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동삼척氷凍三尺
왕충王充·논형論衡·상류편狀留篇에서.
고부하빙결합故夫河氷結合 비일일지한非一日之寒, 적토성산積土成山 비사수지작非斯須之作이라고 하였다.
강이 얼어붙은 건 하루 추워서 될 일이 아니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드는 것도 하루 바짝 일해서 될 일이 아님을 뜻하는 말이다.
"그건 힘들겠는데."
뒷방 늙은이가 되라는 옥무영의 말을 현영자가 거절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전처럼 웅크리고 있거나, 아니면 내 손에서 권력을 뺏어야 할 걸세."
"뭐, 나도 사숙이 쉽게 내주리라 기대하진 않았소. 조건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소림은 절간이 불타는 위기를 세 번이나 겪었네. 그런 소림을 넘으려면 나 하나쯤은 가볍게 넘어야지 않겠소."
현영자의 말에 옥무영이 이를 살짝 갈았다.
"늙으면 느는 게 고집뿐이란 말을 믿지 않았소. 특히 사숙은 무당을 위하는 마음이 커서 이득이라고 판단하면 날 지지할 거라고 생각했소."
옥무영의 말에 현영자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날 그리 생각했다니 고맙소. 감사의 의미로 좀 더 설득할 기회를 드리겠소."
'이 늙은이가 날 갖고 노는 건가?'
속에 화가 치밀었지만, 옥무영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진지하게 설득을 이어갔다.
"무당이 일취월장하려면 장로들이 무공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야 하오."
무당의 최고수로 불렸던 현현자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의도치 않은 기연 덕분에 장삼풍의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했다.
그만큼 무당의 무공은 깊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젊은 제자들이 활약할 거고, 강호를 느끼고 세월을 이겨낸 제자들이 장로들을 이어 무당의 무공을 점점 강하게 바꿀 거요."
"뭐. 태극혜검을 해석하면 장문이 애원하지 않아도 그리되지 않겠소?"
"알았소. 수십 년 쌓인 먼지를 단번에 치우려고 한 내 잘못이오. 일단 사제를 설득해 태극혜검의 해독을 돕는 것부터 시작하겠소."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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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두 분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오."
공형선과 왕경초를 따로 부른 구후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사부가 무당의 장로가 되면 나도 자연스럽게 무당 제자가 되오. 그럼 난 사문의 명에 따라 태극혜검의 해석을 도울 거고, 그 과정에 무당은 더 강해질 거요."
공형선과 왕경초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린놈이 큰소리친다고 비웃기엔 그날 구후영이 연무장에서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도 어마어마했다.
"방주가 이미 결정을 내린 건 알겠고, 우리가 반대해도 일이 진행될 것임은 알겠소. 나나 왕 당주 모두 방주를 지지하려는 마음이 굳건하오. 그러나 우릴 따르는 형제들을 어찌 설득할지 더없이 막막하니, 가르침을 주시오."
공형선의 말에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소림 주변에 강한 문파가 있소?"
소림이 있는 하남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오백 리 안에 큰 문파가 없다.
"무당이 강해지면 호북도 똑같이 될 거요. 그렇다고 철혈방이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오."
구후영의 말에 왕경초와 공형선이 눈빛을 반짝였다.
"소림과 마찬가지로 무당 역시 속세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오. 그 부분을 철혈방이 메꿀 수 있소. 그렇게 되면, 어쩌면 무당이 소림을 능가할지도 모르오."
고고한 모습을 연출해야 하는 소림과 무당으로선 세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 많은데, 그 부분을 철혈방이 대신해줄 수 있다.
"게다가 철혈방이 사라지면 무당도 토사구팽을 걱정해야 하오."
토끼를 다 잡으면 다음 순서는 개를 삶는 거고, 쏠 새가 없으면 활도 장롱 안에서 먼지가 쌓이는 신세가 된다.
"무당에도 이득이 되니 배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됨은 알겠소.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오."
무당과 철혈방이 대놓고 서로 칼부림을 한 적은 없지만, 백 년 가까운 기간 알게 모르게 쌓인 원한은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무당이랑 손잡으면 금검당과 은도당은 호남과 귀주에 집중할 수 있소."
금검당과 은도당이 호북을 놓지 못한 건, 약초와 가죽과 철 등을 운송하는 경로 중 가장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로 호북녹림연맹이 있을 정도로 산적이 많은 곳이고, 호북과 호남 사이의 동정호엔 수적도 넘친다.
철혈방이 무당과 한 몸이 되면 더는 호북에 돈 들일 필요가 사라지니, 금검당과 은도당 입장에선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다.
"민초와 가까운 철혈방과 달리 무당은 부자들을 많이 아니, 일감이 끊길 걱정도 없을 거요."
구후영이 무당과 손잡아야 하는 이유를 계속 찾아냈다.
"대부분이 호남 출신인 금검당과 달리 우리 은도당은 귀주 출신보다 호북 출신이 많소."
왕경초가 자신의 우려를 토로했다.
"호북을 무당에 내주고 다신 오지 말라는 것도 아니잖소."
구후영의 말에 왕경초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형선이야 이득이 확실한 일이라 쉽게 마음이 움직였지만, 왕경초는 망설임이 있었다.
"철혈방의 이름을 바꾸는 건 천천히 하고, 내가 무당의 기명제자가 되는 것부터 발표하겠소. 무당 장문이 내게 큰 가르침을 준 풍 대협의 제자이고, 정학 진인과 현현 진인과의 인연도 있으니 아주 억지는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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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자리에 와서 진심으로 축하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리오."
구후영과 옥무영이 어깨 나란히 서고, 옥무영 곁엔 현영자가, 구후영 곁엔 끝내 난화검법의 초식을 다 잊고 후련한 얼굴을 한 풍불지가 섰다.
"다 아시리라 생각지만, 혹시 모르는 분이 계실지 모르니 정중히 소개하겠소. 이분은 무당의 옥무영 옥 장문이오."
옥무영이 양손을 맞잡고 포권하자 삼백 명이 넘은 사내들이 환호로 화답했다.
"이분은 무당의 대장로 현영 진인이오."
현영자가 무당의 실세임을 알기에 환호가 전보다 더 컸다.
"이 분은 여기 옥 장문의 사부이자 내 검술 스승 중 한 분인 신검 풍불지 대협이오."
삐죽삐죽한 머리로 땅을 배집던 새싹들이 놀라 움츠릴 정도로 큰 환성이 터졌다.
"아마 모든 분이 깜짝 놀랐을 거요. 무당 장문이 철혈방 방주의 사형인 줄 누가 알았겠소."
손님들이 하하 즐겁게 웃었다.
"그에 옥 장문과 현영 진인께서 무당의 태극혜검을 내게 보여주기로 흔연히 결정했소."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는지, 손님들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무당의 넓은 흉금에 힘찬 박수가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소?"
구후영의 말에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발을 굴렀다.
특히 철혈방 방도 중엔 믿기 어려운지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사실 이에 앞서 무당일절로 불리는 정학 진인께서 내게 태극권을 가르친 일도 있소. 작고한 현현 진인도 내 태극권을 보고 나와 정학 진인의 관계를 추측하고, 함께 내공 수련을 한 거요."
"두 분이 대결했다는 건 헛소문인 거요?"
술에 취한 누군가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
"시작은 대결이었소. 그러나 내 태극권을 알아보신 현현 진인께서 내게 서로 내공을 주고받으며 수련하자고 제안했고, 난 일말의 의심도 없이 동의했소. 그 결과, 현현 진인은 삼풍 조사께서 남긴 태극혜검을 찾아냈고, 난 단숨에 절정의 경지로 도약했소."
구후영의 말에 사람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사형인 옥 장문의 말씀을 청해 듣겠소."
구후영의 말에 사람들이 환성으로 반겼다.
"무당 옥무영이오. 그간 무당과 철혈방은 소원한 이웃이었소. 그러나 강호의 풍문과 달리, 우린 생각의 차이를 좁혀 가까운 사이가 되려고 줄곧 노력해 왔소. 부족한 내가 무당 장문이 되고, 아직 어린 내 사제가 철혈방 방주가 된 것도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오."
옥무영의 말에 사내들이 무당과 철혈방을 연호했다.
"황제 폐하께서 무당에 진무관을 지을 걸 명했고, 그 일을 철혈방이 맡기로 했소. 그러나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하오."
옥무영은 잠깐 말을 멈추고 모두가 조용하기를 기다렸다.
"구후 방주는 물론이고, 공 당주와 왕 당주도 무당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거요. 그리고 무당 역시 철혈방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할 것이오."
옥무영의 말에 숨은 뜻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그저 환호했다.
"무당은 무당이고, 철혈방은 철혈방이오. 그러나 우린 이름만 다를 뿐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되려 하오. 오늘 이 자리에 온 모든 분이 증인이오. 무당이든 철혈방이든 이 맹세를 어기면 천벌을 받을 것이오."
그제야 옥무영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을 했는지 깨달은 사내들이 환호를 멈추고 눈알만 연신 굴렸다.
"호북 무림에 영원한 평화가 왔으니, 열광하고 환호하라!"
내공을 잔뜩 실은 옥무영의 외침이 홍엽산장에 크게 울렸고.
"우와아아!"
모든 사람이 목청껏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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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우리 거래 하나 하자."
광란은 자정에야 멈췄다.
구후영과 옥무영이 친근하게 손잡고 돌아다니면서 친분을 과시하고, 이 년 가까이 자신을 괴롭히던 난화검법을 해결한 풍불지가 상마다 돌아다니면서 술을 권한 덕분에 연회의 분위기는 그 이상 좋을 수 없었다.
신검과 잔을 나눈 자들은 더없이 존중받은 느낌이었고, 특히 철혈방 사내들은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하늘에 닿았다.
게다가 수백 명이 모였음에도 신검의 위명이 술 취한 자들의 마지막 정신을 꽉 잡아준 덕분에 술주정으로 분위기를 망치는 자 하나 없이 즐겁게 마무리했다.
"내가 사형한테 줄 수 있는 게 하나뿐이니, 그거 얘기요?"
옥무영은 술에 잘 안 취하는 체질이고, 구후영은 독도 안 통하는 몸이다. 덕분에 대부분 사람이 고주망태가 된 상황에도 둘은 멀쩡한 얼굴로 대화했다.
"그래. 오만 냥을 포기할 테니, 나한테 구결을 알려줘."
"무려 신검의 제자에 무당 장문이기까지 한 사형이 굳이 나를 통해야 하오?"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일부러 기 채우는 거냐?"
"몰라서 묻는 거요."
옥무영이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현영자는 내게 권력을 고분고분 넘기려 하지 않는다."
"권력욕이요?"
"아니. 현영자가 자기 권력을 내게 그대로 넘기면, 무당은 변할 수 없다."
현영자가 권력 인계를 하면, 옥무영은 조금 다른 현영자가 될 뿐이다. 소림을 넘는 게 평생소원인 현영자는 옥무영이 어떻게든 현재 무당의 구조를 깨고 좀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만들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대장로와 뒤로 거래하면 되는 거 아니오?"
"너 혹시 돈 싫어하니?"
"아무래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서 그러오."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즐겁게 웃었다.
"너랑 내가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란 게 믿기지 않는구나."
"꿍꿍이가 있단 말이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현영자와 거래하면 난 뭔가를 내놔야 한다. 난 물론이고, 현영자도 이걸 원치 않는다. 다음으로, 난 무공에 대한 이해가 느린 편이다."
옥무영이 자조하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니 태극혜검을 가장 정확히 이해할 너의 입을 통해 구결을 들어야겠다."
"좋소. 대신 사형도 무당에 가면 날 최대한 도와야 하오."
"당연한 얘길. 풍옥문의 삼백 년 역사에서 처음 생긴 사제인데. 내가 더없이 아껴줄게."
- 작가의말
빙동삼척 비일일지한 - 얼음이 석 자 두께로 어는 건 하루 추위로 될 일이 아니다.
어떤 성과든 시간과 경험과 노력이 쌓여야 함을 말하는 동시에, 그걸 뒤집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님을 강조하는 문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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