에도 두 문파가 이렇게 맞서는 건, 화산과 종남의 쇠락과 함께 균형이 완전히 깨진 탓이다.
중원 무림엔 이제 무당과 소림만 남아, 어떻게든 한쪽이 다른 쪽을 눌러야만 충돌이 끝난다.
"검엔 눈이 없지."
오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쉽게 끝낼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상대가 대뜸 생사결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백 명이나 끌고 나온 건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거고, 사실은 다섯 명 정도 고수가 대표로 나가 대결로 우열을 정하는 정도까지 생각했었다.
"몽둥이라고 눈이 달리진 않았소."
그러나 이대로 기세에서 밀릴 수 없단 생각에 차갑게 굳힌 얼굴로 강하게 응수했다.
"보자 하니 백팔나한진을 펼칠 생각으로 나한들을 다 데리고 온 듯한데, 한 번 견식을 할 기회를 주시겠소?"
'백팔나한진의 약점을 알아낸 것인가?'
그간 역근경과 세수경을 해석하며 백팔나한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백팔나한진의 부족점을 찾으려고 꽤 많은 고수를 초빙해 견식하게 했으니 어쩌면 소림도 모르는 약점이 외부로 누출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당에서 새롭게 태극검진을 만들었다 들었는데, 우리가 먼저 견식하는 건 어떻소?"
"정 원하신다며 그러지."
대뜸 생사결을 언급하긴 했으나, 허문성 역시 진짜로 소림과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대결에 앞서 기세에서 어느 정도 이득을 볼 요량이었다.
그렇기에 오훈의 요구에 선뜻 응했다.
"여덟 명이 태극검진을 이룰 것이오. 그쪽도 여덟 명을 내보내시오."
오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립에서 불혹 사이로 보이는 검을 든 고수 여덟이 앞으로 나와 각지 위치에 자리 잡았다.
'쉽지 않겠어.'
하나같이 눈에 정광이 넘치고 자세가 자연스러웠다.
소림은 그간 사마외도에 빠졌다가 다시 정도로 돌아온 지 채 이십 년이 안 되고, 무당은 쭉 장삼풍이 만든 무공을 익혔다.
소림의 낭자회두浪子回頭도 대단하지만, 기존 무공에 태극혜검을 추가한 무당의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당장은 우위다.
오훈이 누굴 내보낼지 고민하던 그때.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변성기가 안 지났는지 무척이나 맑은 소년의 목소리가 황야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소림의 스님과 무당의 도사 모두 얼굴이 변색했다.
현재 천하제일로 불리는 청성파 장문 옥무영의 내공으로도 방금 수준의 음공은 쉽지 않다.
"그 태극검진, 내가 상대하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른 장포를 입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는 오뚝하나 날카롭지 않고 입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여기까지는 그저 심성 착한 소년으로 보이지만, 새벽이 오기 전 가장 어두울 때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샛별을 갖다 박은 듯한 두 눈엔 결코 마모될 수 없는 강인한 의지가 담겼다.
소년은 스님과 도사들이 미처 뭐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태극검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에 소림을 상대하기 위해 기세를 끌어올리던 여덟 도사가 침입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소림의 고수를 상대하려고 미리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던 터라 소년의 침입에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단하구나.'
보통 진법을 이루면 일부가 공격하고 일부가 수비하고 일부는 견제한다.
그러나 태극검진을 이룬 여덟은 각자 오롯이 공격과 수비를 책임지는 동시에 여덟이 함께 어우러져 더욱더 큰 위력을 발현했다.
현재 여덟 자루 검이 모두 공세를 취해 먹이를 끊는 상어의 이빨처럼 소년을 짓씹으려 했다.
'혼자서는 무리야.'
자신이라면 저 공격에 어찌 대처했을지 고민하던 오훈은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혔다.
몇 번 더 경험하면 어찌어찌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최소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잃을 게 확실했다.
'대단하구나.'
허문성은 오훈보다 몇 배는 더 놀랐다.
알고도 막기 힘든 게 태극검진인데, 소년은 허리춤에 매단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앞마당 산책하듯 여유롭게 움직였다.
"태극은 그저 어우러짐이 아니오."
가벼운 걸음으로 태극검진 밖에 나온 소년이 말했다.
"다른 힘끼리 어찌 완벽하게 섞일 수 있겠소. 어우러짐에도 정도가 있고, 정도가 맞는 어우러짐을 우린 태극이라고 하오."
이 자리에 온 모든 도사는 어린 나이부터 무당 장권과 태극권을 익혔다.
덕분에 경지의 높고 낮음과 상관 없이 소년의 말에 경악했다.
벼락처럼 내려친 깨달음에 도사들이 멍한 얼굴로 굳어 있을 때.
"동생, 먼저 가면 어떡해."
또 한 명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가 항아리처럼 실하고 팔다리가 통나무처럼 굵은 소년은 누가 봐도 외공을 익히기 딱 좋은 체형이었다.
"소림에 부탁이 하나 있소."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먼저 도착한 소년과 간단히 대화를 나눈 뒤, 대뜸 오훈을 향해 외쳤다.
"시주는 누구시오?"
"굳이 따지자면 소림의 속가제자요. 번거로운 게 아니라면 백팔나한진을 펼쳐주시겠소?"
잠깐 고민하던 오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고작 소년의 한마디에 소림의 자랑인 백팔나한진을 펼치려 하자 사제들이 반발했다.
"다 생각이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해라."
소림이 왜 봉문했는지를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제들과 달리, 장문의 심복인 오훈은 전후 사정을 세세하게 알았다.
그렇기에 소년의 얼굴에서 뭔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곧, 백팔나한진이 펼쳐졌다.
"십팔나한진이 위력을 잃어 백팔나한진이 되었소."
말을 마친 소년이 백팔나한진에 뛰어들어 나한권을 펼쳤다.
그러나 소림이 아는 나한권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실전된 지 수백 년 된 나한신타였다.
"하나가 여섯이 되었으니 난 그저 가장 약한 여섯을 찾아 가장 약한 하나를 공격하겠소."
소년이 딱 한 명을 잡고 늘어졌다.
결과, 고작 반 각도 안 되어 백팔나한진이 무너졌다.
백팔나한진을 무너뜨린 소년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오훈은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소림의 최고수로 추앙받으며 백팔나한진의 장단점을 속속 아는 자신으로서도 누군가가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백팔나한진을 깰 수 없었다.
그걸 약관도 안 된 어린 소년이 발로 조약돌 걷어차듯이 쉽게 해내자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원경 사숙이 보내셨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던 소년이 오훈의 질문에 얼굴을 굳혔다. 화가 났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신분이 들킨 것에 당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보통 말보다 머리 두 개 높은 푸른 말이 화사하기가 복사꽃 같고 요염하기가 진달래 같고 우아하기가 연꽃 같은 소녀를 태우고 나타났다.
"자. 이제 싸우지 말고 각자 집으로 가세요."
소녀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소저는 누군데 소림과 무당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오?"
멍한 얼굴로 소녀의 용모를 감상하기 급급한 무당 도사들과 달리 소림 스님 중엔 제정신을 똑바로 차린 자가 몇 명 있었다.
"무당은 백팔나한진의 약점을 알았고, 소림은 태극검진의 약점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싸우겠습니까?"
소녀의 질문에 소림과 무당 모두 말문이 막혔다.
무당이 태극검진을 펼치면 소림이 파훼한다. 그러면 무당의 태극검진이 소림에 파훼 당했다고 소문날 것이다.
소림이 백팔나한진을 펼치면 무당이 파훼한다. 이 역시 강호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소림도 무당도 자신의 최강 진법을 펼치지 못하고 그저 싸워야 한다. 이류나 삼류 무인들이 진흙탕 개싸움 벌이듯이.
"그대들은 도대체 누구시오?"
허문성이나 오훈이나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최소 대결을 방해한 자가 누군지 알아야 돌아가도 할 말이 있다.
"아참. 선물을 갖고 왔는데 깜빡했군요."
소녀는 대답 대신 말 안장에 묶은 가방에서 두툼한 책자 두 개를 꺼내 소림과 무당에 하나씩 던졌다.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연공편軟功篇
태극권太極拳 주해注解
소림이 받은 건 태극권 주해였고, 무당이 받은 건 칠십이절기 연공편이었다.
"태극혜검 주해랑 칠십이절기 경공편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남은 선물은 못 받을 겁니다."
말을 마친 소녀가 말을 타고 떠났고, 두 소년 역시 포권으로 작별 인사를 마친 뒤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중원무림의 기둥이 누군지 가리려고 기세등등하게 길을 나섰던 무당과 소림의 고수들이 멍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돌아서서 각자 문파로 돌아갔다.
#
"누굴 닮아 저리 제멋대로인지."
멀리서 바라보던 단아가 혀를 찼다.
"그냥 고분고분 시킨 대로 할 것이지."
"내가 보기엔 더 잘한 것 같소."
소림은 무당의 비급을 얻었고 무당은 소림의 비급을 얻었다.
그저 작은 문파라면 아예 상대를 없애고 다 차지하려 할 테지만, 소림과 무당은 아니다. 어떻게든 비급과 비급을 교환하려 할 것이고, 비급 교환을 협상하는 과정에 분쟁이 되는 지역이나 이권에 관해서도 정리하려 들 것이다.
게다가 태극혜검 주해나 칠십이절기 경공편을 얻기 전까지는 표면적으로나마 사이좋게 지낼 테니, 당분간 강호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너무 딸만 딸이라 하는 게 아닙니까? 저리 제멋대로 굴다간 언젠간 크게 다칠 겁니다."
"부인 역시 너무 아들만 아들이라 하는 거 아니오?"
원래는 두 문파가 당분간 수련에 힘쓰게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딸아이가 제멋대로 비급을 바꿔서 줬다. 단아는 그에 불만이었고, 구후영은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사대신협은 소식이 있습니까?"
더 말해봤자 입밖에 더 아플 게 뻔하기에 단아는 화제를 바꿨다.
"상고의 유적지로 보이는 곳을 몇 개 찾긴 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안으로 들어가도 특별한 게 없었다고 하오."
"그러면 진짜 무공이 사라지고, 이 강호도 사라질까요?"
"그럴 리가."
구후영이 세상을 통달한 현자처럼 눈을 빛냈다.
"사람이 있는 곳엔 반드시 강호가 있소. 고작 무공이 사라진다고 강호가 종말하진 않을 거요."
"그럼 우리 사이에도 강호가 있나요?"
단아가 입을 삐쭉이며 질문했다.
십여 년을 봐 았지만, 눈을 살짝 흘기는 모습에 구후영은 할 말을 잊고 그 끝없는 부드러움에 깊이 또 깊이 침잠했다.
- 작가의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이 끝났네요.
부족한 글솜씨에 괘념치 않고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간 글을 쓰면서 독서를 멀리했습니다.
괜히 다른 글을 따라 할까 봐 걱정되어서였죠.
최근 생각을 바꿨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 자극받아야 뭔가 달라지고 나아질 거 같습니다.
당분간은 독서에 집중할 예정이고, 더 나은 글을 쓸 자신이 생기면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Commen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