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대협靑龍大俠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말이 있다.
뭔가 애타게 기다릴 땐 하루가 삼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반대로 삼추여일일三秋如一日일 때도 있다.
구후영이 그랬다. 할 게 너무 많아 삼 년이란 시간이 하루처럼 순식간에 훅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루 같은 삼 년이 흐른 지금, 구후영에게도 드디어 삼 년 같은 하루가 다가왔다.
깊은 산속 허름한 장원의 별채.
"맹주를 뵈오."
구후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십수 명의 사람이 분분히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자리에 앉으시오."
사람들은 구후영이 상석에 앉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다시 착석했다.
"급히 여러분을 소환한 건 드디어 몸통을 잡아서요."
구후영의 말에 자리한 대부분 사람이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그간 잘린 꼬리만 줍다가 끝내 몸통을 잡았군요. 경하드립니다. 그런데 몸통을 잡았다는 건 아직 대가리는 찾지 못했단 뜻이겠죠?"
현월궁을 대표해 온 막내 궁주가 말했다.
나이가 서른이 조금 넘은 이 궁주는 누구보다 구후영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단아와 마찬가지로 칠살문에 친인을 잃은 아픈 기억이 있던 탓이었다.
"기습해서 칠살문의 기밀문서를 확보하면 대가리 찾는 것도 금방일 거요."
칠살문은 점조직이다.
꼬리가 밟혔을 때 해당 꼬리만 잘라버리면 몸통은 물론이고 다른 꼬리도 무사하다.
그러나 몸통은 다르다. 몸통은 모든 꼬리와 연결됐을 뿐만 아니라 대가리와도 이어졌다.
몸통을 따라 대가리를 잡으면 곧 다른 몸통을 발견할 거고, 그 몸통에 붙은 꼬리와 또 다른 대가리를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몸통과 대가리를 오가며 훑다 보면 어느 순간 칠살문을 궤멸할 수 있는데, 처음으로 찾아낸 몸통이 매우 커서 구후영은 아주 흡족한 기분이었다.
"이번엔 원흉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거요?"
입을 연 건 청성파를 대표해 온 막불손이었다. 인두로 지진 이마와 얼굴 때문에 더없이 흉측한 모습이지만, 기도는 오히려 삼 년 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정갈했다.
"확실하오. 둘이 한편이 아니더라도 칠살문에 원흉에 관한 기록이 반드시 있소."
구후영이 딱 잘라 말하자 막불손도 더 캐묻지 않았다.
"맹주께서 원한다면 봉문을 풀겠소."
소림 대표로 온 원융이 말했다. 아직 마흔이 안 된 젊은 스님으로, 무공은 대단치 않으나 성격이 꼼꼼하면서도 과감함을 잃지 않아 구후영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굳이 안 그래도 되오. 우리 무당이 속가까지 모두 동원할 생각이오."
소림의 봉문으로 가장 이득을 본 건 무당이다. 비록 소림이 역근경과 세수경을 되찾아 훨씬 큰 위세를 떨칠 거로 예상되지만, 그건 봉문을 풀고서야 확인할 일이다.
당장은 태극혜검이 소림 칠십이절기를 이긴 모양새라 무당의 명성이 강호를 떨치고 있고, 무당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그렇기에 무당을 대표하여 온 현운자는 원융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칠살문의 장점은 은밀하다는 거요. 대신 몸통이나 대가리를 쳤을 때 바로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소."
점조직의 한계는 몸통을 쳤을 때 대가리나 꼬리들이 바로 반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후영은 소수 정예로 몸통과 대가리만 잽싸게 때리고 꼬리는 천천히 처리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몸통을 치는 건 우리만 움직이는 거요?"
개봉 청의방 방주가 질문했다.
자신들만이 개방 정통이라고 주장하나 사실상 강호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던 청의방은 무림수호맹武林守護盟에 들어오라는 구후영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사실은 구후영이 청의방과 칠살문이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의심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이 자리에 앉은 분들만 움직여도 칠살문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소?"
구후영의 말에 청의방 방주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벼룩이 뛰어봤자지. 맹주께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말고 그저 우리한테 맡기시오."
청의방 방주의 허세에 다들 피식 웃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같은 생각이오. 이번 일은 여러분께 맡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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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대협이다!"
청총을 타고 나타난 구후영의 모습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강호에 누군가가 갑자기 유명해지면 약삭빠른 자들이 그 사람 행세하면서 사기를 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청룡대협은 누구도 사칭하지 못하는 것이, 그냥 말보다 배는 큰 청총을 고삐도 없이 안장만 얹은 채 타고 다녔다.
이런 청룡대협을 사칭하려면 청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혈총 정도의 덩치가 되는 말이 있어야 하고, 털을 파랗게 칠해야 한다. 게다가 그 큰 말을 고삐도 없이 안장만 씌운 채 타고 달려야 하니, 사기꾼으로선 더러워서 사기 안 치고 마는 게 답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청룡대협의 모습에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다가갔다.
"근처에 산적이 있다고 들어서 왔소."
허공에 울린 목소리에 일부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청룡대협의 소문을 들어서 익히 아는 자들은 오히려 환호했다.
"맞습니다. 저기 적운산에 산적이 새로 들었는데 최근 사건을 여럿 저질렀습니다."
제대로 된 산적이 산에 자리 잡을 땐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주변 마을과 도시마다 세작을 몇 명씩 꽂아 넣고 소식을 전하는 방법부터 만들고 유사시 도주로를 확보하는 걸 우선한다.
그렇게 사전 작업이 끝난 다음에야 약탈을 시작하는데, 무작정 빼앗고 죽이는 게 아니라 어느 마을에서 무엇을 얼마나 약탈할지 정하고 움직인다.
일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관아에 줄을 대고 정기적으로 상납하기도 한다.
적운산에 새로 생긴 산적들은 반년 동안 조용히 지내며 '제대로 된 산적'의 모습을 보였으나, 최근 갑자기 사건을 여럿 저질러 이목을 끌었다.
"알려줘서 고맙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총이 먼지구름을 피우며 적운산으로 달렸다. 그 모습에 일부는 엎드려 절을 올렸고, 대부분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산적이 사라졌으니 이제부터 우리도 약초를 캐고 사냥할 수 있겠군."
"그렇지. 중원에 산적이 한둘이 아닐 텐데 마침 가을이 되기 전에 청룡대협이 와주셨어."
"이제 적운산 산적 놈들은 다 죽은 거야."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적운산의 산적은 구후영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다 죽었다.
"고생했다."
말에서 내린 구후영이 청총의 목에 고삐를 맸다. 보통 말을 탈 때 고삐를 하고 아닐 때는 편하게 풀어주는 게 일반적인데, 구후영은 반대였다.
"장문 사형만큼은 아닙니다."
낙화문 제자들을 이끌어 산적을 토벌한 자는 다름 아닌 화산 검종의 제자였던 유종근이었다.
그날 작별한 다음 유종근은 강호에 널린 낙화검법을 전수한 자들을 끌어모아 낙화검맹을 만든 다음, 제멋대로 낙화문을 맹주로 추대했다.
작은 무관을 열고 동네 아이들에게 열 개도 안 되는 낙화검법 초식을 전수하던 자들이 강호를 진동하는 낙화문 장문 중원검룡 구후영의 소문과 낙화검맹의 소문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저 핏줄에 따라 낙화검법 초식을 전수하며 강호와 무관한 삶을 살던 자들도 흥분하여 움직였다.
유종근의 밑으로 모인 자 중에 낙화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도 꽤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초식이 낙화검법에서 나왔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유종근은 그러한 자들까지 모두 품어 수백 명 규모의 검맹을 만든 다음 낙화문을 찾아갔다.
임초현은 갑자기 방문한 유종근의 의도를 의심했지만, 소식을 들은 구후영은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낙화문이 아닌 낙화표국을 만들어 유종근이 표국주를 맡도록 했다.
낙화표국은 유종근의 뛰어난 수완과 중심을 잡는 화산파 출신 고수들 덕분에 금세 산서 지역에 명성을 떨쳤다.
"이사제가 직접 온 걸 보면 표국 일은 안 바쁜 모양이지?"
임초현은 유종근을 비롯한 화산 출신을 제자로 받고 사형제 서열을 새로 정했는데, 장문인 구후영이 대제자이고 유종근을 비롯한 화산 제자들이 그다음 서열을 쭉 차지했다.
"장문 사형 덕분에 모든 게 순조롭습니다."
낙화표국을 만들기로 한 다음 구후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용호표국을 방문한 것이었는데, 며칠 뒤 용호표국은 장원을 처분하고 강서로 이사 갔다.
마침 응담鷹潭에 용호산이 있어 용호표국의 이름에 부합하기에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한때 태원부에 파다하게 퍼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건주 부족과의 거래를 독점하게 되었고, 관동으로 표행을 다니는 내내 초원의 어떤 부족도 낙화표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유종근이 하는 일은 장부를 정리하고 관리들한테 뇌물 뿌리는 것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경 총관한테 떠넘기면서 온전히 낙화문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부탁한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종종 보던 모습이라 유종근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그저 청총 앞의 구유에 싱싱한 풀과 맑고 깨끗한 물을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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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후영이 청룡대협인 건 비밀이다. 무림수호맹에 속한 자들이 알고 강호에도 청룡대협이 구후영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지만, 어쨌든 비밀이다.
중원검룡으로 명성을 떨친 구후영과 달리 청룡대협은 장법을 쓰기에 둘이 다른 사람이란 판단이 지배적이었고, 무림수호맹에 속한 자들은 입이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소림과 무당과 종남 모두를 손아귀에 쥐고 논 배후라면 구후영이 청룡대협임을 모를 리 없다.
그간 몇 번이나 성공 직전에 고배를 마신 구후영이기에 굳이 청총을 타고 자백산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내 적을 속이려 했던 것이고.
당연히 구후영이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가 끝나 주검을 정리하고 있었다.
펑, 펑.
몰래 숨어서 기회를 노리던 칠살문 자객 둘이 구후영의 장법에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다.
"알고도 놔둔 거요? 아니면 몰랐던 거요?"
구후영의 핀잔에 막불손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몰랐소."
이 자리에 무당의 현운자와 현월궁 궁주도 있지만, 최고수는 이견 없이 막불손이다. 그런 막불손이 몰랐다는 건 원융이나 청의방 방주처럼 애매하게 강한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있었다는 뜻이다.
구후영은 그게 약간 마음에 안 들었다.
"최소한 싸울 때만큼은 잡념이 없어야 하오."
구후영의 충고에 막불손이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구후영이 자기보다 고수인 건 맞지만, 나이나 배분을 생각하면 약간은 주제가 넘었다.
"신검께서 내게 해준 말이오. 최소한 검을 잡았을 때만큼은 무애여야 한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불만이 깨끗이 사라졌다.
"맹주의 호의에 감사드리오."
나이나 배분이 존중받는 건 먼저 그리고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가 어리더라도 먼저 경험했다면 선배로 여김이 마땅하다.
"막불위 대협의 죽음은 헛되고 값싸지 않았소. 그러니 그걸 나쁘게 담아두지 마시오. 그건 막불위 대협을 모독하는 것이오."
예전이었다면 구후영은 막불손에게 이런 충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림수호맹을 만들고 소림과 무당을 끌어들인 순간부터 구후영은 달라지기로 했고, 실제로 달라졌다.
"최소한 원흉을 찾아내 벌하기 전까진 마음을 잘 다스리시오."
- 작가의말
일일연재를 하다가 마지막에 몰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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