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통강호一統江湖
사람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왕중양의 본명은 왕중부다. 장삼풍의 본명은 장팽준이다. 천마는 초무선으로 알려졌지만, 사형을 따라 지은 것으로 본명이 아니다.
양무원도 그랬다.
절정의 독공 고수가 되고부터 사람들은 그를 독 선생으로 불렀고, 어느새 본명을 기억하는 이는 사라졌다.
"나 양무원은."
드디어 꿈에도 바라던 절대의 고수가 된 독 선생은 자기 이름을 되찾고자 했다.
"마교의 교주가 되어 강호를 일통할 것이고."
불가능한 얘기가 절대 아니다. 천마가 처음 교주가 되었을 때 모든 힘을 모았다면 중원의 사대문파를 지우고 중원 무림을 일통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단, 적아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겠지만.
"저 부덕한 명 황실을 뒤엎고 강자가 약자를 통치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 것이다."
본인이 약자였을 적에 양무원 역시 강자의 핍박을 적잖이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부당하게 여기는 약자들과 달리, 양무원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부분 약자가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강자의 핍박을 받지 않는 거라면, 양무원은 강자가 되어 약자를 핍박하는 게 꿈이었다.
"개소리."
소림과 무당의 고수들이 협공을 재개했다.
그러나 양무원의 몸은 금강불괴란 말이 어울렸고, 묵혈장의 위력 역시 어마어마했다.
십수 명의 고수가 채 반 각도 못 버티고 물러났고, 다른 고수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천마보다 더 강한 거 같은데?"
양무원을 쫓는 수많은 사람이 남긴 흔적 덕분에 구후영 일행은 길을 전혀 헷갈리지 않았다. 덕분에 채 반나절도 안 되는 차이로 도착했으나 이미 이백 명이 넘은 절정의 고수가 양무원의 묵혈장에 유명을 달리한 뒤였다.
"일류의 경지로는 여기까지 오기 힘든 게 다행이지. 아니면 수천 명이 죽었을 거야."
원경이 입으로 검은 피를 토한 채 죽어버린 주검들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천마보다 강하진 않습니다."
구후영 역시 죽은 자들이 가엽긴 하나 원경과 달리 불쌍히 여기진 않았다.
죽은 자들은 절정 이상의 고수로 강호에서 자기 목숨 하나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위치다.
"천마는 상대가 위종이어서 강함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장법 조예가 천마보다 깊은 거 같은데?"
"상대가 위종이니까요. 환허밀공을 깨려면 변화가 아주 절묘하거나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야 합니다. 천마는 후자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결론을 내렸다.
"천마의 팔 할 정도로 강하다고 보면 됩니다. 사대신협으로 치면 풍불지 대협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입니다."
"사부가 저리 강하다고?"
옥무영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는 사이, 양무원을 협공하던 고수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추가한 채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 나서는 고수가 없었다.
반나절 동안 차륜전을 펼친 결과, 혼자인 양무원은 여전히 쌩쌩한데 천 명에 가까운 고수가 오히려 지쳐버렸다.
"마교는 북방을 통치할 거다."
덤비는 자가 사라지자 양무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쪽은 무당이 관리하고, 동쪽은 소림이 관리하고. 남쪽은 자유의 땅으로 하지."
혼자 강하다고 세상을 통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을 통치하려면 커다란 이익을 수많은 사람한테 나눠줘야 한다.
양무원은 그저 무식하게 무공만 익힌 무인이 아니라 글공부도 열심히 했다. 게다가 마교에서 지내며 깨달은 것도 있어 그저 힘을 믿고 독불장군이 되는 대신 강호의 무리를 회유하려 했다.
"일반 백성은 달라지는 게 없다. 그저 통치계급이 무인으로 바뀔 뿐이지."
위 태감을 위수로 한 황실 소속들이 이를 갈았다. 문제는 양무원의 말이 꽤 그럴듯해 어설픈 반박은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했다.
"선비가 과거를 보아 관리가 되듯이, 무과를 확대해 무인들을 관리로 만들겠다. 무식해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그럼 선비를 책사로 두면 그만이다. 무인을 우대하면 산적이나 수적이 사라질 것이고, 외적이 함부로 넘볼 수 없을 것이고, 천하가 지금보다 훨씬 태평할 것이다."
'멍청한 생각.'
송나라 시절만 해도 산에 범이나 곰 같은 맹수가 넘쳐났다.
지금은 어떤가?
인간이 많이 사는 지역엔 맹수가 사라진 지 오래다.
무인이, 그리고 강호가 이렇게 생존할 수 있는 건 일반인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와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
일반인을 죽인 자는 힘을 모아 제거한다.
여인을 겁탈한 자는 즉참해도 죄를 묻지 않는다.
이 외에도 수많은 규칙이 있다. 이는 얼핏 일반 백성을 보호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무인을 지키기 위함이다.
인간은 사회를 이뤘고, 인간사회에 해를 끼치는 모든 걸 본능적으로 제거한다.
무인이 맹수와 같은 위협이 된다면 사람들은 무인을 제거할 것이다.
독, 암기, 함정, 미인계.
천마 수준의 고수가 아닌 이상 상술한 수단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사람은 없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밀림에서 맹수의 적은 맹수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과 접점이 생기는 순간, 모든 맹수는 사냥당할 위험이 있다.
강호는 밀림이다. 무림인과 일반인 사이에 선 하나 그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무림인의 칼에서 일반인을 지키고 일반인의 화살에서 무림인을 지킨다.
"단숨에 제압해야 합니다."
구후영은 양무원의 개소리를 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제가 고한검苦寒劍으로 저자를 쓰러뜨리고 몸통을 제압하겠습니다."
보검봉종마려출寶劍鋒從磨礪出
보검의 날은 갈아서 더욱 예리하고,
매화향자고한내梅花香自苦寒來
매화는 고한을 겪어 더욱 향기롭다.
고한검은 효율이나 합리성 따위를 모두 버리고 그저 위력만 추구하는 무식한 초식이다.
"내가 두 다리를 맡지."
원경이 말했다.
"난 왼팔."
보통은 오른팔이 더 힘이 세지만, 무인은 별 차이가 없다.
더구나 구후영이 노리는 게 양무원의 심장이기에 더 강한 옥무영이 왼팔을 제압하는 게 합리하다.
"그럼 난 오른팔을 맡으마."
청빈이 담담하게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들보다 부족한 실력에 속앓이했던 청빈이건만, 최근 태극권의 경지가 급격히 상승한 후 평상심을 이뤘다.
"세 호흡 안으로 끝내야 합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사라졌다. 그에 옥무영과 청빈이 경공을 펼쳐 양무원 쪽으로 달렸다.
검본천지기劍本天之器
검은 본디 하늘을 기리는 물건이라,
일명위창생一鳴爲蒼生
창생을 위해 울음을 토하노라.
구후영의 고한검에는 쏟아지는 폭포를 멈추게 할 정도의 거력이 실렸다. 아마 전대모검이 아닌 다른 검이라면 벌써 가루가 되어 초식을 온전히 펼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무원의 몸뚱이를 부수지 못하고 그저 쓰러뜨리는 데 그쳤다.
폐목자불閉目慈佛
눈을 감으면 자비로운 부처요,
노목금강怒目金剛
눈을 뜨면 분노한 금강이라.
양 눈을 부릅뜬 원경이 쓰러진 양무원의 두 다리를 눌렀다.
심부동心不動 일체정一切靜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게 멈춤이라.
원경이 부동심으로 부동신을 이뤘다.
음약양陰若陽 양즉음陽卽陰
음을 양이라고 하면 양이 음이 되노라.
한 쌍의 반절도를 든 옥무영이 양무원의 왼팔을 제압했다.
양이 음이 되고 음이 양이 되나 끝내 태극을 이루지 못한 양무원의 두 자루 칼은 양의검법의 오의를 오롯이 따르고 있었다.
세유양어世有兩魚
세상에 두 마리 물고기가 있어,
일음일양一陰一陽
하나는 음이고 하나는 양이니라.
경공이 느린 탓에 가장 늦게 도착한 청빈이 태극권으로 양무원의 오른팔을 제압했다.
검은 몸에 흰 눈을 한 음어와 흰 몸에 검은 눈을 한 양어가 나타나 서로 꼬리를 물었다. 꼬리를 문 음양어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얼마 안 지나 태극을 이뤘다.
그때.
금강신金剛身 연화신連花神
몸은 금강이요 정신은 연꽃이라.
삼십육 경공의 금강인과 삼십육 연공의 연화인을 모두 이룬 원경이 끝내 대일여래인을 성취해냈다.
태산과 같은 힘에 양무원의 발버둥이 훨씬 줄어들었다.
구후영이 말한 세 호흡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양무원은 완벽하게 제압당했다.
원경은 대일여래인의 힘으로, 옥무영은 양의검법과 심후한 내공으로, 청빈은 태극권의 오묘함으로.
혼자서 두 다리를 제압한 원경의 공이 가장 크긴 하나 팔 하나씩 맡은 옥무영과 청빈의 공헌도 작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둘을 대신해 양무원의 팔을 제압할 순 없다.
'작별할 시간이구나.'
속으로 전대모검에 작별 인사를 마친 구후영은 어떠한 초식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강한 힘과 검의 단단함으로 양무원의 심장을 공략했다.
팔과 다리를 모두 제압당한 양무원 역시 그저 몸으로 버틸 뿐이었다.
적수천석滴水穿石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양무원의 금강불괴를 이룬 몸이나 상고의 물건으로 추정하는 귀검으로 만든 전대모검이나 매한가지로 단단하다.
그러나 전대모검은 지속하여 힘을 가하는 구후영이 있고, 양무원은 아니었다.
구후영의 검이 끝내는 양무원의 질긴 살과 근육을 뚫고 철보다 굳센 가슴뼈를 박살 냈다.
"컥!"
양무원의 입에서 뼈와 폐 조각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부서진 뼈와 잘린 폐가 자동으로 수복되며 전대모검의 검신을 꽉 잡으려 했다.
하지만.
전대모검은 어느새 꿈틀거리는 강철의 뱀이 되어 자기 힘으로 양무원의 심장을 찾아갔다.
"억!"
귀검에 담긴 힘이 양무원의 심장을 녹였다.
그러나.
"으흐흐."
심장이 녹아 사라지는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 양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기억난다."
백 명이 넘은 일꾼을 독으로 죽일 때 구후영을 본 적이 있다.
당시 구후영은 천하게 살아 손발이 부르트고 눈에 생기가 별로 없는 대부분 사람과 달랐다.
그러나 곧 죽을 놈이란 생각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 탓에 지하도시에서 놈의 계책에 당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었다.
하늘의 보살핌이랄까.
양무원은 독공을 익힌 덕분에 기운을 몸에 쌓는 데 능숙했다. 비록 마지막에 기운을 배출하느라 애쓰긴 했으나 대부분이 몸에 남았고, 일부는 양무원의 심장에 쌓였다.
그 덕분에 몇 년이 지난 지금 온전히 '부활'할 수 있었고, 천마도 가소롭게 보일 막대한 힘을 얻었다.
"지금 생각하니 너는 하늘이 내게 내린 첫 시련이다."
'죽음'에서 '부활' 사이엔 아무런 기억도 없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이곳에 와서 자기 손으로 심장을 파서 본체에 넣은 이후에야 기억이 생겼다.
그렇기에 양무원 입장에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구후영이 고작 반나절 만에 나타나 자신을 한 번 더 죽이려 하는 셈이다.
"마지막 시련이기도 하고."
"혀가 길구나."
구후영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양무원은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 네 검이 내 힘을 소모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지. 마찬가지로 네 검도 소모되고 있다."
구후영의 얼굴에 담담함 대신 경악이 서리자 양무원은 속이 무척이나 후련해졌다.
"귀검! 귀검이 있는 사람 없소?"
깨지 못한 자들은 굳이 귀검도 필요치 않았다.
소생자들은 귀검 한 자루가 소모됐다.
문제는 양무원의 몸에 고작 한 명의 '힘'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천마가 죽기 전까지 얼마만큼의 '힘'이 전달됐는지 모르기에 구후영은 최대한 많은 귀검이 필요했다.
- 작가의말
무협은 어서 기존 설정을 탈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협이란 장르가 독자한테 어필할 만한 장점들은 이미 대부분 소비되었습니다.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 소비할 거리를 늘려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미 그 시기가 지났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설정으로 가면 ‘이게 무협이냐’ 소리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선협 요소를 섞고 귀신이나 요괴 같은 ‘종족’을 추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일단은 시도해 보고, 아니면 그때 다시 고민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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