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야사야正也邪也
전국 말기에 협객들이 칠살연맹을 결성한 목적은 전쟁을 일삼는 무도한 왕들을 죽여 천하에 태평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해 일시적이나마 평화가 온 시점에 왜 칠살연맹이 부활했을까?
그 답은 연 선생이 기거하던 집에서 찾아낸 문서에 똑똑히 적혀 있었다.
"이걸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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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왕 영정은 중원을 통일해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고 자신을 황제로 칭했다.
시황제 혹은 진시황으로 불리는 이 무소불위의 통치자는 당연한 수순으로 장생불로에 빠졌고, 이에 반발하는 태자 부소를 변방에 좌천해 끝내 죽음으로 몰았다.
부소가 진나라뿐이 아니라 병합된 여섯 나라 백성의 존경까지 받았던 걸 생각하면 불로장생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큰아들을 배척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영정은 어떻게 친아들을 가차 없이 죽일 정도로 불로장생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을까?
서불徐市 혹은 서복徐福으로 기록된 도사가 바로 믿음의 근원이었다.
귀곡자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진 서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대단한 재주를 선보였고, 실제로 서불이 준 약을 먹고 영정은 약관의 젊은 청년처럼 항상 정력이 넘쳤다.
동해로 첫 출해를 마치고 돌아온 서불이 봉래도에서 신선을 만나 장생불로에 관한 약의 단서를 얻었다고 하자 영정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고, 서불의 요구에 따라 동남동녀 삼천을 줬다.
그렇게 동남동녀 삼천을 싣고 바다로 나간 서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사기를 비롯한 수많은 책에 기록됐지만, 연 선생의 문서에 적힌 내용은 달랐다.
의봉군생술蟻蜂群生術.
개미나 벌은 하나의 군체로 생활하며 여왕을 위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친다. 이들은 대부분 인간과 달리 개체의 생명보단 군체의 생존을 우선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개중 일부 종은 하나의 사고를 공유하여 정신적으로 연결되었다고 서불은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서 출발해 서불은 진시황과 삼천 동남동녀를 하나의 군체로 만들려 했고.
놀랍게도 성공했다.
그 방법에 관해서도 대략 적혔는데, 공청석유로 죽지도 썩지도 않는 몸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서불은 삼천 명의 동남동녀를 공청석유로 가사假死 상태에 빠뜨린 다음 대규모 진법과 특이한 술법을 이용해 이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었다.
삼천 명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서불은 영정을 불사의 몸으로 만들고, 삼천 명의 정신과 연결했다.
이때 삼천 명에게 영정을 상위 존재로 인식하고 섬기도록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서불의 예상대로라면 불사의 몸에 삼천 명의 정신적 지지를 얻은 진시황이 진정한 장생불로는 아니어도 최소 만 년은 넘은 세월을 살며 제국을 통치해야 했다.
그런데 진시황 역시 삼천 명의 동남동녀와 마찬가지로 가사 상태에 빠져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진시황의 체신替身(주인 행세를 하는 가짜)이 죽으면서 가장 멍청한 아들인 호해가 황제가 되었는데,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명한 사자성어를 남겨 지금까지 그 어리석음으로 비웃음을 받는 자였다.
멍청한 황제와 욕심만 가득한 간신의 조화로 제국은 삼 년 만에 무너졌고, 더는 제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서불은 영정을 깨우는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나 싶었으나.
한나라 시절 한 명의 동남이 긴 잠에서 깼다.
그자가 바로 삼천갑자로 유명한 동방삭이었다.
입이 다소 가벼웠던 동방삭은 자신이 삼천갑자를 살 수 있다고 곳곳에 떠들어댔고 당시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장생불로에 미쳐 있던 한무제의 주시를 받았다.
한무제는 동방삭에 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진실을 알고 있던 칠살문의 주의도 끌었다.
당시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가 멸망한 지 수십 년이 넘은 시절로, 칠살문은 서불이 남긴 기록과 여러 유언비어를 결합해 진시황이 안 죽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고, 동방삭의 출현으로 그 가능성을 확신으로 바꿨다.
그때부터 칠살문은 진시황의 몸이 있는 곳을 찾는 일에 몰두했고, 덕분에 세상 누구보다 이 일에 관해 많은 자료와 정보를 보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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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얘기군."
연 선생. 실제로는 제 선생으로 불려야 할 이자가 모은 자료에 의하면 동방삭은 진나라 때 삼천 명 동남동녀 중 하나다.
공청석유로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소생했고 혼인하여 후손까지 남겼다.
그러나 삼천갑자를 산다고 허풍을 불었던 것과 달리 육십팔 세에 사망했는데,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한무제가 동방삭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했고, 누군가는 동방삭이 우화등선해서 시체가 없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죽은 동방삭이 직접 걸어서 북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삼국 시절의 초선 역시 삼천 동남동녀 중 하나였다.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해 동탁을 죽이고 자결했다는 연의에 적힌 내용과 달리 초선은 살아남았고, 배월교를 만들어 어려운 여인들을 도왔다.
배월교보다 수백 년 늦게 생긴 현월궁도 내력이 심상치 않았다.
현월궁을 세운 시조 역시 삼천 명의 동남동녀 중 하나였는데, 초선의 쌍둥이 언니였다.
동생보다 수백 년 늦게 깬 언니는 현월궁을 세웠고, 그저 달을 모시는 종교였던 배월교에 무공을 전했다.
칠살문이 현월궁을 공격한 것도 사실은 진시황의 몸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함이었고, 조나라 세력이 현월궁에 흘러든 건 칠살문과 현월궁이 싸운 지 백 년 정도 된 시점이었다.
위종의 말처럼 현월궁이 조나라의 후손이어서 공격받은 게 아니라 현월궁이 공격받자 같은 처지인 조나라 후손들이 현월궁에 합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삼천갑자를 사는 게 아니라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깨는 방식인 거군."
제일 먼저 깬 동방삭은 자신이 삼천 명 몫을 모두 사는 줄 알았지만, 사실상 한 명이 깨어서 육십 년 정도 사는 방식이었다.
"진시황도 언젠간 깬다는 말인데."
배월교를 만든 초선과 현월궁을 만든 초대 궁주는 쌍둥이 자매였다. 그러나 둘이 깬 시간대는 무려 수백 년이나 차이가 났다.
누가 언제 깰지는 본인들도 모르는 일인 듯했는데, 문제는 진시황이다.
모두가 평등한 삼천 명과 달리 진시황은 상위 계급의 지배자로, 개미나 벌로 따지면 여왕과 같은 존재다.
수십 년을 살다 사라진 다른 자들과 달리 진시황은 한 번 깨면 쭉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놈은 장삼풍과 천마 중 한 명이 소생자蘇生者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어."
이들은 처음에 장삼풍을 소생자로 여겼다. 그러나 사십이 넘어서야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장삼풍보단 약관의 나이에 등장해 바로 강호를 진동한 천마가 훨씬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그간의 조사에 따르면 동시에 두 명이 깨는 건 불가능하기에 장삼풍보단 천마한테 더 무게가 실렸다.
그러다 시체도 없이 사라진 장삼풍에게 다시 의심이 기울었는데, 천마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서 다시 천마가 소생자라는 쪽이 힘을 얻었다.
"천마가 소생자라면 그간 보인 재주들이 이해가 돼."
천마는 이립이 되기 전부터 금기서화를 포함해 능하지 않은 기예가 없었고 학식도 누구보다 풍부했다. 또 아는 초식은 누구보다 많은데 수준 역시 꽤 높은 편이었다.
반면, 사대신협이 무공에 관해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가 있는 것과 달리 천마는 딱히 그런 게 없었다.
천마의 대부분 재주가 직접 터득한 게 아니라 기존 소생자들의 기억과 경험을 공유받은 거라면 모든 게 말이 된다.
"천마가 소생자라면 모든 게 이해가 되고, 놈이 서두른 것도 이해가 돼."
칠살문이 진시황을 추적한 지 천오백 년이 훌쩍 넘는다.
그렇게 오랜 기간 대를 이어 차근차근 진실을 밝히려 했던 자들이 갑자기 서두른 데는 천마가 소생자라는 가설이 크게 작용했다.
이들이 기억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칠살문의 조사가 맞는다면 이제부터 깨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천마와 비슷한 무위를 장착한다.
물론, 내공까지 공유하는 건 아니지만, 공청석유로 불사의 몸이 된 데 이어 삼천 명의 정신과 연결되어 주화입마 걱정이 없으니 고수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진시황이 천마의 무공을 갖고 깬다면 정말 끔찍하겠군."
칠살문의 가설처럼 한 번 깬 진시황이 다른 자들과 달리 다시 잠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다.
수백 년의 전란을 종결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진시황의 업적은 부인할 수 없으나, 마찬가지로 세상에 둘도 없는 폭군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자신을 거스른다고 친아들한테마저 자살하라고 황명을 내린 지독한 심성을 지닌 자고, 자신을 폄훼한다고 수많은 책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을 생매장으로 죽인 희대의 살인마다.
깬다면 황제가 되려 할 거고, 진정한 불로장생을 이루겠다며 세상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 모른다.
"놈이 옳은 일을 하려 했단 말인가?"
악불형이 찝찝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원래 신분인 제 선생보단 연 선생으로 불리길 더 좋아했던 놈은 진시황을 찾아내 죽이려는 거로 보였다.
"그런데 왜 기를 쓰고 나랑 이형을 죽이려 했을까요?"
구후영이 질문했다.
"아무래도 둘 중 한 명이 소생자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소생자는 깰 때부터 십 대 혹은 이십 대의 모습이다.
강호에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낙화문 제자로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구후영과 소림 제자라곤 하나 이립도 안 된 나이에 금강인을 얻은 원경이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입에서 진시황의 몸이 있는 곳을 알아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구후영의 질문에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사색에 잠겼다.
그때, 위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들은 게 있긴 한데, 확실치 않으니 그저 참고만 하시오."
사람들이 보낸 의심이 섞인 눈빛을 받으며 위종이 어색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이들의 정신은 모두 이어졌다고 했잖소. 게다가 진시황은 상위 존재고. 저들이 위치를 절대 발설하지 못하고 기록으로도 못 남기게 정신적으로 제약을 가했다고 추측하오."
합리적인 추측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위종이 좀 더 보탰다.
"칠살문은 호씨 일가가 장악한 다음부턴 진시황을 추적하는 걸 전면적으로 중단했소. 사실 칠살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여섯 가문에서도 일부만 매달리던 일인이라 어쩌면 호씨 일가가 아예 몰랐을 수도 있고."
"그간 복수심 때문에 깊이 생각지 않았는데, 우리를 해치기 며칠 전에 함께 술을 마시면서 놈이 이상한 질문을 한 적이 있소. 천마만큼 강한 폭군이 세상에 나온다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막겠냐고 물었는데, 다들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 같소."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차피 폭군도 언젠간 죽을 텐데 굳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그걸 막겠다고 나설 사람은 세상에 드물 것이다.
'올바름과 삐뚤어짐의 경계는 있기나 한 건가?'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진시황을 죽이려 했다면 놈은 도대체 정의로운 사람인가 사악한 존재인가.
구후영은 답 없는 질문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작가의말
코로나가 완치된 날이었습니다. 코가 뻥 뚫리고 목의 가려움도 사라지고, 가래도 없었습니다.
하여튼 기분이 좋은 날이었고, 저는 점심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커다란 통증이 저를 덮쳤습니다. 오른쪽 신장에 웅거하고 있던 결석이 드디어 우물을 벗어나 더 커다란 세상을 구경하기로 결심했고, 비좁은 요로 벽을 긁기 시작한 거죠.
예고도 없이 찾아온 통증에 저는 허리를 튕기는 동시에 오른팔을 강하게 휘둘렀습니다. 무릎 반사와 같은 행동이었는데, 둘 중 어느 동작 탓인지 등 근육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약 반년 전에 발톱 깎다가 등 근육이 놀라 일주일 정도 고생했었는데, 같은 부위였습니다.
결석은 약 반 시간의 고통만 남기고 방광에 안착했으나 등 근육 부상은 며칠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연초부터 코로나에 느닷없는 등 근육 부상에. 좋은 액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분간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완결까지 쭉 달려볼까 합니다. 남은 분량은 20화 정도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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