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별산행大別山行
옹기종기 모인 산들이 하나같이 외롭다. 푸른 숲을 이룬 나무들이 하나같이 쓸쓸하다. 넓은 벌판도 두둑들이 무수한 조각으로 갈라놨다.
마주 흐르다가 간발의 차이로 스치는 두 구름이 구후영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결과가 어떻든 이만 자룡을 찾아야겠다.'
갖은 핑계로 외면하려 했지만, 한계에 이르렀다. 구후영은 이대로는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자룡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을 내렸다.
"사부. 제자가 출행하려 합니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임초현 앞에 구후영이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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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물은 소문대로 신의였다. 임초현의 얼굴과 팔뚝엔 희미한 흉터만 남았고 악력도 오 할 정도까지 회복했다. 안물이 알려준 특별한 운기 치료법을 삼 년 정도만 견지하면 악력 문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덕분에 구후영도 시름 놓고 떠날 수 있었다.
"내가 그간 강호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다. 자룡의 일을 알리고 수소문해달라고 부탁했으니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니 밖을 나돌지만 말고 가끔 얼굴을 비추거라."
"삼 년 안에 결과가 없으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정리하겠습니다. 부득이하게 저지른 불효는 그때 갚겠습니다."
수중에 거금이 들어오면서 벌려놓은 일이 꽤 많다. 구후영은 회복에 힘써야 하는 사부께 모든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몹시 송구한 마음이었다.
"불효라니. 유저 네가 불효면 천하에 사람다운 사람이 안 남아나겠다. 길 안 잃도록 늘 조심하고, 큰 도시에 가면 짧게라도 서신을 적어 보내거라."
구후영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지만, 임초현은 여전히 유저로 불렀다.
구후영은 사부에게 정중히 절을 올리고 어린 사제들과도 일일이 작별했다. 무럭무럭 잘 크는 혈총에게도 작별의 말을 건넸고 마지막으로 왕가장에 가서 왕제상에게 동생 찾으러 간다고 말한 후 바로 선착장으로 가서 석가장까지 가는 배에 탔다.
구후영의 목적지는 약초꾼이 산다는 대별산의 순하다.
자룡을 납치해 데리고 있던 자가 누군지 알아내고 자룡을 어떻게 했는지 파악하는 게 첫 번째 순서다.
그걸 단서로 이어지는 행보를 결정할 생각이고, 그 끝에 자룡의 죽음이 기다리더라도 멈추지 않을 결심이다.
'자룡이 없으면 진짜 고아孤兒가 되는구나.'
부모가 없지만, 동생이 있어 구후영은 자신이 고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룡이 죽고 없으면 진짜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구후영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약해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구후영은 사공을 채근했다.
"도대체 언제 출발하는 것이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까랑 똑같은 대답에 구후영의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그만 출발하는 게 어떻소? 내가 품삯을 두 배로 내지."
구후영은 석가장까지 가는 손님이기에 품삯이 꽤 비싸다. 그걸 두 배로 준다고 하니 사공들은 더는 안 기다리고 출발을 결심했다.
먼저 배에 탔던 자들이 구후영에게 눈으로 감사를 표했다.
"자. 이만 출발합니다. 멀미하는 분은 배 중간에 앉아서 먼 산을 쳐다보시면 됩니다."
선착장 말뚝에 묶였던 밧줄이 스르르 풀렸다. 강물에 쓸린 배가 선착장을 떠나며 구후영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선착장까지 나오려던 사부와 사제들 그리고 왕제상을 극구 말렸는데, 아무도 배웅하지 않는 출행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쓸쓸하고 괴로웠다.
"잠깐. 잠깐만."
애탄 외침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선착장에서 옅은 청삼에 문사건을 쓴 소년이 배를 향해 간절히 손을 젓고 있었다.
"보름 뒤에 다시 오시오."
배가 이미 흐름을 탔기에 다시 돌아가긴 어렵다. 사공은 발만 동동 구르는 소년에게 다음 출행 시간을 고지했다.
"젠장."
소년이 작게 투덜거리며 뒷걸음치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강을 향해 달렸다.
'고수다.'
내공은 지지부진해도 무공 경지와 안목만큼은 높은 구후영이라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 것 같은 소년이 사실상 엄청난 고수임을 바로 알아챘다.
과연. 땅을 힘껏 밟은 소년의 몸이 새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그새 배가 흐름을 타고 하류로 움직였기에 소년은 차디찬 강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무공은 대단해도 머리는 좋은 편이 아닌 듯했다.
"손님. 장대 잡고 올라오시죠."
장대는 강이 얕을 때 바닥을 짚는 용도로 쓰는 긴 대나무다.
"그냥 가. 소중한 물건을 흘렸어."
말을 마친 소년은 자맥질을 하며 강바닥에서 뭔가를 찾았다. 아무래도 몸에 지닌 귀한 물건이 강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짐도 없는 걸 보면 먼 길을 떠나는 사람 같지도 않은데. 요즘 애들이 하는 장난인가?'
소년의 활극 덕분에 우울하기만 하던 구후영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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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길 잃은 거 같은데?'
석가장까진 배를 탔으니 아무 문제가 없었고, 석가장에서 내린 다음 지름길 따위에 눈도 안 주고 관도만 따라 걸었더니 봉양부까지 길을 헤매지 않았다. 봉양부에서 대별산으로 향하는 여정도 순조로웠다.
문제는 대별산에 도착하고부터 생겼다.
순하는 대별산에서도 아주 깊은 곳에 있고, 약초꾼이나 사냥꾼 아니면 찾지 않는 곳이다.
문제는 약초꾼과 사냥꾼들도 순하로 가려 하지 않았다.
"백화궁百花宮의 허락 없이는 거기로 갈 수 없습니다. 들키면 목이 날아납니다."
순하와 가까운 곳에 백화궁이라는 문파가 있다. 이들은 가을에만 수확물의 절반을 받는 조건으로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자기 문파 영역에 들어오게 허락하고, 다른 때에 들어오면 이유 불문하고 목을 벤다.
"돌아가면 안 됩니까?"
다행히 순하는 백화궁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영역에만 안 들어오면 된다고 했으니 조금 돌면 될 것 같았다.
"그러려면 가는 데만 최소 보름이 걸립니다."
백화궁의 영역을 피해 가는 길은 사냥꾼이나 약초꾼도 마다할 정도로 험하다. 안전하게 가려면 크게 돌아야 하는데, 그 여정이 무려 보름이나 걸린다.
"사례를 넉넉히 하겠습니다."
경 총관이 돈을 얼마나 유용하게 써먹는지 곁에서 지켜보며 한 수 배운 구후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돈이 늘 통하는 건 아니었다.
"여긴 벽지라서 돈이 소용없습니다. 돈을 먹는다고 배부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약초와 가죽을 원하는 자들이 가을이 돼야 쌀을 들고 오니 그때까진 은자나 돌이나 똑같습니다."
이들은 당장 먹을 음식이 급하기에 가는 데만 보름이 걸리는 구후영의 여행에 아무도 동참하려 들지 않았다.
구후영은 어쩔 수 없이 홀로 순하까지 가려고 했다. 순하가 있는 산이 대별산에서도 높은 축에 들기에 시야에 두고 움직이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가정했는데, 결국 사흘째에 길을 잃고 말았다.
'백화궁이라.'
태원부에서 대별산까지 거리가 이천 리 넘는다. 산서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용호표국도 이쪽에선 아는 사람이 드물기에, 구후영이 백화궁이란 이름을 처음 듣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중원 어디에 가도 아는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문파가 열 개 남짓밖에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처음 듣는 문파라고 얕잡아볼 순 없다.
구후영은 괜히 백화궁의 영역으로 들어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신중히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밤에 움직이자.'
백화문 사람들은 밤에 자겠지만, 공청석유 덕분에 눈이 좋아진 구후영에겐 낮이나 밤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 푹 쉬고 밤에 저기 높은 봉우리에 가서 방향을 정하고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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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떴다. 밝은 보름달을 보니 동생이 보고 싶고 사부가 보고 싶고 어린 사제들도 그리웠다.
심지어 너무 봐서 질렸던 왕제상도 생각나고 볼 때마다 보석 없냐고 귀찮게 굴던 만균마저 떠올랐다.
'약초꾼 일행이 약속을 안 지킨 거라면 어떡하지? 보석을 주고 나한테 잘해준 게 자룡을 해친 죄책감 때문이었다면?'
목적지가 가까워져서인지 그간 애써 억눌렀던 온갖 고민과 걱정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복수한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자룡의 죽음에 연관된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목숨을 거둔다.'
구후영이 성현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직접 고민하기 시작한 후 얻은 성과가 있다면 바로 이거다.
어떤 문제는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없다. 성현의 말씀도 전혀 쓸모가 없고, 열 사람에게 물어보면 열 가지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렇기에 가끔은 시시비비를 다 가려 정확한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일정한 원칙을 갖고 맞든 틀리든 확실한 결론을 빨리 내리는 게 차라리 낫다.
머리를 털어 고민을 지운 구후영은 낮에 봐뒀던 높은 봉우리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길이 험하기는 하나 힘이 세고 체력도 강한 구후영은 빠르기가 평생 산을 탄 사냥꾼과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었다.
'음. 순하가 있는 산이 어느 산이지?'
문제라면 봉우리에 순조롭게 오르고도 불과 몇 시진 전까지 시야에 뒀던 그 산을 찾지 못했다.
'낮에 보면 다를까?'
밤에도 잘 보인다곤 하지만, 그래도 낮에 보는 것처럼 확실하지 않다. 구후영은 봉우리 꼭대기에서 머물며 낮이 밝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가까운 산이라면 급해할 게 없고, 먼 산이라면 백화궁의 영역과도 거리가 있을 테니 낮에 움직여도 괜찮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은 편한 자리를 찾아 내공을 수련했다. 백 일 정도 출타했다가 돌아온 후 한동안 성취가 괜찮았는데, 요즘 자룡 때문에 속을 썩이다 보니 예전과 마찬가지로 축기도 연기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만 해서 구후영은 애써 수련에 집중했다.
그때.
"사형. 사부한테 들키면 우리 큰일 나요."
살짝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궁의 영역에서 이십 리나 벗어난 곳인데 뭘 걱정해. 게다가 취화봉聚花峰은 사부가 잘 안 다니는 거 알잖아."
남자 목소리였다.
"저도 사형 좋아하는데,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요."
"우리가 뭐 범부들처럼 욕정을 못 이겨 이러는 거야? 이게 다 무공 수련 때문이잖아. 너 사부의 적혈장赤血掌을 안 배우고 싶어? 지금 네 내공 성취론 오십이 돼도 적혈장에 입문조차 할 수 없어."
"그럼 사형은 왜?"
"나야 널 좋아하니까. 널 돕고 싶으니까."
'적혈장? 장방선생의 묵혈장이랑 무슨 연관이 있지?'
토번에 대수인이라는 대단한 무공이 있다. 처음 만든 사람도 끝까지 익혀내지 못했고, 팔백 년의 기간에 대수인을 대성한 자가 한 명밖에 없을 정도로 난해한 무공이다.
그간 수많은 천재가 대수인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천재가 괜히 천재인 건 아니었다. 대수인을 대성하는 데 실패했지만, 이들은 수많은 아류 장법을 만들어냈다.
묵혈장도 그렇고 적혈장도 그렇고, 모두 대수인의 아류다.
"사형. 우리 진짜 괜찮은 거죠?"
"사형 믿지?"
대화가 끊기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더니 야릇한 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지만, 갑자기 음서의 내용이 떠오른 구후영은 뱃속이 뜨거웠다.
'뭔지 모르지만, 자리를 떠야겠다.'
그러나 정작 몸을 일으킨 구후영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괜히 큰 기척을 내면 훨씬 난처한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맞춤법 검사기 사이트가 접속이 안 되어 맞춤법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오타가 보이면 지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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