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왕무면眞王無冕
중검무봉重劍無鋒
무거운 검은 예리하게 갈 필요 없고,
대교불공大巧不工
대단한 물건을 겉을 꾸미지 않으며,
진왕무면眞王無冕
진정한 왕은 면류관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시종 미소를 머금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갑자기 얼굴을 굳힌 구후영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넘실댔다.
"법을 고치시오."
기도가 바뀜에 따라 말투도 달라졌고.
"법이 문제라면 법을 바꾸면 그만 아니오?"
태도도 거침없었다.
"어차피 그 법이란 것도 천 년 전의 사람들이 머리 맞대고 상의해서 만든 거 아니오?"
무섭게 으르렁대던 기운이 끝내 굴레를 벗고 수십 장의 공간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보통 갑자기 끌어올린 기운은 넓게 퍼지지 못하는데, 구후영은 달랐다.
푸르륵.
청총을 따라온 망아지들이 구후영의 기세를 못 이겨 오줌을 지렸다.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것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
현월궁을 대표하는 십수 명의 고수도 하나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
힘으로 산을 뽑고 기세로 세상을 덮는다.
구후영의 지금 모습이 그러했다.
"본궁을 협박하는 것이오?"
대궁주가 억지로 기세를 끌어올려 구후영에 맞서려 했다.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거요."
대답하는 동시에 구후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한층 강해지며 태평한 얼굴이던 청총마저 거리를 벌렸다.
단, 하얗게 질렸던 현월궁 고수들의 얼굴은 되려 탐욕으로 붉게 상기됐다.
'청풍불의공!'
고작 일류의 경지에만 이르러도 내공을 몸 밖으로 수월히 뿜어내는 청풍불의공이다. 덕분에 일류만 돼도 웬만한 절정보다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으며, 고수를 쉽게 배출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일정 수준이 된 후엔 오히려 같은 경지에 밀려 진정한 고수가 나오지 않았다.
암기를 주 무기로 삼은 것도 사목권이란 일관성 없는 권법을 만든 것도 청풍불의공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효과가 미미했다.
구후영을 방패로 삼으려는 것 역시 중원으로 돌아가면 칠살문을 비롯한 오랜 원한들이 보복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저 깨달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지만, 어떻게든 구후영한테서 최대한 많이 얻어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저 깨달음만 주면 구후영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내겐 협박으로 보이는데."
유독 대궁주만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든 대등하게 협상을 끌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때.
흡!
나직한 기합 소리와 함께 구후영을 중심으로 약 삼 장 반경의 땅이 움푹 꺼졌다.
"저런!"
그에 현월궁 고수들이 끝내 못 참고 소리 내어 경탄했다.
힘의 발원지인 구후영과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 깊이 파이는 괴이한 모습이 그저 막대한 내공 덕분으로 무식하게 해낸 게 아님을 시사한 탓이었다.
'어떡하지?'
구후영이 이번에 보여준 모습에 시종일관 애쓰던 대궁주마저 기세가 완전히 꺾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드디어 기세를 완전히 장악해 승기를 잡은 구후영.
"여러분이 중원으로 돌아갔다고 칩시다."
그러나 기세를 불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는 대신 오히려 기세를 거둬들이고 도리로 설득하려 했다.
"그대들이 다른 문파와 시비가 붙었을 때, 상대가 '강호의 규칙이 이러하니 당신은 빠지시오'라고 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나길 원하시오? 아니면 '그건 내 알 바 아니다'라면서 어떻게든 당신들 편에 서주길 바라시오?"
구후영의 말에 대궁주가 이마를 찌푸렸다.
현월궁이 법을 운운하며 단아의 치료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중원에서 옛 원수들을 만나 곤경에 처했을 때 구후영이 강호의 규칙 어쩌고 하면서 손을 떼도 할 말이 없다.
'중원 무림은 고리타분하지.'
중원 무림엔 강자는 지키지 않아도 될 규칙이 엄청 많다.
결국 이러한 규칙들이 약한 무인과 문파들을 보호해 무림의 덩치를 유지하는 역할임을 알지만, 대궁주로선 그저 짜증 날 뿐이었다.
'가뜩이나 수하들을 다스리는 게 쉽지 않은데.'
궁주와 장로들의 권위가 예전보다 못하고, 단오독의 해약을 통한 수익이 사라질 거고, 중원으로 옮기면서 딴마음 먹는 자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런 마당에 천 년 이상 전해온 궁의 법까지 무시하면 절반 이상이 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때,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법을 바꿀 필요가 없소. 어차피 우리도 현월궁을 떠나는 같은 처지 아니겠소?"
핵심을 찌르는 대장로의 말에 대궁주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궁의 법에 따르면 현월궁을 떠난 제자는 배월교 소속이 된다고 했으니, 이제부터 우린 배월교 사람이지. 배월교 사람은 배월교의 교리를 따르면 그만. 현월궁의 법이 뭐든 상관이 없지."
대궁주의 중얼거림과 함께 구후영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품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막대한 기운을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는 것처럼 쉽게 다루는 구후영의 모습에 현월궁 고수들이 또 한 번 크게 감탄했다.
'한결 성장했구나.'
장선은 압도적인 힘과 합리적인 언변으로 상대를 설득한 구후영이 뿌듯하기만 했다.
'강호의 거목이 될 아이야.'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구후영은 내심 착잡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불우했던 삶, 살면서 느낀 불합리와 부조리, 무고하게 휘말려 목숨을 위협받은 일들에 대한 억울함, 영문도 모르고 노려지는 것에 대한 분노.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곧고 바르게 살려고 이 악물고 버텼던 구후영이건만, 불과 몇 달 사이에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혔고 어느덧 강호에 더없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원경과 단아를 치료할 수 있단 생각으로 즐겁게 웃는 일행, 마찬가지로 큰 시름을 던 모습인 현월궁 사람들.
왠지 구후영만 뭔가 잃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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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얘기하겠소."
현월궁은 서둘러 원경과 단아의 진단을 마쳤다.
"둘 중 한 명만 온전하게 구할 수 있소."
현월궁엔 대단한 환약이 있다.
세간에는 대환단으로 알려진 영약은 오래전에 현월궁이 소림의 도움을 받고 대가로 내준 것이었다.
"남은 청로옥서환淸露鈺瑞丸은 하나뿐이오. 스님한테 먹이면 내상이 완치하고 건강히 일어날 거고, 저 아이한테 먹이면 다친 자궁이 깨끗이 나을 것이오."
단아는 대환단 없이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다친 자궁을 고칠 수 없어 출산하지 못한다.
불효유사不孝有四 무후위대無後爲大.
중원에선 불효에 네 가지가 있는데, 대를 잇지 못하는 게 제일 크다고 말한다.
출산하지 못하는 여인은 죄인 취급을 받으며, 아들을 못 낳은 남자 역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궁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목숨만 생각하면 대환단을 원경한테 쓰는 게 맞지만, 그러면 여인으로서의 단아가 죽는다.
구후영으로선 조언이 절실했지만, 대궁주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청로옥서환은 이제 공자의 것이오."
그때.
모용연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구후영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렸다.
"공자. 제발 원경 대협한테 주세요. 단 소저는 목숨이 위험한 게 아니잖아요."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모용연의 참견에 화난 대궁주가 소매를 떨쳤다.
그에 모용연이 뒤로 데굴데굴 굴러 구후영과 멀어졌다. 그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해 모용연이 허약해진 것도 있지만, 일정 수준까지 청풍불의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공자, 제가 이걸 드릴게요."
모용연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에서 책자를 하나 꺼냈다.
"태원현경太元玄經 원본입니다."
모용연은 요새에서 모용용에게 마음이 돌아서긴 했으나 모용영에 대한 정을 완전히 끊은 것도 아니었다.
더는 모용영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모용영이 원하던 책자를 작별 선물로 주기로 했다.
그래서 모용용한테 배후가 숨긴 책자를 찾아냈음을 숨겼다.
이젠 모용영이 죽어 없으니 태원현경은 모용연의 소유인 셈이다.
모용연은 이 귀한 책을 자신의 목숨을 구한 원경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설마."
태원현경이란 말에 잠깐 회상에 빠졌던 구후영이 성큼 걸어가서 책자를 받아 펼쳤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태원현경의 내용을 훑은 구후영이 대궁주를 향해 말했다.
"영약은 형님께 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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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문 북쪽의 동창 집무처.
열 명의 환관이 좌우로 갈라 앉고 상석엔 공현이 앉아 있었다.
"무림말살지계를 시행한다."
그에 환관들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자태를 보였다.
"시기가 성숙하지 않은 거로 사료합니다."
사람들의 눈치에 환관 하나가 떠밀려 나섰다.
"아니지. 지금보다 시기가 더 좋을 수 없다."
며칠 전 우문강현이 산해관에서 관 하나 들고 돌아왔다.
관 안엔 태원현경이 있었다.
왕중양이 만든 신선이 되는 법을 적은 책자로, 장춘자를 비롯한 전진칠자의 주해가 잔뜩 적혀 진본으로 보였다.
황제는 이미 침식도 잊어가며 태원현경에 푹 빠졌다.
이는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태자는 관 안에 놓인 불로장생의 처방을 적은 책자와 관에 담긴 시체에 푹 빠졌다.
관에 담긴 시체는 사 년 전에 죽은 모용건인데, 언제든 하품하며 일어날 것처럼 멀쩡한 모습이었다.
신선이 되어 천계로 떠나는 게 목적인 황제는 불로장생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대신, 생각도 못 한 태자가 거기에 푹 빠져버렸다.
황태후는 유근의 죽음으로 흔들리는 세력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고, 황후는 그런 태후의 손에서 권력 하나라도 더 뺏어오느라 혈안이 되었다.
동창의 행보에 간섭할 만한 사람 넷 모두 현재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자금과 인력이 어마어마하게 들 텐데."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공현이 상자 하나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건 자루 없이 날만 있는 비수들이었다.
"귀검이라고 한다. 귀검자가 남긴 귀검동에 들어가는 열쇠인데, 안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이 이천 년 동안 열 명도 안 된다고 한다."
"이걸 강호에 뿌린단 말입니까?"
"천산에 천마가 남긴 무공이 있고. 이게 안으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해라. 우선 열 자루만 뿌리고 상황을 지켜보자."
무공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게 무인이다.
게다가 천마의 무공이라지 않은가. 마교의 악명도 예전 같지 않아 중원 무인들이 두려움 없이 천산으로 몰려갈 것이다.
"이걸 뺏는답시고 한바탕 싸움이 일 거고, 천산에서 중원과 마교의 싸움 또한 치열하겠군요."
수하의 말에 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금의위를 시켜 이 검을 회수하게 한다면?"
황궁까지 나선다면 다들 귀검에 엮인 이야기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환관들이 혀를 내두르며 공현의 묘수에 감탄했다.
"구체적인 건 너희가 알아서 짜고 내게 경과만 보고하면 된다. 난 이만 태자 전하를 모셔야 하니 다들 물러가거라."
열 명의 환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자 집무실엔 공현만 남았다.
그런 공현의 눈에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시커멓게 물든 먹구름이 보였다.
바람은 세상에 고통과 번뇌를 뿌리는 악마의 선봉장 같았고, 먹구름은 당장 우레로 으름장을 놓고 번개로 겁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연 선생이 이번엔 무슨 꿍꿍이지?"
중얼거리는 공현의 얼굴이 서서히 변하더니 어느새 호 선생이 되었다.
- 작가의말
3부 풍운강호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기나긴 여정 끝에 구후영이 끝내 강호에 굴복했습니다. 꼬장꼬장한 선비였다면 현실에 부딪히며 일찍 고개를 숙였겠지만, 구후영은 나름대로 사고가 유연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훨씬 많은 고난을 겪고서야 드디어 변한 것이죠.
4부 종결강호는 이야기의 마무리인 동시에 이러한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 배경을 밝히는 장입니다. 최대한 설명을 줄이고 재밌게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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