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불구旣往不咎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왜냐면, 미친개이기 때문이다.
그냥 개는 음식으로 길들일 수 있는데, 미친개는 그렇지 않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미친놈은 말이 안 통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람은 미치지만 않으면 대체로 말이 통한다는 뜻이다.
"누구냐!"
양양을 포함한 호북의 절반 정도 지역의 주둔군을 책임진 총병總兵은 열린 창문으로 '날아서' 들어온 청년을 향해 호통쳤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목소리가 훨씬 작았는지 수하들이 달려오거나 하진 않았다.
"홍엽산장의 구후영이라고 하오."
총병은 홍엽산장이란 익숙한 이름에 긴장이 조금 풀렸으나.
"양왕 전하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왔소."
양왕이 언급되자 다시 목과 턱에 힘이 들어갔다.
"서신이오."
할 말을 마친 구후영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총병에게 펼쳐 보였다.
기왕불구.
이미 지난 일이니 굳이 허물을 캐지 않겠다.
하불위례下不爲例.
다음엔 용서 없다.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꼭 양왕 전하께 전해주시오."
양왕은 조정은 물론 양양 지역에서도 별다른 세력이 없다. 그러나 황실 혈통은 모든 힘보다 위에 놓인다.
만에 하나 양왕이 황제한테 양양 지역에서 역모의 조짐이 보인다고 편지를 쓰기라도 하면 곧바로 금의위가 오고, 서신에 이름이 적힌 자 모두 철저한 조사를 받는다.
전혀 없던 일이어도 무사히 풀려날 가능성이 절반도 안 되고, 무죄를 입증해 풀려나도 더 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다.
이번엔 실제로 뭔가 꾸민 게 있기에 협박이 훨씬 잘 먹혔다.
"거기까진 내 알 바가 아니고."
구후영의 말에 이를 갈던 총병은, 갑자기 타오르는 서신에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강호의 무도한 자들이 내공으로 온갖 기괴한 재주를 벌인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손으로 불내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뭔가 수작을 부렸을 거야.'
그러나.
누군가가 밖에서 줄로 당기기라도 한 듯이 창문으로 쭉 빨려 나가는 구후영의 모습에 총병도 의심을 접었다.
더구나 밖으로 나간 구후영이 허공을 밟으며 쭉쭉 달리자 총병은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여봐라."
볼에서 강한 통증을 느낀 총병이 목청을 크게 키워 수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총병은 굼벵이처럼 느리게 도착한 수하한테 짜증이 잔뜩 치밀었지만, 꾸중하기엔 궁금이 너무 컸다.
"혹시 방금 누군가가 허공을 밟고 지나는 걸 보았느냐?"
"네. 다들 피곤하여 헛것을 본 게 아닌지 의논이 분분합니다."
"그래. 가서 대필 선생을 부르거라."
대필 선생을 부른 총병은 오랜 기간 고생하던 고질 때문에 더는 총병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워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련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작성했다.
#
톡, 톡, 톡.
단아가 던진 먹으로 시커멓게 칠한 나무토막을 밟으며 '허공답보'의 절세 신법을 선보이던 구후영은 장원을 벗어나자마자 추락하여 바닥을 뒹굴었다.
비록 진정한 허공답보를 펼친 건 아니지만, 작은 나무를 밟고 허공을 달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군요."
장원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의지로 버텼으나, 긴장이 풀리자마자 운기가 끊기며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 구후영을 단아가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끄럽습니다."
단아가 나무토막을 던지는 솜씨는 괄목상대할 정도로 나아지는데, 구후영은 처음 성공하고부터 줄곧 같은 모습이었다.
"이거 꽤 재밌었는데, 오늘로 끝이네요."
단아가 아쉬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며칠 사이 구후영과 단아는 양양과 양양 주변을 돌며 이번 일에 참여한 자들을 일일이 방문해 협박했다.
평소라면 양왕이나 홍엽산장이나 힘이 없어 협박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겠지만, 역모를 꾸며 뒤집어씌우려 한 일이 있고 구후영이 보인 놀라운 재주도 있어 호광총독湖廣總督(호북·호남·귀주 지역의 군사 총책임자로 정이품의 고관) 앞에 병이나 나이를 핑계로 자리를 내놓는다는 비슷한 내용의 사직서가 수북이 쌓였다.
"소문이 안 날 리 없으니 우리가 놓친 자들도 알아서 자중하겠지요?"
"배후도 자중할 겁니다. 구후 공자가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하여 동수를 이뤘다는 소문이 호북 지역에 빠르게 퍼지고 있으니까요."
"놈들이 진짜 손을 뗄까요?"
"이번 음모에 홍엽산장은 원래 없었습니다. 동엽이 다른 꿍꿍이로 청첩을 보낸 것이지요."
"홍엽산장을 공격한 일은 마근의 단독 소행이었고요."
구궁산장의 일이 계획대로 풀리면 당주와 단주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근이 철혈방주가 되어 금검당과 은도당의 거대한 사업체를 모조리 삼킬 수 있다.
그에 마근은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큰 홍엽산장을 제거하려 했다.
홍엽산장이 철혈대회의 초대장을 받은 사실을 몰랐던 마근은 칠십 명의 수하에 칠살문의 자객까지 보내 연무쌍과 장선을 상대하려 했고, 돈으로 고용한 이백 명 규모의 무리는 은마단이 벌인 짓을 뒤집어씌우려는 목적이었다.
마근이 지부대인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조언한 것도, 자신이 몰래 꾸민 짓이 너무 빨리 배후에 들킬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놈들이 화나서 우릴 공격할 가능성은요?"
단아의 설득에 넘어가 일을 벌이긴 했지만, 구후영은 여전히 걱정이 남았다.
"역모죄를 꾸며 양왕한테 덮어씌우려 했던 자들입니다. 굳이 주판을 안 튕겨도 홍엽산장과 적대하는 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구분할 겁니다. 만약 그런 계산도 안 되는 허술한 조직이라면 저희가 전전긍긍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놈들이 뭔가 하기 전에 찾아내서 다 죽일 거니깐요."
'그래. 강호에선 강호의 법을 따르기로 했잖아. 누가 봐도 최선의 해결책인데 내 일이라고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구후영은 그간 큰 도움을 준 단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보통 미안하면 선물로 마음을 표현하는데, 구후 공자는 늘 말뿐이군요."
"어떤 선물을 준비할까요?"
"그걸 당사자한테 물으면 어쩌라는 거예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단아가 경공을 펼쳐 훌쩍 떠나자 구후영이 황급히 뒤를 쫓았다.
"단 소저. 천천히 달려요. 돌아가는 길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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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의 야장이 여기 산다고요?"
구후영은 칠십이 개의 귀검을 전부 녹여 없애려 했으나, 철추당의 화덕은 화력이 부족했다. 그에 장선이 철추당 소속의 천하제일의 야장이 있다며 구후영을 끌고 왔다.
그러나 지붕도 제대로 없는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초라한 집에 구후영은 의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성질이 고약해서 그래. 당주인 나를 봐도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어."
"나 귀 안 먹었다!"
그냥 판자를 기대 놓은 것 같은 쪽문이 벌컥 열리며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추운 일월의 날씨에도 홑옷을 입었는데, 해지고 찢긴 옷 사이로 단단한 구릿빛 몸이 보였다.
"왕 형. 내가 왕 형 생각이 나서 술이랑 고기를 들고 왔소."
"꼭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내 생각이 나지. 근데 알지? 내가 다신 불을 가까이 안 하기로 한 걸."
"그럼."
왕 야장은 어린 손주가 화덕 가까이에서 놀다가 큰 화상을 입었다. 그 일로 마누라와 아들 일가가 왕 야장과 의절했다.
왕 야장은 가족이 떠났음에도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어떻게든 버티려 했으나, 얼마 못 가서 다시는 불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고 날을 갈고 광을 내는 등 도제들이나 하는 일로 입에 근근이 풀칠하며 어렵게 지냈다.
"그래서 내가 삶은 고기를 들고 왔잖소."
"안 그래도 생고기가 비려서 입맛이 없었는데 잘됐군."
왕 야장은 제대로 된 음식이 오랜만인지 손님인 구후영이 누군지도 묻지 않고 손으로 연신 고기를 집어 먹었다.
"어허. 체하겠소. 술도 좀 마시시우."
장선의 권유에 술까지 마신 왕 야장은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달았고, 눈도 기분 좋게 풀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장선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여긴 홍엽산장의 장주 구후영이오. 현재 철혈방 방주 직도 맡고 있지."
"나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소릴 할 거면 얼른 가."
"그게 아니고, 사실 부탁할 일이 있소."
"그게 아니면 나 같은 쓸모없는 놈한테 부탁할 일이 뭐 있지?"
"우리가 꼭 없애야 할 물건이 있는데, 웬만한 화덕으론 녹지 않고, 아무리 내리쳐도 부러지지 않소."
심지어 구후영의 천공교검도 귀검에 흠 하나 내지 못했다.
"세상에 그런 물건이 몇 개 없는데."
흐릿하던 눈에 정기가 깃드는 게, 왕 야장도 꽤 흥미가 생긴 듯한 모습이었다.
"이걸 부러뜨리려고 하오. 녹여 없애면 제일 좋고."
구후영이 귀검 하나를 꺼내 왕 야장에게 보여줬다.
"그래. 이놈이었구나."
"이 물건을 아시오?"
"알다마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는데, 야장들은 이 물건을 귀철鬼鐵이라고 부른다."
"귀철이요?"
"그래. 아무리 두드려도 부러지지 않고, 아무리 센 불에도 녹지 않는 특별한 놈이지."
"그럼 이걸 파괴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날 빼고 없지."
왕 야장의 말에 구후영이 반색했다.
"그럼 이걸 다 없애줄 수 있소?"
"다?"
"총 칠십이 개가 있소."
"허허."
왕 야장이 몇 가닥 없는 수염을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왕 형. 구후 장주는 마음이 어질고 학문이 깊은 선비요. 이 흉측한 물건을 없애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제발 도와주시오."
"귀철은 센 불이 아니라 약한 불을 이용해야 한다."
"약한 불?"
"약한 불로 사흘 정도 달군 다음, 원하는 모양으로 두드려 바꿀 수 있다.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나 정도 수준의 야장이 며칠 고생해야지."
총 칠십이 개니 약 이 년이 걸린다는 말이다. 그것도 왕 야장이 하루도 안 쉰다는 전제하에.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없소? 이 물건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오. 지금 같은 시기에 괜히 세상에 흘러나가면 몰라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을 거요."
"있긴 있지."
"무슨 방법이오?"
"네 목적은 이것들이 현재 모습이 아니길 바라는 거잖아. 그럼 같이 달궈서 하나로 합치면 그만이지."
"두드려도 부러지지 않는 금속을 합친다는 말이오?"
"제길. 내 말을 안 믿어?"
왕 야장이 갑자기 화냈다.
"왕 형. 잘 얘기하다가 왜 그러는 거요."
"내 말을 안 믿잖아. 마누라도 아들도 내 말을 안 믿어. 손주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고. 내가 미쳤다고 아이를 화덕이 있는 곳까지 데려오게?"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소. 왕 형이 불을 가까이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데, 방법이 궁금해서 자세히 묻는 거잖소."
"왜 너희가 직접 해? 불에 사흘 달군 다음 내 앞에 갖다 놓으면 되잖아."
'이 사람은 귀철을 만지고 싶은 거다.'
안문도의 명인도 천공교검을 보고 다른 일을 다 팽개치려 했었다. 왕 야장 역시 일을 놓은 지 오래나 열정이 완전히 식은 건 아니었다.
"그럼 저쯤에 화덕 하나 만들어도 괜찮겠소?"
"저긴 내 땅도 아닌데 내가 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나."
말을 마친 왕 야장이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집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뒤적거리며 자신의 망치를 찾았다.
- 작가의말
주인공의 언행은 글쟁이와 아무런 유사성도 없습니다. 글쟁이는 지독한 바람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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