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일전最後一戰
고요한 목조 궁전에선 향에서 불티가 튀는 소리만 가끔 울렸다.
모용건의 시체가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진 뒤로 침식을 전폐하다시피 한 황태자가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천장을 가로지르는 대들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하루 십이 시진 곁에 붙어 시중드는 전속 환관이 나직이 불렀으나 황태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 황 태감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거절하라."
"급보이옵니다."
총기가 사라졌던 황태자의 눈동자에 노기가 서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황태자가 다시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도 귀찮은 것이었다.
그때.
황 태감이 안으로 들어왔다.
허락받지 않고 함부로 알현하는 건 최소 곤장질이고 심하면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 중죄다.
그러나 황 태감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없었다.
"폐하. 중요한 소식이옵니다."
"그래. 어서 말하라."
예전 같으면 위엄을 세운다고 일단 곤장부터 때리고 봤을 테지만, 현재 황태자는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불사지체가 나타났습니다."
황태자가 벌떡 일어나 위엄 가득한 눈으로 황 태감을 노려봤다.
"바로 어제, 장성을 넘어 북원의 땅으로 향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에 군사들이 활을 쏘아 공격했는데, 몸에 백 대가 넘은 화살을 꽂고도 멀쩡했다고 합니다."
"속임수는 아니고?"
"소식을 받자마자 각지에 전서를 날려 확인했습니다. 그자의 종적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양양이고, 남양부와 회경부 그리고 순덕부에서도 불사지체를 목격한 자가 있다고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더구나."
황 태감은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바로 말을 이어갔다.
"강호의 무리가 뒤를 쫓고 있습니다. 소림의 무공을 사용하는 무리가 있고, 무당에서도 사십 명이 넘은 고수를 출동했습니다. 그 외 소문파나 소속이 없는 강호인도 오백 명 이상이 모였습니다. 대동부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무당 장로의 양의검법과 소림의 여래신장으로도 불사지체를 제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하, 위 태감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급한 걸음으로 들어온 위 태감은 황 태감을 보고 살짝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황태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전하. 강호에 불사지체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사옵니다."
"말하라."
황태자의 반응으로 황 태감한테 선수를 빼앗긴 걸 깨달은 위 태감은 자잘한 정보로 자기 공로를 부풀리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처음 목격됐을 때 살이 거의 없이 뼈만 남은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점점 몸에 살이 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현재 올라온 정보로 판단컨대, 사람이나 짐승의 생기를 흡입해 몸을 재생한 거로 보입니다."
비록 황 태감한테 선수를 뺏기긴 했으나, 황태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입으로 뱉었다.
위 태감은 어느새 일그러진 황 태감의 얼굴을 느긋한 마음으로 감상했다.
"강호의 무리는 어찌 된 일인가?"
"불사지체는 무당이 있는 호북에서 출발해 소림이 있는 하남을 지났습니다. 두 문파가 당연히 나섰고, 그에 잡다한 무리가 내막도 모르고 덩달아 따라붙은 거로 보입니다."
"전하, 강호의 무리가 다시 준동하려는 조짐입니다. 바로 제압해야 합니다."
위 태감한테 공을 뺏긴 황 태감이다. 여기서 뭔가 하지 않으면 황태자가 등극한 이후 장인태감의 자리는 꼼짝없이 위 태감의 낭중지물이다.
"왜 그리 생각하는가?"
"팽가에서 천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강호인은 짐승과 같다. 가장 위에 범이 버티고 있을 땐 나름의 균형과 질서를 이루지만, 범이 사라지면 곧 영역 다툼을 시작한다.
거기에 불쑥 나타난 불사지체가 기름을 끼얹었다.
무당과 소림은 속가제자나 관계가 밀접한 사람이 불사지체의 손에 죽어 뒤쫓는 걸지도 모르지만, 무식한 강호의 무리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불사지체에 절대고수가 되는 비밀이 있다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그 상상을 진실로 믿어 목숨마저 버려가며 쟁취하려 한다.
'무도한 놈들. 그 힘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쓸 생각은 안 하고.'
"군대는 안 되겠지?"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 굳이 추운 북방의 초원으로 가는 게 아니어도 군대를 움직이는 건 어렵다.
황제가 직접 나서도 십중팔구 안 될 일이니 황태자는 시도조차 안 하는 게 낫다.
"동창과 금의위 소속 고수에 지난번 불사지체의 난동을 제압했던 자들까지 소집하면 소림이나 무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전력입니다. 소신께 맡겨주시면 반드시 불사지체를 생포해 오겠습니다."
위 태감이 나섰다.
반면, 황 태감은 눈알을 굴리며 속으로 주판을 튕겼다.
"그리하라."
위 태감이 기쁜 얼굴로 물러났다.
황 태감의 얼굴에 비웃음이 희미하게 비쳤다.
'멍청한 놈. 진정 중요한 게 뭔지 모르는구나.'
위 태감이 밖으로 나간 사이, 황 태감은 위 태감의 사람을 전부 구워삶을 예정이다. 위 태감이 살아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황 태감의 회유와 협박에 버틸 자는 없다.
위 태감은 이번 일에 성공해 황태자의 눈에 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쉬울 리 있겠는가.
위 태감이 없는 틈에 대신들을 찾아가 적당한 이익을 미끼로 던지면 당장 장인태감이 될지도 모른다.
위 태감이 큰 공을 세우면 황태자가 등극한 뒤 쫓겨날 가능성이 크긴 하나, 그때를 생각해서 미리 움츠릴 필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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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봉.
동녘이 겨우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새벽에 불청객 두 명이 찾아와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누구시오?"
불청객 탓에 단잠에서 깬 낙화문 제자가 불퉁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문주께 전하시오. 진법과 건축이 중요한 일로 찾아왔다고."
"자, 장문?"
제자는 구후영한테 손님이 왔음을 알리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구후영이 나타났고, 손을 젓자 대문이 절로 열렸다.
'신선이다.'
장문 사형이 강하다는 소문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나 도대체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었다.
소문이 허황해서가 아니고, 절정을 앞두었다곤 하나 아직은 일류인 낙화문 제자들의 상상력이 빈곤한 탓이었다.
그렇기에 온갖 소문으로 단련되었음에도 구후영이 보여준 모습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장문. 큰일이오. 기관이, 기관이."
"기관이 무덤에서 일어났소."
진법이 말을 더듬자 건축이 끼어들었다.
"자세히 얘기하시오."
둘은 보물을 판 돈으로 산 하나를 샀고, 거기에 장원을 지었다.
그러곤 표국을 고용해 기관의 시신을 가져다가 잘 짠 관에 넣어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밤만 되면 장원에 이상한 소리가 퍼졌다. 그 탓에 시종과 시녀들이 모두 도망쳤고, 진법과 건축만 남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관이 무덤을 뚫고 나왔다.
직접 그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한쪽 귀퉁이가 무너진 무덤이나 들린 관 뚜껑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기관이 사람을 죽이고 피를 마시는 모습을 봤소. 그리고 계속 북쪽으로 달렸는데, 사흘 전에 장성 밖으로 갔소. 아무래도."
"그곳으로 가려는 게 맞을 거요."
구후영은 둘보다 더 많은 걸 안다.
'심장. 독 선생의 심장 때문이다.'
구후영 역시 공청석유의 힘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천마의 힘은 가까운 구후영 대신 만 리 밖의 모용건한테 유실됐다.
구후영이 천산에서 공청석유의 힘을 모두 소모해서인지, 아니면 먼저 몸을 담근 독 선생이 중요한 힘을 다 가져가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현재 독 선생의 심장을 가슴에 넣은 기관이 무덤에서 일어난 거로 유추할 때, 독 선생이 중요한 힘을 가져갔다는 추측이 훨씬 신빙성이 있었다.
'천마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독 선생 때문인가?'
단순히 점괘를 믿어서가 아니고 독 선생의 존재를 눈치채서라면 천마가 저항을 포기한 선택을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
'천마가 죽음으로써 힘과 지식이 천공교검 안으로 들어갔지. 천마가 계속 버텼다면 힘의 절반이 유실됐을 거고, 그 힘을 다 소화하면 천마보다 더 강한 무인이 나올지도 모른다.'
천마나 위종은 인간이라는 한계 때문에 더 강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삼천 동남동녀의 '힘'을 얻으면 인간의 한계를 벗을지도 모른다.
천마는 단순히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 선생한테 힘을 덜 뺏기려고 죽음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독 선생이 천마보다 약할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잠깐 고민하던 구후영은 바로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지금은 독 선생의 심장에 기관의 몸이다. 일류는커녕 이류에도 못 미치는 자의 몸으로 얼마나 큰 힘을 낼까?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독 선생의 경지는 완숙한 절정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지금 북쪽으로 가는 게 원래 몸을 얻기 위함이라면.'
"문주. 지금 소림과 무당이 기관을 쫓고 있소. 내 생각엔 그 심장이 말썽인 듯한데, 문주께서 놈을 잡아 심장을 꺼내시오. 고향에도 못 묻힌 불쌍한 놈이잖소."
진법과 건축이 구후영을 찾아온 건 기관의 몸이라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중원 사람은 죽은 뒤에 고향에 묻히는 것에 집착한다.
몸이 온전하게 땅에 묻혀야 다음 생에 더 좋은 팔자로 태어난다는 말 때문이다.
"두 분은 여기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시오. 내 반드시 기관의 시신을 온전하게 갖고 돌아오겠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사제한테 둘을 잘 대접하라고 당부한 뒤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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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네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일행은 태원부에 도착한 다음 며칠 동안 술판을 벌였다.
구후영은 다시 단아를 찾아 천하를 주유할 생각이고, 원경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홍엽산장에서 지낼 예정이다.
옥무영은 향후 몇 년 동안 청성을 안 떠날 계획이고, 청빈은 구후영을 도와 단아를 찾을 생각이다.
단, 청빈의 경공으론 구후영한테 짐밖에 안 되기에 따로 움직일 예정이다.
거기에 그간 왕제상과 소원했던 걸 생각해 며칠 동안 원 없이 먹고 마시기로 했다.
두 사내가 찾아왔을 때 일행은 헤어지기 전이었고, 어쩌면 천마에 비견하는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다들 동행을 자처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천마의 죽음이 정해진 건지도 모르겠구나."
옥무영이 한탄했다.
"그렇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천마는 당시도 천하제일의 강자다. 그런데 대부분이 일류에도 못 미치는 도굴꾼들 때문에 훗날 천마의 죽음이 예정됐다니.
"만약 독 선생이 힘을 나눠가지 않았다면, 천마는 끝까지 싸웠을까요?"
"가설은 의미 없다. 독 선생이란 작자가 없었다면 점괘가 달리 나왔을지도 모르니까."
"저기."
대화하던 중, 원경이 갑자기 팔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시체 같은데."
일행은 빠르게 다가가 시체를 살폈다.
"강호의 무인이다."
문파 소속이 아닌 떠돌이 무인으로 보였다. 구후영은 상대 가슴에 난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장법 조예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깊었다.
"원래 몸을 찾는다면 천마 이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청빈을 잡고, 옥무영이 원경을 잡았다.
곧, 네 사람의 신형이 북쪽으로 사라졌다.
- 작가의말
첫 화에 등장했던 독 선생이 최종 보스가 되었습니다. 수미상관의 미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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