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개태三陽開泰
주역에서 태泰는 삼양三陽이 밑에 위치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며 음이 움츠리고 양이 기지개를 켜는 길한 점괘다.
부否는 반대로 삼음三陰이 밑에 위치해 혼란이 생기고 소통이 막히며 주인이 움츠리고 객이 득세하는 불길한 점괘다.
구후영은 청첩을 위조해 연회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영문도 모르고 상석에 앉은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혈포규찰대에서 자룡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라면 절대 안 할 짓을 했다.
구후영이 쌓은 일음一陰이다.
구후영은 화산이 딴지를 걸자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경솔하게 낙화문과 화산의 특별한 관계를 내세워 해결하는 거로 배산한테 잘 보이려 했다. 이는 자룡을 데려가려는 마음이 간절한 것도 있지만, 상석의 대단한 인물들 때문에 위축되어 마음가짐이 평소와 다른 탓이 컸다.
비록 운 좋게 대결에서 이겨 잘 해결했으나, 이는 구후영이 쌓은 이음二陰이다.
전중광을 이긴 구후영은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여겼으나, 배산의 반대편에 선 자들은 마교든 중원의 문파든 막론하고 구후영을 돌파구로 삼아 분란을 일으키려 했다. 육엽당은 다행히 배산이 막아줬으나 무당까지 그러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든 대결을 피했어야 할 구후영이 용천의 전음에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고 무당의 비무 요청에 섣불리 응했다. 무당이 구후영을 단지 배산을 끌어들이는 발판으로만 생각하고 진짜로 대결할 생각이 애초에 없던 건 제치고, 설사 대결하더라도 구후영은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며 무당의 핍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명분을 만들었어야 했다.
이는 구후영이 쌓은 삼음三陰이다.
그 탓에 구후영은 몸도 내공도 현현자의 뜻대로 움직이며 차라리 꼭두각시가 부러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극태래否極泰來(불운이 극에 달하면 행운이 온다)라고, 본래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이어야 할 구후영에게 삼양이 생겼다.
마교가 망하길 바라는 건 화산이나 무당이나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아직도 종남 아래로 평가받는 화산보다 철혈방 위로 간 무당이 덜 간절할 수밖에 없다.
화산은 여차하면 피를 봐서라도 분란을 키울 생각이지만, 무당은 그래도 선을 지키려 했다.
이게 구후영이 얻은 일양一陽이다.
현현자는 장권과 십단금의 고수다. 구후영의 태극권도 나쁘진 않으나, 연무쌍과 대결할 때처럼 망아의 상태에 들지 않는 한 현현자 앞에서 열 초식도 못 버틸 게 확실하다.
현현자가 구후영을 재빨리 치울 생각으로 적당히 상대했으면 구후영의 오늘은 부괘否卦로 마쳤을 것이다.
그런데 현현자가 현허자에 대한 질투와 정학에 대한 경외 및 원망으로 마음에 큰 멍울이 졌고, 구후영의 태극권을 보고 오랜 기간 애써 감싸고 있던 멍울이 터졌다.
그래서 태극권으로만 대결할 것을 제안했고, 구후영과 추수推手로 겨루는 척하며 실상은 내상을 입혀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 악독한 마음을 품었다.
덕분에 태극권을 겨루더라도 승산이 전혀 없는 구후영이 이양二陽을 얻어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삼양三陽은 다름이 아닌 공청석유다.
장삼풍은 사부인 화룡진인火龍眞人의 염양심법炎陽心法으로 무공에 입문했으나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룬 다음 완전히 다른 심법과 무공을 창안해 일가를 이뤘다. 그럼에도 사부의 무공이 실전되는 걸 원치 않아 대제자에게 전수했고, 대제자 역시 자신의 대제자인 현현자에게 전했다.
염양심법으로 무공에 입문한 현현자의 내공은 양陽의 성질이 아주 강했다. 비록 뒤늦게 양의심공으로 음양의 균형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한 상태다.
반대로.
구후영은 극음極陰의 성질을 띤 공청석유로 근골과 체질을 바꾸면서 음기가 양기보다 훨씬 강해졌다. 현현자와 마찬가지로 기운이 한쪽으로 한껏 치우쳤기에 구후영 역시 많은 내공을 품을 순 있어도 최고의 경지를 밟는 일이 요원했다.
현현자와 만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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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현자와 구후영의 몸에서 동시에 뿌연 김이 솟았다.
음기가 강한 구후영이 양기가 강한 현현자의 기운을 얻으면서 삼양개태를 맞이했다. 부否로 혼란에 빠지고 소통을 멈춘 혈도들이 다시 질서를 찾았고, 손님이 주인이 되어 마음껏 날뛰던 상황도 반전됐다.
한계까지 운기하며 현현자가 통제력을 잃은 덕분이고, 거기에 운도 따랐다.
현현자가 비록 축기와 연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일 갑자를 훨씬 웃도는 내공을 쌓았다곤 하나, 구후영의 공청석유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삼양개태로 부극태래의 상황이 오며 음기가 움츠린 덕분에 균형이 얼추 맞춰졌다.
구후영에겐 공청석유로 생긴 한계를 깰 절호의 기회가 온 셈이다.
물론, 구후영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해 그저 버틴다는 일념이었다.
'어떻게?'
반면, 내공의 경지와 식견이 구후영보다 훨씬 높은 현현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후영의 몸에서 온 순수하고 강한 음기가 염양공으로 얻은 양기를 중화했다.
양의심공을 익히며 그렇게 원했던 일이 예기치 않게 벌어진 것이고, 현현자의 몸에 김이 생긴 이유다.
'현월궁의 청풍불의공인가?'
염양공이 위력이 대단한 심법은 아니지만, 기운의 순수함은 강호에 알려진 심법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개중 대부분이 양기가 강한 심법이니, 염양공의 기운에 대항할 수준의 음기는 청풍불의공밖에 없다.
'뭐든 중요치 않다. 여기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문제다.'
현현자의 양기를 얻은 구후영은 음양의 균형을 찾았고, 현현자 역시 구후영의 음기를 얻어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이대로는 둘 다 작은 것만 얻고 끝난다. 구후영이 현현자의 기운을 원해서 얻은 게 아니고, 자기 기운도 원해서 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둘이 마음을 합치면.'
여기서 현현자와 구후영이 마음을 합쳐 태극을 이룬다면, 둘 다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둘 다 상대를 일말의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태극을 이룬 상황에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품어 상대의 기운을 전부 먹어 치우려 한다면, 남은 사람은 꼼짝없이 당할 도리밖에 없다.
'마교의 종자를 믿을 수 있을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현현자의 눈에 자신의 주름 가득한 손등이 들어왔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복잡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며 현현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난 도대체 뭘 원했던 거지?'
삼풍 조사가 남긴 영약은 염양공을 익힌 현현자보단 현허자가 취하는 게 훨씬 낫다. 양기가 강한 심법을 익힌 현현자는 영약을 먹어도 내공의 양만 늘 뿐 경지를 높이지 못한다.
정학이 태극권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도 명확했다. 양기가 너무 강하기에 태극권을 익혀봤자 큰 소용이 없다. 막대한 내공과 드높은 오성으로 강한 위력을 발현할 순 있으나, 치우침이 강해 태극권을 높은 경지로 익히기는 어렵다.
차라리 부드러움의 극이라는 십단금을 열심히 수련하면 내공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현자는 질투와 분노로 눈이 멀어 태극권에 집착했고,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양의심공을 붙잡고 시간을 허비했다.
'난 참으로 부끄럽게 살았구나.'
이제 평생 숙원을 해결할 기회가 오자 그간 자신이 했던 못난 행동과 생각들이 일일이 떠올랐다.
'그런 주제에 저 청년을 의심하다니.'
현현자는 현재 문제가 되는 사람이 구후영이 아닌 자신임을 드디어 인정했다.
'정학 사숙의 가르침을 받을 정도면 바른 자가 분명하다.'
질투가 사라진 현현자는 그제야 구후영을 제대로 판단했다.
동시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내 말을 잘 듣게. 나는 양이 되고 그대가 음이 되어 태극을 이뤄야 하네."
현현자가 내공 대결 중에 입을 열어 말하자 구경하던 무인들이 전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양의심공 덕분에 가능한 건데, 개중 연유를 아는 자가 없으니 그저 현현자의 경지가 대단하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양과 음은 상대적이니, 그대가 양이고 내가 음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게."
구후영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세."
여전히 현현자의 기운이 구후영에게 가고 구후영의 기운이 현현자에게 갔다.
그러나 아까와는 분명히 달랐다.
전엔 현현자가 기운의 주입과 갈취를 일방적으로 한 거고, 현재는 현현자와 구후영이 자신을 완전히 열어 상대가 마음껏 기운을 취하게 허락했다.
그에 둘의 몸에서 솟던 뿌연 기운이 조금씩 줄었다.
"호법을 서라."
무당의 배불뚝이 장로가 경악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에 하석의 무당 제자들이 달려와 둘을 가운데 두고 팔괘검진을 만든 채 사방을 견제했다.
'이대로는 안 좋은데?'
흑 장로가 이마를 찌푸렸다.
'정학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무당에 절대 고수가 한 명 더 생기면.'
그러나 흑 장로는 단순한 성격답게 걱정으로 그치고 손을 쓰지 않았다. 이대로 흐르면 현현자가 한계를 깨고 훨씬 강해질 게 뻔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뭘 해서 방해할 생각까진 아니었다.
'좋군.'
덩치 큰 사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강한 적수가 하나 는다고 생각하니 흥분으로 숨이 가빴다.
'재밌네.'
현월궁의 여인은 누굴 도울지 마음을 정했기에 편하게 구경했다.
[호법. 두고 볼 거요?]
반면, 용전향은 다급한 나머지 쌍둥이 호법에게 전음을 보냈다.
[급하면 네가 나서.]
곧 전음이 돌아왔다. 그런데 호법의 전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용전향의 전음을 엿듣고 장난을 친 거였다.
경악한 용전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상석에 앉은 자들을 찬찬히 뜯어보며 누구 짓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용 당주, 대가 없는 도움은 이번이 마지막이오.]
서로 상의하느라 시간이 걸렸는지 호법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용전향은 전음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아 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용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산에게 포권했다.
"배산 공자가 득남했다는 경사로운 소식에 기쁜 나머지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리 찾아왔소. 결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기 바라오."
"자리를 빛내줘서 감격할 따름이오."
배산이 포권으로 화답했다.
"소개가 늦었소. 난 초 형과 결의형제를 맺은 악불형이라고 하오."
용천의 말에 자리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십수 년 동안 강호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별의별 흉흉한 소문이 다 돌았는데, 전혀 다른 얼굴이 신창이라며 나타났다.
"소질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숙부 얘기는 부친께 많이 들었습니다."
배산이 몸을 좀 더 숙였다.
"무당 장로와 함께 연공하는 저 청년은 내가 어제 만났으나 심히 마음에 들었소. 그러니 누구든 방해하려 하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요."
그에 용전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창은 구척장신에 팔이 웬만한 여인의 허리보다 더 굵다고 들었소. 그대가 정녕 악 대협이 맞소?"
"의심이 많군."
차가운 얼굴로 말한 용천이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에 따라 조금은 왜소하던 몸이 천천히 커지며 옷이 뿌지직 찢겼고, 호흡을 스무 번 정도 하자 어느새 구척장신에 눈매가 부리부리한 사내로 변했다.
"이젠 믿겠느냐?"
보따리에서 새 옷을 꺼내 입은 악불형이 용전향을 쏘아보며 말했다.
- 작가의말
무당 대장로 현현자 : 단일화합시다. 내가 무당층의 표를 확실히 끌어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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